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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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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에게 배울 건 없다

등록 2004-10-21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 브라질 경제가 살아나는 건 ‘우향우’ 때문이 아닌 중남미 국가 전반의 경제지표 호전 탓</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은 룰라한테 가서 한수 배워라?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과 브라질 노동자당(PT) 룰라 대통령을 비교하는 쪽은 노무현 정부가 룰라의 친시장적 ‘우향우’ 정책을 본받아야 한국 경제도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룰라가 좌파 노선이라는 애초의 우려를 씻고 ‘시장’으로 방향을 바꿔 브라질 경제는 잘나가는 반면, 우리나라는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 때문에 경기침체가 왔다는 논리다.

브라질 경제의 현주소를 아십니까

물론 노무현 정부가 룰라처럼 좌파 정권인 것도 아니고 분배 위주의 정책을 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어렵지만, 브라질 경제의 현주소부터 보자. 브라질은 1980년대 외채 위기가 발생해 오랫동안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된 나라로 1998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 편입됐다. 그런데 2003년 룰라가 들어선 뒤에 투자자들의 신뢰가 회복되면서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 2003년에 수출이 전년 대비 21%나 늘었고, 2002년 1.9% 성장을 기록한 뒤 2003년 긴축재정과 콜금리 인상에 따라 마이너스 성장(-0.2%)을 보였지만 올해는 4.5%대의 성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룰라의 정책에 안도감을 느낀 외국 자본이 돌아오면서 상파울루 증시가 급등해 지난해 한때 주가상승률 세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상당수 경제분석가들은 이것을 ‘룰라 효과’라고 부른다. 좌파의 집권으로 경제가 결딴날 것이라는 애초 우려를 벗고 룰라가 ‘뜻밖의’ 보수주의·실용주의 노선의 경제정책을 펴면서 ‘룰라 쇼크’ 대신 룰라 효과가 나타났고, 위기에 처한 브라질 경제를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글로벌경제실장은 “룰라가 좌파 노선을 걷지 않자 기득권 세력의 자본이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지세력인 노동자·농민들도 ‘룰라가 비록 우리의 기대와 다른 정책을 펴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편이므로 틀림없이 우리를 위해 저러는 것일 테니 일단 참고 보자’는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브라질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룰라가 시장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중남미 국가 중 브라질 경제만 유독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는 건 아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김수혁 과장(중남미 담당)은 “브라질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것을 룰라의 업적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며 “달러 약세로 2002년부터 외국 자본이 중남미로 들어오고 있고, 원자재 등 자원 수출이 증가하면서 대다수 중남미 국가의 경제지표가 호전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브라질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도 룰라의 시장원리 중시 정책 때문이라기보다는 상파울루 증시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외국 자본이 조금만 들어와도 주가가 폭등하는 수급 요인이 더 크다. 미국 금융자본의 경우 브라질 금융위기 이후 브라질 통화가 큰 폭의 평가절하를 겪었기 때문에 그만큼 환차손을 입을 가능성이 줄어들자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곳을 찾아 브라질로 들어오고 있다.

브라질 경제 회복이라는 것도 IMF와 월스트리트의 입맛만 맞추는 ‘금융시장 안정’만 뜻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경제학)는 “브라질 증권시장의 호황을 놓고 룰라의 성공을 말하곤 하는데, 이것이 금융자본의 입장에서는 성공이었는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성장과 고용”이라며 “금융소득 안정을 위해 고금리를 유지하다 보니 투자도 줄고 빈곤도 해소되지 않고 실업률도 13%대에 달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공사례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뉴욕 빙햄프턴대학 제임스 페트라스 교수도 지난 6월 발표한 글에서 “룰라가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는 오직 IMF의 정책수단(긴축재정 정책과 고금리 유지, 다국적기업 투자 유치 등)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그의 ‘탈레반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룰라 지지율 75%에서 30%대로

비록 룰라가 국제자본한테 환영받고 있다고 하지만 긴축재정 정책과 노동자 연금 삭감, 해고 요건 완화 등으로 복지가 더욱 축소되면서 룰라의 국내 지지율은 취임 초기 75%에서 최근 30%대로 떨어졌다. 일부에서는 “노무현 정부도 친노동자 정책을 버리고 ‘시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는 이미 규제 완화·민영화·자본시장 개방·외국자본 우대·노동시장 유연화 등 룰라보다 더한 우파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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