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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을 시민이 뽑자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법독재시대의 중심에 선 그들… 이 기득권층의 신문고를 어찌할 것인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헌재’가 마침내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했다.

헌법재판소는 수구인사 일부가 유포해온 “헌재가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을 수도이전 위헌 판결로 증명했다. 탄핵심판 때 반대여론에 밀려 ‘차마’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날로 첨예해지는 개혁과 수구의 갈등과 수도이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헌재의 커밍아웃을 부추겼다. 커밍아웃은 헌재의 ‘전력’에 비추어 예견된 것이었다.

드디어 확실한 커밍아웃을 하다

헌재는 1988년 9월1일 설립됐다. 군사독재 시절 사법부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에 맞서 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헌재는 탄생했다. 87년 9차 개정헌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헌재는 사실상 최종심의 재판기관으로 위헌법률심판, 헌법소원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을 담당한다.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한 헌재는 2004년 8월까지 1만377건의 사건을 접수해 9762건을 처리했고, 그 중 618건에 대해 위헌 내지 인용 결정을 선고했다(헌법불합치, 한정위헌, 한정합헌 포함). 헌재에 접수되는 사건도 해마다 늘고 있다. 88년 39건에 불과했던 접수 건수는 96년 522건, 2001년 1060건, 2003년 1163건으로 가파르게 늘어났다. 헌재는 ‘판결’로 자신의 ‘보수성’을 말해왔다.

헌재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던 시절도 있었다. 헌재는 지난 92년 노태우 정권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연기한 것에 대한 위헌 여부를 심사할 때 “신중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심리를 무기한 연기했다. 이 밖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판결을 늦추거나 회피해왔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헌재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던 시대에서 정치권력에 맞서는 시대로. 정치권력은 힘을 잃은 대신, 각 분야의 작은 권력들은 여전히 철옹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법권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의 권력보다 법관 사회의 질서가 헌법재판관을 움직이는 원리가 된 것이다. 헌법재판관 7~8명은 최근의 주요 판결인 국가보안법, 병역거부, 수도이전 부문에서 놀라운 ‘보수적’ 공감대를 보여주었다.

시민권 분야에서 헌재는 ‘가끔’ 전향적인 판결을 내렸다. 89년 법관의 판결 없이 행정기관이 보호감호를 선고하도록 한 사회보호법 조항에 대한 위헌 판결은 헌재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에도 헌재는 영화사전심의제도 위헌 판결, 동성동본 금혼조항 헌법불합치 결정 등 한국 사회를 한 걸음 전진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99년에는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제대군인에게 주던 군가산점제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려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인1표제 위헌 판결도 있었다. 하지만 헌재의 구실은 판결의 실체보다 부풀려졌다. 위헌 판결은 ‘뉴스’가 됐지만, 합헌 판결은 묻혀졌기 때문이다. 헌재는 준법서약서, 국가보안법, 사형제도, 낙선운동금지 등에 ‘꾸준히’ 합헌 판결을 내려 기본권 수호자로서의 구실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나마 위헌 판결을 낸 사안도 ‘조직화된 반대세력’이 없거나 ‘미처 파장을 예측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영화사전심의제·동성동본금혼제에는 조직화된 반대세력이 없고, 1인1표제 위헌 판결은 미처 파장을 예측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1인1표제 위헌 판결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이어져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일등공신 구실을 했다. 1인1표제 위헌 소송에 참여했던 김수정 변호사는 “헌재가 위헌 판결을 하면서 그 판결이 몇개의 함수를 거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보수세력이 더 사랑하게 된 헌법소원

노동권과 사유재산권에 대한 판결은 헌재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헌재는 대표적인 노동악법에 대해 일관된 합헌 결정을 내려왔다. 90년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에 대한 합헌 판결은 그 시작이었다. 그 뒤 직권중재제도, 공무원 정치활동 금지 합헌 판결 등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3권을 헌법에 명시한 흔치 않은 헌법으로 꼽힌다. 헌법은 노동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헌재의 해석은 노동권을 제약해온 것이다. 헌재는 2004년 3월 교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 조항에 합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헌재는 국제법 무시의 전통도 세워왔다. 최근의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병역법 조항에 대한 합헌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앞서 언급한 국가보안법, 준법서약서, 제3자 개입 금지 조항도 마찬가지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이 조항들을 개정하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이미 개정된 조항도 있다. 헌재의 합헌 판결에도 준법서약서제도와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은 결국 폐지됐고, 국가보안법도 폐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노동3권이 헌재가 무시해온 헌법 조항이라면, 사유재산권은 헌재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항이다. 헌재는 ‘신성불가침’의 재산권 수호자를 자처해왔다. 헌재의 위헌 결정 대부분이 재산권 행사를 직접 규제하는 국유재산법, 지방세법, 상속세법, 국세기본법 등 경제 관련 법률에 집중돼 있다. 헌재의 판결로 부의 재분배는 제약당했고, 중산층 이상이 혜택을 본 대신 서민층이 피해를 입어왔다. 헌법의 ‘자유시장경제’ 원리도 금과옥조다. 헌재는 택지소유상한제, 부동산 명의신탁자, 장기 미등기자에게 물리는 과징금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경제적 기득권층을 대변했다. 하지만 헌법은 사유재산권·자유시장경제 원리와 함께 적정한 소득분배 유지,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 개입 조항(119조 2항)을 두어 균형 잡힌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는 “제헌헌법 이래로 우리 헌법에는 복지국가의 전통이 반영돼 있다”며 “헌재가 헌법 정신을 균형 있게 구현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갈수록 기득권층의 신문고가 되고 있다. 헌법소원제도는 당초 시민사회단체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에는 시민단체의 활동방식을 벤치마킹한 기득권 세력의 단골 메뉴가 됐다. 예컨대 올여름 서울 강남의 재건축조합들이 ‘재건축 개발이익환수제’ 도입을 위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에 대해 위헌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수구세력은 한국방송의 개혁에 ‘딴지’를 걸기 위한 논리로 한국방송 수신료를 전기세에 통합 고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헌재의 수도이전 위헌 판결은 기득권층의 헌법 소원 열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 위헌 판결 뒤 기득권 세력은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등 4대 개혁법안에 대해 위헌 소송 카드를 내보이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수도이전 위헌 판결이 나온 다음날인 22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이 4대 법안의 국회 처리를 강행하면 헌법 소원을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모든 수단이 다 포함된다”고 답했다. 한국사학법인연합회는 벌써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대한 위헌 소송을 내기 위해 변호사에게 법률 검토를 맡긴 상태다.

“법전만 달달 외워 법철학이 없다”

헌재의 보수성은 헌법재판관의 ‘출신성분’에서 나온다. 헌법재판관의 면면은 ‘서울에 사는 엘리트 법조인’으로 요약된다. 헌법재판관은 대통령 지명 3명, 국회 선출 3명, 대법원장 지명 3명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6년이다. 헌법은 헌법재판관의 자격을 “법관의 자격을 가진 자”로 한정하고 있다. 현행 사법제도에서 법관의 자격은 곧 사법고시 합격을 뜻한다. 비법조인은 물론 법학 교수조차 헌법재판관이 될 길이 원천봉쇄돼 있는 것이다. 당연히 헌법재판관은 사법관료들로 채워져왔다. 역대 헌법재판관 28명 가운데 판사 출신이 22명, 검사 출신이 6명으로 순수 재야 출신 변호사조차 단 한명도 없다. 9인의 현직 헌법재판관 중 6명이 지법원장 출신이고, 2명이 지검장 출신이다. 가장 최근에 임용된 전효숙 재판관만이 서울고법 부장판사 출신이다.

거주 지역과 출신 학교의 편중도 심하다. 현직 재판관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고, 전직 재판관 19명 중 1명만이 퇴직 뒤 지방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서울대 출신은 28명 가운데 18명을 차지한다. 외국의 경우 헌법재판관의 인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오스트리아는 법관뿐 아니라 행정공무원, 법학교수 등에게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될 문호를 열어두고 있고, 독일도 대학의 법률학 정교수에게 대법관이 될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하승수 변호사는 “민주주의 국가 중에 한국처럼 폐쇄적인 사법제도를 가진 나라가 없다”며 “변호사 자격이 없더라도 균형 잡힌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지식인들이 헌법재판관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재판관이 ‘성공한’ 법조인으로만 충원되다 보니 사법관료의 보수적인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다양한 사회적 견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이재승 국민대 교수(법철학)는 “헌법재판관은 헌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시공부를 한 사람들이 아니고, 법관 재직시에도 그저 헌법을 장식으로 생각해온 사람들”이라며 “헌법에 바탕해서 법질서 전체를 되짚어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법전만 달달 외워서 법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은 2000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추후 헌법재판소장으로서 구상과 포부를 밝혀달라’는 질의에 “헌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법개혁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헌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해석되면서 존재한다. 더구나 헌법 해석에 대한 견해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사법개혁 없는 법치사회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수도이전 위헌 판결을 계기로 ‘헌재 구성의 다양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대법관·헌법재판관 시민추천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사법개혁 없는 법치는 치명적!

수도이전 위헌 판결로 헌재가 국민 기본권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판단까지 하는 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고, 심판받지 않는 권력이다. 더구나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물을 장치도 없다. 바야흐로 사법독재 시대가 열렸다. 사법독재의 중심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대법원은 더 위험하다

9명의 대법관 중 대법원장이 사실상 8명을 지명할 수 있는 구조 바꿔야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을 없애야 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6년이다. 현행 헌법은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임명제청권을 부여하고 있다. 형식상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지만, 사실상 대법원장이 전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대통령이 3명, 국회가 3명,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는 헌법재판관 구성방식에 비해 대법원장이 다른 13명의 대법관을 지명하는 구조에서 ‘소수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임명제청권뿐 아니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의 임명권도 가진다. 대법관이 아닌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10년 임기의 법관으로 연임되려면 대법원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 권한을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승수 변호사는 “대법원장의 지나친 권한은 일반 법관의 소신 있는 판결과 조직 내 비판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역사에도 법관 상호 견제의 원리가 존재했던 적이 있다. 1공화국 헌법에서는 대법관 회의에서 대법원장을 제청했다. 당시에는 법관 임명권도 대법관 회의에 있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개정된 3차 헌법개정 헌법에는 법조인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선출하도록 하는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명시했다. 외국의 경우도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하는 제도는 드물다. 미국의 경우,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은 상원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대법관을 선출한다.
한국에서도 대법관 임명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법조계 안팎의 인사 6~8명으로 구성된 대법관 제청자문회의를 두고 있다. 제청자문위원회는 직전 대법원장, 선임 대법관, 법원 행정처장, 법무부 장관, 대한변협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등 6명은 당연직 자문위원으로 구성된다. 필요한 경우 대법원장이 재야 인사 가운데 1∼2명을 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다. 하지만 제청자문위의 역할은 말 그대로 자문일 뿐이다. 대법원장이 제청자문위의 의견을 대법관 임명 제청에 반영하느냐 여부는 대법원장의 재량에 달려 있다. 대법관 제청자문회의는 파행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 열린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에서 당시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이 회의 도중 퇴장하고, 박 회장은 위원직을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문회의의 회의 방식이 자문위원들의 토론이 아닌 대법원장의 일방적 통고에 불과하다는 이유였다. 시민단체도 사법개혁 차원에서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임명 감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3년 시민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된 ‘바람직한 대법관·헌법재판관 추천을 위한 시민추천위원회’를 결성해 후보자들을 직접 추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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