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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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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배처럼 살지 않겠어”

등록 2004-12-09 00:00 수정 2020-05-03 04:23

여성들간에도 조직생활 전반에서 ‘세대차이’… 새파란 후배들의 거침없음이 놀랍다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선배처럼 살지 않겠어.”

수십년 동안 ‘딸’들이 되뇌었던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는 말이 요즘 일터에서는 이렇게 ‘원용’되고 있다. 정글 같은 직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자 선배들에게 새파란 여자 후배들이 하는 말이다.

“조용히 떠나는 건 미덕이 아니다”

한 미디어업체에서 일하는 이아무개(30)씨는 최근 회사를 떠나는 여자 선배에게 애증 섞인 항변을 했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선배는 업무 실적을 둘러싼 갈등을 빚다 책임지고 사표를 낸 터였다. 그는 선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당한 처우에는 항의라도 해야 할 게 아니냐. 조용히 떠나는 건 미덕이 아니라 일종의 콤플렉스다.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그 선배가 각별히 자신을 아낀다는 것을 알기에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일해오던 그였다. 그러나 부서가 없어지면서 자신을 포함해 후배들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는데도 선배가 “참고 분란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한 대목에서 그만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씨의 주장은 이것이다. “왜 선배가 살아온 방식을 나에게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자기를 버리면서 조직에서 사랑받느니, 자기를 지키면서 조직과 불화하겠다. 선배처럼 살지 않겠다.”

직장에서 여성 비율이 증가하면서 조직생활 전반에 걸쳐 ‘세대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최초의…” “홍일점”이란 말이 익숙하게 들리던 시대에 사회생활을 했던 ‘언니 세대’에게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후배들의 거침없음은 놀랍기만 하다.

이들의 특징은 채용 과정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지난 10월 한 홈쇼핑 전문업체의 MD(구매관리자) 채용 면접시험장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한 20대 여성이 “면접 볼 기회라도 달라”면서 다짜고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들고 온 것이다. 그는 면접관들에게 “시간 낭비하게 안 할 테니 몇분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제시한 회사의 상품 구매 장단점 분석 자료는 훌륭한 보고서 수준이었다. 비록 최종심사에서는 탈락했으나 채용 담당자는 그를 두고 “다음 기회에는 무조건 1순위가 될 것”이라며 “어디에서든 탐낼 인재”라고 칭찬했다.

올해 1월 (주)태평양에 입사한 이가화(26)씨도 ‘준비된 태도’로 마케팅 부문 40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주인공이다. 그는 일찌감치 태평양을 ‘내 회사로 찍고’ 대학생 모니터 요원부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한달에 두번씩 회사를 찾아 신제품 테스트, 광고 전략 토의 등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는 꾸준히 작성한 모니터링 자료와 1년 이상 스크랩한 태평양의 브랜드별 광고 및 제품 분석 파일을 인사팀에 제출했다. 이씨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만 하면 답을 찾기 어렵다”면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학창 시절 보험사 아르바이트, 벤처회사 프로모션 업무, 관공서 사무보조까지 여러 종류의 일을 섭렵했다. 이씨에 이어 6월에는 김희정(23)씨가 ‘눈물겨운 노력’ 끝에 398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태평양 홍보실에 입사했다. 김씨는 올 초부터 업계 동향을 분석한 ‘내가 태평양에 입사해야 하는 이유’ 이메일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인사담당자에게 보냈다. ‘깜짝 홍보전’도 따랐다. 지난 3월 “태평양군과 결혼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첩장을 만들어 수시모집에 제출했다. 수시모집에는 떨어졌지만 결국 6월 공채에는 합격했다. 그때까지 회사에 보낸 이메일만 95통이었다.

“튀지말라”는 주문은 올드버전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피부로 와 닿는 실업 공포를 체감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느껴온 세대에게 “튀지 말라”는 선배들의 주문은 ‘올드 버전’으로 여겨진다. 선배 세대가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금과옥조로 여겼다면, 후배 세대는 ‘여성의 사회적 생존’에 몰두한다. 선배 세대가 상시적인 기회의 불평등과 성차별에 시달렸다면, 후배 세대는 그 모든 것과 함께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문제까지 안고 있다. 전체 취업 여성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도 여성의 경제활동에 그림자를 드리운다(2004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취업포털 사이트 헬로잡(www.hellojob.com)이 지난 8월 20대 남녀 회원(329명)을 상대로 온라인 조사를 한 결과 ‘계약직·파견직이라도 기회만 있으면 취업하겠다’고 응답한 여성은 55.6%로 남성 44.4%를 훌쩍 앞섰다. 여성의 일자리 찾기가 남성에 견줘 더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게다가 지금 막 사회로 쏟아져나온 여성들은 양성평등의 가치나 여성의 자기 정체성 확립을 학창 시절부터 일찌감치 습득한 이들이다. 사회생활을 위한 외부 환경은 크게 바뀌지 않은 반면, 개인의 필요와 동력은 가파르게 상승한 셈이다. 직장생활이나 조직 적응의 방식 역시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한 대기업 과장인 30대 초반의 ㅂ씨는 여성 할당제로 임원이 된 선배를 볼 때마다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다. 부장 시절에는 온유하고 합리적인 성품이 돋보였는데 임원이 된 뒤로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가 눈에 많이 띈다고 한다. 중간관리자인 ㅂ씨가 가끔 임원회의에 배석할 때면 민망한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임원인 선배가 나이 많은 남자 부장이 보고를 할 때 말을 툭툭 자르거나 심지어 반말을 하기 때문이다. ㅂ씨는 “회사 전체적으로 (그 선배를) 할당제 수혜자로 여기거나 임원진 내에서도 여자 임원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꼭 남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권위를 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인정받는 여자 선배일수록 출산이나 육아 문제, 혹은 사생활에 대해 배려를 안 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ㅂ씨는 “‘선택받은 몇명’이었던 세대의 충성심을 후배들에게도 요구하는 것은 남성중심적 문화의 연장”이라고 잘라말했다. 여성성을 버리고 남자들의 문화에 전적으로 맞추거나, 아니면 여성성을 부각해서 남자들에게 예쁨받거나 두 가지 극단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선배들의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 서비스 전문업체에서 일하다 최근 직장을 옮긴 최아무개(28)씨도 같은 얘기를 했다. 전 직장은 여성 비율이 30%를 훌쩍 넘어 여성 우호적이리라 내심 기대했는데, 시간외 수당 등 응당한 권리를 찾거나 출산·육아 문제에 신경 쓰면 “역시 여자는…”이라며 실눈 뜨는 분위기가 다른 회사 못지않았다고 한다. 최씨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헬스클럽에 다니는 것을 두고도 구설이 많았다. 최씨는 “여자 선배들일수록 은근히 더 조직에 헌신할 것을 종용했다”면서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존경스럽지만, 솔직히 ‘여기 있다가는 저 언니들처럼 되겠구나’ 하는 공포도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밤낮 없이 일하느라 건강 버리고 심지어 성격까지 버리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언니’들은 최씨에게 역할모델인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됐다. 최씨와 그 친구들에게 ‘능력 있는 여자’란 일에 ‘올인’하는 여자가 아니라 ‘공사 구분 잘하는 여자’이다.

젊은 세대는 부당한 요구에 즉각 반응

합리적이고 공정한 룰이 적용되는 동네에서든 여성 차별적 인식과 문화가 판 치는 동네에서든 ‘여성적 가치’와 ‘세대적 가치’는 종종 충돌을 일으킨다. 일상적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고용이나 처우 문제 등 갈등이 생겼을 때는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최순임 조직국장은 “젊은 세대는 부당한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시정하는 경향이 큰 반면 개별적이고, 윗세대는 대놓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체험 속에서 연대의 가치를 안다”고 말했다. 최 조직국장은 “어느 직장에서든 둘이 결합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크다”라고 덧붙였다.



‘말 잘 듣는 여자’의 시대는 가고…


창의적이고 위기 대처력 강해야 잘 팔려… 남성 독무대였던 영업쪽 지원도 폭발적 증가


공정한 환경에서는 여성들은 남성들에 견줘 ‘경쟁력 높은’ 결과를 내놓는다고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입을 모은다. 전형 과정에서 출신학교, 출신지역, 가족관계 등이 가려진 채 진행된 공개채용이나 각종 공인시험 등에서 여성들이 눈에 띄게 약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 210명을 뽑은 국민은행 공채에서 은행 사상 최초로 여성 합격자가 58%(122명)를 차지해 남성을 앞질렀다. 국민은행 인력개발팀 김동익 차장은 “(여성이) 절반은 될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이었다”면서 “남녀간 ‘기회의 평등’뿐만 아니라 ‘결과의 평등’도 요구받는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결과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채용 과정에서 ‘여성 약진’의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고 한다. 우선 여성들은 “남자랑 비슷해서는 떨어진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서 적극적으로 입사 준비를 한다. 두 번째로 남성보다 수평적 의사소통에 능해, 인터넷 취업 카페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정보를 활발히 공유하고 습득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들어 여성 신입직원 비율 30%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전자공학과나 기계공학과 등 이공계 학과 출신들을 주로 뽑는 채용 특성상 눈여겨볼만한 수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학에서 배출되는 관련 전공자들은 남녀 비율이 80 대 20인데 입사할 때는 여성이 30%를 넘어서니, 동일한 경쟁 조건이면 여성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가 특별히 할당을 한 결과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독무대였던 분야에도 여성들의 ‘대시’가 뜨겁다. ‘영업의 꽃’으로 불리는 자동차 영업에도 여성들의 지원이 부쩍 늘었다. 르노삼성 인사팀 이경화 팀장은 “얼마 전 신입사원 채용 때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한 여성이 지원했는데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강점을 어떻게 영업 분야에서 살릴지 조목조목 내세워 화제가 된 일이 있다”면서 “요즘 젊은 여성들은 ‘오피스 레이디’들이 갖는 제약조건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흔히 ‘오피스 잡’으로 불리는 조직관리나 사무행정 분야는 위계 문제나 대인관계가 복잡해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평가받기 어렵지만, 영업직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받고 보상도 확실히 따르므로 여성들의 접근이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팀장은 “지금 막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은 도전적인 과제를 좋아하고 돈에 대한 욕심을 전혀 숨기지 않는 게 특징”이라면서 “‘차별 없이 경쟁해 돈도 많이 벌겠다’는데 회사가 마다할 이유가 있나”라고 덧붙였다.
기업에서 필요로하는 여성 인력의 특성은 어떤 것일까. 굳이 구별하자면 ‘조직융합적’ 인력보다는 ‘시장적응형’ 인력이 필요하다는 게 김동익 국민은행 차장의 설명이다. 김 차장은 “일사불란함이 강조되던 고도성장기에는 다소곳하고 튀지 않는 여성이 선택됐다면, 요즘은 창의적이고 위기 대처력이 강한 여성이 선택된다”면서 “남녀 불문하고 말 잘 듣고 별 결과 내놓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개성이 강하더라도 회사에 득이 되는 결과를 내놓는 사람이 조직생활에서도 각광받는다”라고 말했다.




여성과 남성이 ‘돈벌기 게임’을 하면?


미국 뉴욕에서 진행된 가 남긴 의미심장한 교훈

▣ 이미경/ 전 기자 friendlee@hani.co.kr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청춘남녀를 여성팀과 남성팀으로 나눈 다음 “대도시에서 돈을 잘 벌어보라”는 숙제를 냈다고 하자. 두 팀은 같은 업무를 얼마나 ‘다르게’ 해낼까.
비슷한 실험이 지난 1월 미국 뉴욕에서 진행됐다.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 그룹은 “13주에 걸친 사원 면접”을 내걸고 ‘서바이벌 게임’을 벌였다. 미국 각지에서 몰려든 21만명 중 남녀 8명씩을 골라내 이들을 여성팀과 남성팀으로 나눈 다음 “10가지 물건 가장 값싸게 사기” “뉴욕 시내에서 노점 차려 레모네이드 팔기” “허름한 주택을 리모델링해 높은 값에 임대하기” 등을 과제로 안겼다. 각 과제에서 진 팀은 일을 망친 팀원 한명씩을 잃게 된다. 최종 승자에게는 그룹 최고경영자(CEO)가 될 자격과 25만달러(약 3억원), 그리고 날씬한 크라이슬러 스포츠카를 준다. 이 게임은 <nbc>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고, 우리나라에도 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다(OCN 방영, 원제는 <the apprentice>).
전반부 결과는 여성팀의 완승이었다. 여성팀은 8명 그대로 남았는데 남성팀은 4명으로 줄었다. 비결은 눈부신 ‘팀워크’였다. 여성들은 서로의 강점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협업에 나선다. 차이나타운에서 오리를 살 때는 애교가 많은 이가 주인에게 아양을 떨어 물건값을 깎고, 금궤를 살 때는 주식거래 경험이 있는 사람이 협상의 주체로 나서는 식이다.
여성들은 게임이 끝나면 “나는 여성이란 걸 무기로 내세우기 싫다”고 강조하거나 “아무개를 믿었지만 협상을 잘했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뒷담화’를 하기도 하지만, 다음 게임이 시작되면 팀의 승리를 위해 간이라도 빼줄 태세로 덤빈다. 반면 남성들은 팀장이 내린 지시가 마음에 안 들면 천연덕스럽게 ‘태업’을 한다. 서로 그 분야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한다. 게임에서 패배한 뒤에는 책임을 떠넘기며 ‘탈락자’를 찍어내는 데 골몰한다.
4차례의 경쟁에서 여성팀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자, 주최쪽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남은 이들을 남녀 혼성팀으로 재편했다. 이때부터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 남성들은 사전에 음모를 꾸며 팀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여성을 팀장으로 뽑은 뒤, 자신이 속한 팀이 일부러 패배하도록 한다. 그리고 패배의 책임이 모두 팀장에게 있다고 주장해 그 여성을 탈락자로 만든다. 여성은 자신이 음모의 희생양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팀원들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를 끝내 하지 못한다. 팀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여성들의 경쟁 방식은, 오직 ‘최후의 승리’를 목표로 물불 안 가리는 남성들의 방식 앞에 번번이 무릎 꿇는다. 결국 ‘가장 자본주의적인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은 백인 남성이었다. 여성은 ‘공존’에 능하지만 남성은 ‘생존’에 능하다. 가 남긴 의미심장한 교훈이다.

</the></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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