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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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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꿈꾸며, 서울역으로!

등록 2004-11-04 00:00 수정 2020-05-03 04:23

2014년 7월, 외롭고 지친 두나라의 남녀가 하얼빈에서 만나 유럽을 가기까지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처음에 덜컥 여행을 약속해버렸을 때에는 마침 취중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와인을 한잔 또 한잔 홀짝거린 것이 화근이었다. 오전 3시. 느닷없이 휴대전화가 울렸다. “헬로!” 낯선 ‘아시안 잉글리시’가 귓가에 감겼다. “잇츠 미, 앨런.” 전화기 저편 남자가 신원을 밝힌 순간 10년 전의 기억이 쏜살같이 현재로 날아왔다. 우리는 10년 전에 만났었다. 꼭 한번. 2004년 여름 휴가를 가던 타이행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대만 청년 앨런.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어 연수를 받던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타이베이의 집으로 돌아가던 차였다. 급유를 위해 비행기가 타이베이에서 멈췄을 때 2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점잖게 악수를 하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더랬다.

그 뒤 10년 동안 우린 간간이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는 공부를 끝내고 러시아계 석유회사에 입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창춘 등을 오가며 바쁘게 주소지를 옮기던 그는 최근 1년 전 소식이 끊겼다. 온라인의 우정이란 것이 그처럼 허망한 것이지 싶어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 밤에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앨런, 그가 10년만에 전화해서는…

밤늦게 전화해 실례했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는 다짜고짜 휴가를 가겠느냐고 물었다. 음… 휴가라면 쌓아놓고 쓰지 않은 날이 보름쯤 되지. 그런데 갑자기 웬 휴가? 수많은 물음표가 돋아나려는 순간 갑자기 앨런은 울음을 터뜨렸다. 하얼빈으로 와달라. 그리고 함께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가보자. 그는 열차를 타고 몇날 며칠 아무 생각 없이 달리고 싶다고 했다. 그에 대한 궁금함이었을까, 색다른 여행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권태스런 일상이 이참에 반란을 일으킨 거였을까. 느닷없는 앨런의 제안에 나 또한 덜컥 예스를 외쳐버리고 말았으니. 2014년 7월10일 오전 8시, 나는 서울역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일주일 전 유라시아 철도 전문 여행사를 통해 예약했던 표를 티켓 창구에서 찾았다. 대합실에 마련된 안내 모니터엔 커다란 유럽~아시아 지도가 떠 있다. 스크린 위 빨간 점으로 표시된 주요 역들 가운데 하나를 짚으면 한글·영어·중국어·러시아어 4개 국어로 설명이 나온다. 지도 저 아래쪽에 그려진 한반도는 참 작아 보인다. 하지만 저 작은 땅에 모세혈관처럼 얽혀 있는 철도망 덕분에 우리의 시야는 대륙으로 열렸고, 우리의 무대는 그만큼 더 커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국을 잃은 조선인들이 타의에 떠밀려 한반도를 등지고 동북아시아 코즈모폴리턴이 됐다면 21세기의 우리는 동북아의 평화를 발 딛고 대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생각해볼수록 참 놀라운 변화였다. 경의선·동해선이 완공돼 남북을 두 줄로 이어주는 대동맥이 마련된 것이 2004년, 남북한이 철도로 화물을 실어나르게 된 것이 2005년, 여객열차 운행이 시작된 것이 2007년이었다. 남북한 화해가 무르익으면서 한반도와 대륙을 철길로 잇는 ‘철의 실크로드’ 사업은 속속 현실화됐다. 2010년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을 시작으로 중국횡단철도(TCR), 몽골횡단철도(TMGR)망이 뚫렸다. 서울역에 걸린 철도 시간표는 베이징·모스크바·울란바토르의 시간표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7시간만에 하얼빈에 도착하다

짐을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2007년부터 상용화된 한국형 고속철 G7은 최고속도 350km/h까지 달린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수첩을 꺼내 적었다. ‘비포 선셋.’ 앨런을 만났던 그해 개봉됐던 영화의 제목이다. 스무살 때 만났던 남녀()가 10년 뒤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나는 내용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하려면 7시간이 남았다. 나 역시 ‘비포 선셋’. 10년이 흐른 지금 석양이 지기 전에 하얼빈의 앨런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출발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차내가 2~3초 깜빡 암전이 됐다. 경의선의 남북 경계역인 도라산역을 방금 지난 것이다. 남한과 북한 철도는 급전 시설이 다르다. 교류(A/C) 방식인 남한과 직류(D/C) 방식인 북한의 철도를 지나는 데는 윙크처럼 짧은 암전이 필요할 뿐이었는데 왜 우리는 6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해야 했을까.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들린다. “우리 열차는 이제 시속 200km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북한과 중국 영역에선 G7은 속도가 떨어진다. 고속철을 위해 새로 선로를 깔지 않았기 때문인데, 2년 전 G7은 일반 선로에서도 속도를 낼 수 있는 틸팅 시스템을 개발했다. 보통 속도가 많이 떨어지는 곡선 구간에서 열차가 바깥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이 살짝 기울어지면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7년 전 처음으로 경의선을 타고 북한에 갔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붉은산’이었다. 남북한 기업이 공동 출자해 만든 그린네트워크재단이 1순위 역점 사업으로 잡은 것이 이 산에 나무를 심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효과는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차창 밖으로 7월의 푸르른 숲들이 스쳐간다.

신의주~단둥을 거치면서 열차는 잠시 멈췄다. 국경을 넘기 전 약식 세관·출입국관리·검역(CIQ)을 위한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철도망으로 엮는 구상은 기술적 어려움보다 정치·외교적 난제가 걸렸다. 2년 전 남북한, 중국, 몽골, 러시아, 옛 소련 연방국가들이 조인한 ‘동북아협의체’는 ‘3S’ 정책을 구호로 내걸었다. 화물과 여객을 최대한 ‘빠르고 (speedy) 편안하고(soft) 안전하게(safe)’ 실어나른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과거 몇 시간씩 걸리던 통관 절차가 빨라졌다. 서울역 같은 국제 정거장에서 수속을 밟고 탈 경우엔 국경역에서 간단한 확인 절차만 거치면 된다. 10년 전만 해도 국경을 넘을 때면 화물 송장까지 다시 번역해야 할 정도로 절차가 까다로웠다고 한다.

중국에 다다른 열차는 단둥~선양을 거쳐 서울을 출발한 지 7시간 만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고 대합실로 들어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친다. “참 안 변했구나.” 이 한마디에 “너 역시 늙었구나”라는 말을 안으로 씹었다. 열흘 전 한밤의 통곡은 어찌된 것인지, 오늘 만난 그는 침착한 인상이다.

저녁을 먹으며 하얼빈 시내를 잠깐 돌아보고 야간열차에 오르기로 했다. 안중근 의사가 세 발의 총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던 하얼빈은 본래 만주족 말로는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데 러시아가 둥칭철도의 철도기지로 개발하기 전까지는 쑹화강 연변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밤 11시 다시 열차에 몸을 실었다. G7의 침대차는 2층으로 달려 있다. 이야기를 나누다 앨런은 1층, 나는 2층에 누웠다.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황원을 열차는 계속 달린다. 앨런, 우리는 그렇게 외롭고 지쳐 있었던 것일까. 짧은 영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두 외국인이 이처럼 먼 길을 함께 달리고 있다니.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완저우리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6시께였다. 쉬지 않고 달려온 열차도 여기서 몸을 푼다. 국경을 마주하고 사람들의 생김새만 다른 것이 아니다. 완저우리역을 지나며 철로는 표준궤(1435mm)에서 광궤(1524mm)로 바뀐다. 러시아가 광궤를 쓰는 이유에 대해 어떤 이는 독일의 침략을 경계해 독일 궤도보다 폭이 넓은 광궤를 깔았다고도 한다. 표준궤로 1800km를 달려온 G7도 완저우리역에선 ‘변신’해야 한다. 2년 전부터 우리나라 열차에서도 상용화된 궤간가변 시스템을 이용해 바퀴간 폭을 넓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엔 모든 표준궤열차들은 이곳 완저우리역에서 바퀴를 떼내고 다시 광궤용 바퀴로 갈아끼우는 ‘의식’(보기방식이라 함)을 치러야 했다.

완저우리역을 지나 시베리아 평원으로…

시베리아 평원에서 맞는 아침은 더없이 상쾌하다. 파랗게 갠 하늘을 배경으로 자작나무 숲의 흰 몸체가 빛난다. 한참 달리다 언뜻언뜻 보이는 민가들도 대평원의 고요를 깨뜨릴 수 없다는 듯 조용하게 엎드리고 있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한반도의 좁은 가슴팍에 담겨 살아왔던 나로선 해가 뜨고 져도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이 땅의 거대함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서울을 출발한 지 사흘째. 우리는 이르쿠츠크역에 내렸다. 이곳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처럼 떠들썩하게 손님을 맞는 모양인지,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훤칠한 러시아 처녀 둘이 쟁반에 빵을 담아들고 승객들에게 나눠준다. 떠들썩한 환대를 받으며 역을 빠져나온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바이칼 호수로 향했다. 30분쯤 달리자 바이칼호에서 흘러나가는 유일한 물줄기인 앙가라강을 만났다. 거친 땅만 보고 달려온 눈이 저절로 시원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사실 호수라기보다는 바다 같은 바이칼호 앞에 섰다. 선착장 주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선 곳에선 연기가 자욱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바이칼호에서만 나는 물고기 ‘오물’을 굽고 있는 중이다. 바이칼호를 바라보며 훈제 처리한 오물을 보드카 한잔과 함께 씹어넘기는 맛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에게 시베리아 철도는 화물과 에너지 수송이 주된 역할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에겐 생활이다. 시베리아 철도는 여객 수송의 40% 이상을 담당한다. 앨런과 내가 탄 객실에도 벌써 동행 승객이 여러 번 바뀌었다. 여름방학 한달 동안 시베리아를 횡단하기로 했다는 프랑스 여학생, 바이칼호 관광에 나선 러시아 중년부부.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완저우리 국경역을 오가며 보따리 무역을 하는 중국인이었다. 술과 담배, 약품 같은 것을 취급하는 그는 보따리상 경력이 15년이라고 했다. 그는 몇년 전만 해도 보따리상들은 아예 같은 차량에 단체로 타고 각자 10달러씩을 걷어 세관원에게 집단 뇌물을 바쳤다며 웃었다.

2024년엔 또 무엇이 바뀔까

5일째. 드디어 우리는 모스크바 카잔역에 도착했다. 평소 모스크바에 여러 번 들락거렸던 앨런이지만 이처럼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른 건 처음이어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사실 울창한 타이가 삼림과 농민들이 군데군데 개간한 감자밭 같은 정경만 보아온 우리들은 대도시의 번화함이 더욱 으리으리하게 느껴졌다.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전진했던 러시아 사람들에게 시베리아는 얼마나 황량하게 느껴졌을까.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우리는 앞으로의 10년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남은 파리로의 여행을 위해 축배를 돌았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난 뒤 나는 앨런에게 1936년 일본 철도성에서 발행한 ‘기차시간표’에 대해 말했다. “당시엔 일본인들이 배와 열차를 갈아타며 일본·모스크바·로마·베를린·파리·런던까지 가는 노선이 있었대. 우리가 이번에 달려온 길을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꿈꾸었을지 생각해봐. 앞으로 10년 뒤엔 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씩씩하게 살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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