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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 여당도 부끄러워하라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관료적 발상’여론 싸움 참패… 홍보전략도 거꾸로 가</font>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헌법재판소가 ‘관습 헌법’이라는 기이한 개념을 동원해 행정수도 이전 추진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가 헌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기보다는 정치성 짙은 ‘여론재판’을 했다고 비판받을 대목이다. 김형성 성균관대 교수(헌법학)는 “헌재 결정이 여론의 환영을 받을지는 모르나 법리적 차원에서 냉정히 따지면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천도 논란’에 질질 끌리다

그러나 정부·여당이 헌재 결정만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여론재판 가능성이 예견됐던 만큼, 그 이전 단계에서 정부·여당이 여론 싸움에 패배했다는, 즉 국민들을 폭넓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현실도 냉정하게 짚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 정부·여당이 대형 국책 과제와 관련해 정치적 패배에 몰린 것은 전북 부안 방사물 폐기장 추진에 이어 벌써 두 번째이다.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일찍부터 자중지란을 드러냈다.

김안제 신행정수도추진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6월9일 국회 답변에서 “현 계획상 신행정수도 이전은 사실상 천도이며, 신행정수도특별법을 국회가 통과시키기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이전 대상에 포함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한나라당과 행정수도 반대운동을 주도한 보수 성향 민간단체들은 이 발언을 계기로 “행정수도 이전이 아니라 천도”라며 반대여론 증폭의 고리로 단단히 활용하고 나섰다. 또한 “국민투표가 바람직했다”는 발언도, 이전추진 반대 진영의 국민투표론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를 냈다.

이해찬 국무총리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진화에 나섰다. 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행정부는 당연히 이전하되 입법부와 사법부는 해당 기관의 뜻에 따른다”는 쪽으로 의견을 조율했다. 이어 대외적으로 ‘행정부만 이전론’을 설파함으로써 ‘천도 논란’을 그런대로 잠재우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0월21일 결국 ‘수도는 서울’이라며 ‘천도 논란’의 연장선에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김 위원장은 그 뒤 추진위원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정부·여당은 행정수도 문제가 정국 쟁점으로 떠오르던 7월12일 김한길 의원(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당·정·청 협의체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대책위원회라는 당기구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신기남 당시 당의장은 “당·정·청 3각 편대를 구축했다”며 “당이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서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정·청 협의체는 국민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이렇다 할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몇 차례 내부 회의를 한 뒤로는 협의체 가동마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정부·여당의 일부 실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서울 비전 또는 수도권 비전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제시하는 게 선결 과제”라는 문제의식이 형성됐다. 행정수도 반대여론의 진원지가 수도권이며, 행정수도로 주요 기관이 옮겨가면 수도권은 공동화된다는 정서를 문제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이미 활발하게 토론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선거캠프는, 이를테면 청와대와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간 터에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거대한 녹색 축이 형성되며, 이 축이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국제적인 자연관광 공원이 될 것”이라는 등의 포지티브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울에 대한 네거티브 이미지만 부각

그러나 정부의 추진 주무기구인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이해찬·최병선)는 ‘청와대가 옮겨간 터에 무엇을…’ 또는 ‘과천 정부청사가 옮겨간 부지에 주민 생활에 도움이 될 또 다른 무엇이…’ 따위의 ‘손에 잡힐 만한’ 청사진을 만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2002년 대선 당시의, 다소 급조 인상이 있었던 ‘센트럴 파크…’ 개념 따위를 구체화하는 시도도 감지되지 않았다.

정부는 행정수도 이전 뒤 “서울은 경제수도로 행정수도와 함께 윈-윈할 것”이라는 원론적 주장을 되풀이했을 뿐 “어떻게 윈-윈할 건데?”라는 물음에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8월에 행정수도 이전 뒤 수도권 규제 완화 방안을 묶어 발표했지만 구체성이 약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나 과천 정부청사 터 활용 방안을 국내외에 공모하는 등의 다양한 이벤트를 펼치기만 해도 여러 아이디어가 백가쟁명했을 것”이라며 “그 자체가 희망과 비전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너무 관료적 발상에서 일을 처리했던 탓”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행정수도 홍보를 위해 적잖은 금액의 홍보비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를테면 신행정수도추진위원회·국가균형발전위원회·국정홍보처 등이 공동 명의로 “지금의 수도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낸 신문광고(7월19일)는 서울에 대한 네거티브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세계 30대 도시 중 서울에서의 삶의 질은 30위입니다”라는 카피를 동원함으로써 서울시쪽으로부터 “서울시를 국제적으로 홍보해도 시원찮을 판에 깎아내리기나 하다니…”라는 반발을 샀다. 구체적인 서울 발전 비전을 내기보다는 거꾸로 가는 홍보를 한 셈이었다.

신행정수도추진위원회는 올 들어 거의 매달 한종꼴로 행정수도 홍보책자를 발간했다. 따위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방식은 “요즘 세상에 누가 홍보책자를 읽어줄까?”라는 의문을 낳았다. 그나마 책자 내용도 대체로 행정수도 건설의 당위성만을 되풀이해 강조하는 ‘유신시대 국책 홍보’ 인상을 풍겼다. 행정수도 추진의 아킬레스건인 수도권과 비충청권 주민들의 상실감을 보상할 비전은 드물거나 추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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