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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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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등록 2004-12-23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 선정한 2004년 올해의 인물 강의석군… 그는 기성세대에게 어떤 ‘경고’를 하는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2004년 겨울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대한민국 고3이었다. 강의석군의 투쟁과 같은 ‘미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올해 수능시험에선 수백명이 일사불란한 ‘핸드폰 작전’을 선보였고, 경남 밀양에선 성폭행 사건이 터져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들은 왜 저항과 도피와 일탈의 물결 속에서 몸부림치는 걸까. 강의석군은 시대의 징후로 읽힌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저항하거나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시대. 강의석군은 가장 정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마치 ‘골든벨’을 울리듯 기성세대에게 우리 시대의 경고음을 보냈다. 은 사회가 그의 경고음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강의석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6월16일 아침 서울 대광고 3학년 강의석군은 학내 방송을 통해 ‘종교의 자유 선언’을 했다.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배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어 강군은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었다. 학교쪽은 6월18일 선도위원회를 열어 강군이 전학하지 않으면 제적할 것을 결정했다. 7월8일 강군은 기말고사를 치르기 위해 등교했으나 선도위원회로부터 제적을 통보받고 퇴교 조치됐다. 이 과정에서 제적 결정을 반대한 강군의 스승 유상태 목사가 학교 교목실장에서 직위해제되기도 했다.

강군은 7월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 학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진정을 내고, 7월29일 서울북부지법에 ‘퇴학처분 효력 정지 및 지위보전 가처분 신청’을 냈다. 재판부가 9월1일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강군이 복교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임시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사태가 진행되자 강군의 친구들은 ‘청소년의 권리’(ROY)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명 운동 등을 벌였다.

강군은 8월11일부터 학칙 개정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법원 판결에 따라 9월2일 다시 등교한 뒤에도 단식은 계속됐다. 단식 37일째인 9월16일 가출한 강군은 9월20일 경남 고성에서 발견돼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마침내 단식 46일째인 9월25일 강군은 학교쪽과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예배를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의 자율권을 준다”는 데 합의하고 단식을 풀었다. 그는 학교쪽이 합의를 하고도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며 10월16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단식에 돌입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은 강의석군과 탈학교생 겸의 대담… “서울대 입학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
학교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묵묵히 밀어붙인 강의석군과 일찌감치 학교를 떠나 독립영화 연출에 뛰어든 탈학교생 겸. 같은 방향의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묘한 대조를 보였다. 46일의 단식에도 상처받지 않은 강의석군의 체격은 건장하고 묵직했으며 겸은 야위고 날렵했다. 그래서인지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하자”며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겸: 안녕하세요. 어, 사진 찍어요? 분장 같은 거 안 하나. (웃음) 저는 학교는 안 다니고 에 글을 쓰고 있어요. 올해의 인물로 뽑힌 거 아시죠?

강의석(아래 강): 아, 그랬어요?

겸: 모르셨어요? 연말이면 신문사에서 그런 거 하잖아요. (웃음) 축하드려요. 저도 많이 얘기하고 싶었어요. 우선, 왜 굳이 종교의 자유 문제를 고민했는지.

강: 종교의식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에 새롭게 눈뜨게 됐는데,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종교의 자유가 다른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문화가 학생들 몸속까지 스며들어서 세뇌시킨다는 것이 심각하다고 봤어요.

겸: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할수록 나중에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은데, 교내에서 그런 문제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지요.

강: 교내 방송을 하고 나서부터 절 지지하겠다는 친구들이 생겼고, “형, 나도 같이 갈래”라고 말하는 후배들도 있었어요. 함께하면 확산 효과는 있겠지만 우선은 다 같이 고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해서, 우리 학교 친구들은 제가 오히려 말렸어요. 대신 다른 학교 친구들이랑 연대를 시작했죠. 사립 미션스쿨에 다니는 친구들도 다칠 위험이 커서 공립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연락해서 같이하자고 했고요.

겸: 부모님이 상당히 지지를 해주셨던데요. 그런 부분이 의석씨에게 큰 힘이 됐을 거 같아요.

강: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부모님께선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계셨어요. 전 이 현실을 견딜 수 없었고, 지금 못하는 걸 대학 가서 할 수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겼어요. 퇴학이냐 전학이냐 두 가지 선택이 강요된 것이 기폭제가 됐어요. 답이 없잖아요. 퇴학 조치가 내려지자 부모님께서는 퇴학은 안 되니까 전학 서류도 취소하고 교육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죠. 부모님께서 절 믿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변하셨죠.

겸: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을 학교 다니면서 많이 듣게 되거든요. 저도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난 경우고. (웃음) 제적 통보까지 받고 지금도 임시학생으로 남아 있는데,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학교를 나갈까 말까 고민했을 것 같아요.

강: 6월18일에 방송을 할 때 이런 말을 했어요. “마지막에 제가 떠나야 할 상황이 오거나 떠나게 된다면 그때까지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때는 떠날 것도 고려했어요. 자퇴도 알아보고 그랬는데 결국 현실 회피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요? 난 혼자 욕하거나 일기장에 욕을 써요.” 겸이 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하긴 촉망받는 모범생이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가 됐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강군은 “당장 맞장 뜰 일이 아니면 밝은 면만 생각한다”며 싱긋 웃을 뿐이다. 그런 낙천적인 성격이 그를 지탱했을 것이다.

겸: 전 처음에 에서 의석씨가 교육청에서 1인시위 하는 것을 보고 ‘이런 문제야 너무 많이 들었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겼어요. 그리고 9월부터 단식 시작하는 것을 보고 ‘얘 엄청 독하네’(웃음)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학교에 끝까지 남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힘들거든요. 학교에서 소외됐다는 느낌 자체가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단식할 때 사진을 보면 광대뼈 나와가지고 침이 막 나오는 것 같고. (웃음) 사실 사진기자들이 그런 분위기 연출하잖아요. 40일 넘게 단식했으니까 완전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거 같아요.

강: 단식하면서 길 가다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날 때가 있어요. 지리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씻는다고 목욕탕에 갔는데 나올 때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나 봐요. 일어나보니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더라고요. 눈앞에서 물방울 같은 게 계속 나오는 거 같고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데 안 돼요.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때 누가 옆에서 이거 먹으면 산다고 빵을 줬으면 먹었을 거예요. (웃음)

겸: 저 같으면 ‘너무 힘든데 이번 기회에 죽어버리고 싶다(웃음), 그만두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강: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어요. 단식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지만, 제가 나태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면도 있거든요. 자신을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포기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엄청 배가 고프긴 했어요. (웃음) 다른 사람들은 단식하면 거식증 생긴다고 하는데 전 오히려 먹고 싶더라고요.

겸: 저도 그 기분 알아요. 전 돈이 없어서 자주 굶어서 현기증이 나요. (웃음) 원래 탈학교생들이 자주 굶고 다녀요. 미션스쿨에서 종교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얘기해주시죠.

강: 사립학교 중에서 특정 종교에 소속된 재단의 사립학교에 입학하면 종교활동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아요. 매일 아침 예배를 해야 된다거나 매주 1시간씩 종교교육을 받아야 된다거나 하는 것이 있고, 학생회나 학급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특정 종교 신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은연중에 종교를 가진 친구와 안 가진 친구를 차별하는 태도나 문화도 있어요. 그리고 교육이나 예배시간을 통해서 목사님들께서 타 종교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실 때도 있죠. 저희가 인터넷 카페에서 사례를 수집하다 보니 기독교 목사님이 천주교 신부님들 여자 밝힌다는 얘기까지 한 경우가 있더군요. 심한 학교는 헌금을 강제로 걷어요. 대광고등학교의 경우는 헌금을 걷어 불우이웃을 돕고 그 내역을 공개하는데, 일부 학교는 헌금을 걷고 사용처를 공개 안 한대요. 그리고 누가 냈고 안 냈고를 일일이 체크한답니다. 반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미션스쿨도 있어요.

겸: 강의석씨가 한 일을 안티 기독교로 받아들이는 분도 있던데요. 전 물론 그분들에 동의하지 않지만 반대로 궁금하기도 해요. 어떤 종교가 있는지.

강: 종교라고 딱 구분짓기는 그런데요, 동양 철학 중에 묵자나 장자 같은 사람을 좋아해요. 그쪽에 관심도 많고 생각도 많이 하는데 개신교, 가톨릭, 불교 이런 종류는 아니에요.

겸이 강의석군의 서울대 법대 합격을 예리하게 따지고 들었다. 탈학교생들은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다가 그 경력을 안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강의석군은 겸의 질문에 특유의 진지함으로 응수했다. 서울대 폐지 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대에 간다고. 그걸 반드시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겸: 저도 학교 다닐 때 여러 활동을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어쩌다 단체에서 저를 초청하면 학교를 다니니까 중간에 가야 되잖아요. 부장 선생님한테 가서 얘기하면 교감 선생님한테 얘기를 해보라고 해요. 교감 선생님은 안 된다고 하죠. 어쩔 수 없이 조퇴하고 갔다 왔는데, 그때 전 학교가 진짜 이상한 데라고 느꼈어요. 그 이후에도 적극적 활동을 찾아보다 절을 고칠 수 없겠다 싶어서 나왔죠. 학교에 3개월 안 갔더니 퇴학 처분이라고 하더군요. 퇴학보다 자퇴가 낫지 싶어서 도장찍고 나왔죠. (웃음)

강: 청소년 활동에서 학생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인 것 같아요. 활동에 투자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불가능한 현실이 문제죠. 저는 시험 기간이 가장 마음 편했어요. 다른 때는 공부보다 활동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오히려 인간답지 못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 활동을 했는데, 그걸 할 때는 여유도 잃게 되고 제가 도구화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살아왔어요.

겸: 전 의석씨를 보면서 참 욕심이 많으신 분이라고 느꼈어요. 1학년 때 부학생회장 하고 3학년 때 학생회장 하고 단식하면서 수능 공부까지 병행했다고 들었는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강: 하나에 미치면 몰두하는 건 있어요. 단식하면서 다행히 임시학생 신분을 받게 돼서 수능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 저도 자신에게 좀 놀랐어요. 밥을 안 먹어서 힘들기도 하지만 시간이 남는 거예요. 밥을 안 먹으니까 화장실도 안 가고 잠도 3시간만 자니까 21시간 그냥 공부만 했어요. 학교 나가서도 친구들이 옆에서 도시락 먹는데 귀 막고 공부하고 그랬어요. 다른 한편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고픔을 못 잊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겸: 단식을 하다가 어느 날 사라졌잖아요. 그 경로가 참 궁금했거든요. 다른 데서도 별로 이런 얘기 안 했던 것 같은데요. 왜 가출했는지, 가출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강: 단식을 계속할 건데,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하실 거 같았어요. 그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서 나갔죠. 진짜 소중한 나 자신과 대화해보자는 마음을 갖고 갔어요. 어디로 갈까 하다가 소설 처럼 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을까 생각했어요. 정말 책을 읽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면 잡힐 거 같아서 늘 가고 싶었던 지리산에 가기로 결심했죠. 지리산에 무작정 가서 걸었죠. 대피소 같은 데서 자고 돌아다니다가 산에서 내려오니까 갈 데가 없잖아요. 고기 잡으러 통영에나 갈까 생각 중인데 매표소 직원께서 절 알아보시고 신고를 하셨어요. 고성에서 경찰관 아저씨들이 오셔서 경찰차 타고 경찰서 갔죠.

겸: 낭만적인 가출이네요. (웃음)

강: 정말 낭만적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어요. 지리산 오르는데 세석평전이 펼쳐지는 거예요. 저기 오르면 너무나 기분 좋고 아름다울까 생각했는데 힘들긴 엄청 힘들었죠. 길 가다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 있잖아요. ‘스니커즈’ ‘핫브레이크’ 버리는 사람들 있는데 처음엔 이 아름다운 자연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아 저거 먹고 싶다 그랬어요. (웃음)

겸: 주워먹진 않았어요? (웃음)

강: 그냥 껍질만 있었어요.

겸: 가출했을 때 혹시 뭘 몰래 먹고 그러진 않았어요? (웃음)

강: 제가 약점이 있는데 거짓말을 못해요. 제 자신과의 약속이 있으면.

겸: 서울대 법대 합격했잖아요. 지지하신 분도 많지만 의석씨 활동이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나 의심하는 분도 있던데요.

강: 글쎄요. 제 활동이 서울대 입학의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서울대 입학이 제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봐요. 우선 법을 배워보고 싶었어요. 정치학이나 철학을 공부해 제 자신을 확장하고 싶기도 했지만 법이라는 게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니까요.

겸: 한국에서 서울대는 단순한 대학교가 아니라 최상위 계급으로 올라서는 관문 같은 것인데 그곳에 들어갔다는 게 의아했어요.

강: 글쎄요. 이건 나중에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저는 서울대를 폐지하고 싶어서 서울대에 가요. 서울대를 없애기 위해서. 외부에서 아무리 없앤다고 해도 서울대는 없어지지 않고, 내부에서 떠들어야지 서울대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서울대에서 안 뽑아줄까봐 여태까지 말을 안 했죠. 살펴보니까 서울대 폐지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변화시킬 순 있을 것 같아요.

단식 중에 목욕탕에서 쓰러져 생긴 이마의 상처와 삭발한 뒤 밤송이처럼 다시 자라는 머리만 다듬으면 강의석군은 ‘꽃미남’과다. 그런 ‘재목’에게 애인이 없을까. “있었는데 이번 활동 하면서 헤어졌어요. 제가 신경을 못 써줘서.” “아니, 혁명을 위해 여성을 희생하다니!” 겸이 또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그들이 원한 건 혁명이 아니라 작은 변화였지만, 그로 인해 잃은 것은 애인만이 아니었다. 부모님, 친구, 선생님…. 한순간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메마른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제발 자신을 봐달라고.

겸: 이제 대학생이 되겠네요.

강: 아직 불투명해요.

겸: 아, 임시학생이라서요?

강: (학교의 제적 조처에 대한) 판결이 남았는데 거기서 패소하면 입학이 무효가 되거든요.

겸: 다음주에 재판이 있다고 들었는데 불안할 것 같아요. 학생도 아니고 탈학교생도 아니고 임시학생이라는 이상한 신분인데요.

강: 안 되면 다른 곳에서 배우면 돼요. 꼭 대학교 가서 배운다는 생각은 없어요. 이 활동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도 크다고 생각하니까.

겸: 모든 사람이 투사로서의 강의석씨만 생각해요.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오해도 생겨났을 것 같은데요.

강: 우선은 사안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겠어요. 제가 교칙을 어겼다고 주장하시는데 방송실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허락을 구하고 사용했어요. 안티 기독교라는 비판도 근거가 없어요. 종교재단 학교에서 거짓 신앙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할 뿐이에요. 대광고 대 강의석의 싸움으로 비치는 것도 아니라고 봐요. 이건 전국 사립학교의 문제죠.

겸: 학교 다닐 때 회장은 아니었지만 임원이었는데, 저는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타입이었죠. 뒤에서 씹고 앞에서 웃고 있는. (웃음) 자퇴서를 쓰러 갔을 때 담임 선생님이 잘 살라고는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예 냉랭하셨어요. 가라, 이게 끝이었죠. 의석씨도 분명 모범생이었을 텐데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들이 한순간에 변했을 거 같아요.

강: 전 웬만한 것에 상처받지 않는데 학생회 담당 선생님께서 전교생 앞에서 제가 어기지도 않은 학칙을 8개 어겼다고 말씀하시면서 말미에 어머니가 어떻게 그렇게 교육하는가 하는 식으로 어머니를 폄하하셨어요. 전 못 들었는데 친구가 녹음을 했어요. 그 내용을 들으니 화나더라고요.

겸: 앞으로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강: 이 사안이 해결된 줄로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첫 단추만 끼운 거예요. 앞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려 합니다. 재학생들만 소송할 수 있는 줄 알고 머뭇거렸는데 졸업하고 3년 뒤까지는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 원고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미션스쿨에서 종교의식을 강요받았거나 양심에 상처를 주었다면 소송에서 승소하여 관행을 없애야 해요. 이것이 변화에 가장 큰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겸: 이제 거의 끝이 났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강: 지금까지 활동해오면서 서로의 다름이 누가 옳고 틀림으로 여겨지는 게 안타까웠어요. 서로의 다름이 차별이 되지 않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겸씨는 글만 읽어봤어요.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만나보니까 즐겁네요.



기성세대는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본 강의석…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타고난 집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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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에 갔던 딸이 돌아와서 공항에 픽업 나오느라 시간 약속을 못 지킬까봐 공항 라운지에서 글을 보냅니다. 의석이가 “원고 시간 약속 어기는 사람이 제일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 하여. 원래 집에서는 , 회사에서는 를 즐겨 보았는데 아들의 일을 겪으며 흔쾌히 와 을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12월16일 오전에 회의로 휴대전화에 신경을 못 쓰고 있던 중, 무심히 휴대전화를 집어들자 느닷없는 의석이의 합격을 축하한다는 기자님의 축하인사! 발표는 내일이고 인터넷상으로도 저녁 6시경에나 발표가 될 텐데…. 그래서 그 이후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여러분들은 그 심정을 모르실 것입니다. 사실 이날은 의석이가 교내에서 자유로운 예배선택권의 보장을 외쳤던 날로부터 꼭 6개월이 되는 날이었기에 감회가 더 새로웠습니다.
6월16일, 의석이 예배에 참여치 않겠다는 교내 방송 멘트를 시작으로,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의 1인시위, 학교의 퇴학 결정, 그리고 강제 전학 권유…. 그때 학교에 대한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의석이는 백배는 더 괴로웠으리라 짐작됩니다. 단식 중이어서 이미 기력이 쇠하였지만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 전념하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면서, 저 또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추석 휴무를 하루 앞두고 학교쪽과 의석이의 원만한 합의로 무려 46일간의 단식을 마치고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아들은 병원으로 책상을 보내달라 하여 병실에서 밤새워 공부를 하는 열정으로 의사와 간호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학교 복귀가 늦어져 서울대에도 마감 10분을 앞두고 서류를 제출하는 등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는 이웃,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과 타고난 성실성, 그리고 해야 할 일은 확실히 마무리하려는 집중력 등이 의석이를 앞서나갈 수 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우선 이제부터라도 의석이가 마음을 편히 하고 여행도 다니고, 같은 또래끼리 어울려다니고, 좋아하는 운동도 마음껏 하여 건강도 챙기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데 저 또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보려 합니다.
강재정/ 강의석군의 아버지




나는 바보다

강의석이 말하는 강의석…나의 미래는 파우스트가 아닐까

매일 아침 ‘나는 바보다’ ‘나는 효자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라고 목청껏 외치지만, 사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바보인 것만은 확실하다.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서 사랑받는다고 믿는 바보.
나는 마음을 먹으면 그에 따라 실천한다. 어렸을 때, 환경에 관련된 책에서 샴푸를 쓰면 물이 오염된다는 글을 읽고, ‘아니 어떻게 물을 오염시킬 수 있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하며 그때부터 몇년 동안 물로만 머리를 감았다. ‘아버지, 건강에 해로우니 담배 끊으세요. 그 대신 저는 지금부터 과자하고 청량음료는 안 마실게요’라며 일방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몇년 동안 좋아하던 아이스크림 하나 먹지 않은 것이 나였다. 물론, 왠지 머리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요즘은 비누로 머리를 감고, 아버지께서 여전히 담배를 피우신다는 핑계로 다시 과자를 가까이하는 것도 나다.
나는 차이를 인정하되, 그것이 차별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조건 없는, 차별 없는 사랑을 원한다. 여름이 되면 모기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특유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모기가 내 팔에 앉아 피를 뽑아 먹은 모습을 본다. 아프니까 화가 나기는 하지만 ‘까짓것, 내 피가 내 몸 안에 있나 모기 몸 안에 있나 그게 그거지’라고 생각하며 함께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모기가 어머니와 누나의 몸에 사뿐히 앉아 흡혈하는 모습을 보면, 갑자기 흥분해서 모기의 생명을 앗아간다. 모기를 잡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학교 내 종교 자유’ 사안을 알리기 위해 할 일이 많아 몸이 두개라도 부족한데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기자님들과 대화하다가 순간적으로 기자님들을 사람이 아닌 질문으로 여기게 되었을 때,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조용히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는 것이 나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깊게 고민하다가도 학기 시험이 다가오면 시험을 본 뒤에 다시 고민하자며 교과서를 펴는 것이 나다. 한편으론 이런 질문도 던져본다. 모든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미래는 파우스트가 아닐까?
끝으로, 이 글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곳에 대한 이야기가 이 공간을 채우기를 바라면서도 꿋꿋이 글을 써가는 사람이 바로 나이며, 나는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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