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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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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을 알아버린 그 순간

등록 2004-12-23 00:00 수정 2020-05-03 04:23

고등학교 시절 강제 보충수업 거부로 주목을 받은 대학생이 강의석군에게 띄우는 편지

▣ 김나영/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3학년

김나영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99년 강제적 보충수업을 거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학교 전체의 ‘왕따’가 되는 등 그의 고통은 컸다. 그는 당시 “신문만 봐도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한다. 지금은 평범한 대학생인 김씨가 강의석군에게 띄우는 편지를 싣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대학교 3학년인 김나영입니다. 강의석군은 아마도 절 잘 모르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강의석군과 비슷한 경험을 먼저 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 경험 덕분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신념은 고통스러웠다

저는 이해찬 1세대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특기적성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보충수업이 공공연히 행해졌답니다. 제가 살았던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일체의 다른 보충수업을 받지 않았던 저는 고등학교 때 역시 이름만 특기적성 교육인 보충수업을 거부했습니다. 좁은 교실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수업이 필요한 50명의 학생들이 일률적으로 해야 하는 보충수업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당연한 권리였던 수업 거부는 학교에 물의를 일으켰고, 그 일로 인해 한 학년 동안 힘들게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강의석군과는 다른 이유와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진 권리를 행사했음에도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는 점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힘들게 고등학교 1년을 보낸 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보충수업을 1년 동안 들으며 수능 공부를 하였고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단식 투쟁을 하고 제적을 당하고 법원까지 갔던 강의석군과는 많이 다르죠?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겨우 1년이라는 시간밖에는 견디지 못했냐며 부끄럽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겪었던 마음고생은 저만이 아는 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매스컴을 통해서 본 강의석군은 저에겐 영웅의 모습보다는 안쓰러운 동생으로 보였습니다.

멋지고 훌륭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당연히 내게 주어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는 사회는 고쳐나가야만 합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렇게 장장 12년 동안 학교는 그렇게 가르쳤고,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저는 고등학교 1년 동안 배웠답니다. 먼저 고쳐나가는 그 한 사람은 자신의 신념 하나 때문에 사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왜 모두가 알고 있는 정의가 실행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수록 내가 살아가기가 아주 편해진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게 되었습니다. 타협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한번 겪게 되면 그냥 안주해버린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군중들의 암묵적 동의를 깨는 것

강의석군이 타협을 택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겼다는 사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분명히 잘못된 현실은 바뀌어야 하고 앞장서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누군가가 되려는 많은 친구들에게 강의석군은 모범이 돼주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런 모범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모범이 아니라 군중들의 잘못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깨부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의석군의 이야기는 아마 몇년 동안 가끔 매스컴에서 다뤄지겠지만 고쳐질 듯했던 현실은 예전과 변함없을 것입니다. 1년 동안 힘들게 학교를 다니며 수업 거부를 하고 몇년 동안 매스컴에서 이름이 오르내렸으나 지금도 제 모교와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이 행해지고 있듯이 말입니다.

앞으로 대학생이 되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 같지만 강의석군이 눈을 질끈 감고 지나쳐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질 뿐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마도 제가 남들보다 심하게 그리고 강의석군보다는 덜하게 겪었던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디 강의석군이 다음에 저와 같은 처지가 되어 편지를 쓰게 된다면 저와는 다른 내용을 쓰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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