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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WEF 성적’을 떨어뜨렸나

등록 2004-10-21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국가경쟁력 11계단 떨어진 것에 보수언론은 정부 공격… 실제로는 재계의 주관이 심하게 반영된 조사</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좌파 ‘딱지’ 붙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쾌재를 부를 또 하나의 대형 호재가 터졌다.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이 10월13일 발표한 ‘2004년 국가경쟁력 보고서’에서 한국은 104개 나라 가운데 29위를 차지해 지난해(18위)보다 무려 11계단이나 떨어진 것이다. WEF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과 함께 국가경쟁력 평가 분야에서 두 축을 이루는 세계 유수 기관이다.

기업인 설문조사가 2/3 비중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적대감을 표시하는 이들에게는 이번 평가지수가 “좌파적 경제정책이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의 빌미로 삼기에 손색없는 재료로 여겨진다. 아니나 다를까, 보수언론에선 분배우선 정책과 노조 편에 치우친 노동정책에 화살을 돌리며 연일 불 같은 공격을 퍼붓고 있다. 15일치 사설에선 “이런 성적표를 받고도 발 뻗고 잔다면 정부도 아니다”는 독설까지 등장했다.

이번에 나온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는 과연 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좌파 정책’에서 비롯된 것인가? 또 WEF의 평가는 어떻게 이뤄지며,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할 만큼 공정한 것일까?

WEF의 경쟁력 평가지표는 모두 160개 항목으로 짜여 있다. 이들 항목은 기술지수(50%), 공공기관지수(25%), 거시여건지수(25%) 등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기술지수 항목에는 기술혁신과 확산 정도, 연구개발(R&D) 지출 수준, 인터넷 이용 수준, 정보통신 관련 법령(소비자보호·전자상거래) 등이 들어 있다. 공공기관지수 항목에서는 사법기관의 독립성, 부패 정도, 금융자산 보호 등을 평가하며 거시여건지수 항목은 경제 전망, 국가신용등급, 재정건전성, 저축률 등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160개 평가지표 가운데 무려 120개가 설문조사 항목(survey data)이란 사실이다. 설문조사는 예컨대 ‘정부 정책에 일관성이 있다고 보느냐’ ‘조세 징수 과정에서 부패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 1~7점까지 7단계로 나눠 점수를 매기도록 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이형근 연구위원은 “전체 평가지표 가운데 설문조사 항목이 75%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설문 응답자의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평가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한계가 있는 조사 방법”이라고 말했다.

WEF 조사에서는 국내총생산(GDP), 실업률, 저축, 인플레이션, 재정, 대외무역, 인터넷 사용자 수 등 객관적인 계량지표(hard data)도 함께 조사하고 있지만, 전체 항목의 4분의 1인 40개에 지나지 않는다. IMD가 전반적으로 계량지표를 3분의 2, 설문조사를 3분의 1 비중으로 두어 평가하고 있다는 점과 견줘 대조적이다.

또 하나, 세계경제포럼은 경쟁력 평가를 위한 설문조사 때 100% 기업인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WEF의 한국 경쟁력 평가 작업을 대행한 한국개발연구원(KDI) 여론분석팀의 이용수 연구원은 “설문대상은 세계경제포럼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설문대상자 소속 산업 부문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해 선정했으며, 올해는 최고경영자(CEO)급 132명의 기업인을 방문 조사했다”고 말했다.

노조쪽 의견은 반영될 통로 전혀 없어

여론조사 항목 비중이 높다는 점과 조사 대상자가 모두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재계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반영될 개연성이 높은 조사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노무현 정부 출범의 앞뒤로 정부와 재계 사이에 갈등 기류가 두텁게 형성돼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정도가 더욱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설문조사 항목인 노사관계 협력에서 한국은 최하위권인 92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지난해(86위)보다 더 떨어졌다. 노동자와 사용자라는 양쪽의 관계를 평가하는 항목임에도 노조쪽의 의견은 반영될 통로가 전혀 없다.

또 이번 조사에서 정부계약 투명성 부문이 지난해 18위에서 올해 49위로 급락했고, 수출입 때 부패 평가에서 34위에서 50위로, 조세행정 관련 부패 부분에선 47위에서 63위로 떨어지는 등 설문조사 항목에서 급락한 예가 많았다. 올해 새로 생긴 항목으로, 역시 기업인들의 주관적 심리 상태가 반영되는 정부 지출의 낭비성에선 57위를 차지해 전반적으로 순위를 크게 떨어뜨린 요인으로 꼽혔다.

반면, 우리 기업의 환경중시 경영은 세계 9위의 높은 점수를 받아 기업인 스스로는 자신들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나타나 실소를 금치 못하게 했다. 국내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일반 국민들도 그런 후한 점수를 줄지 의문이다.

이형근 연구위원은 “1999년 국가경쟁력 평가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할 당시 IMD의 평가 결과에서 설문조사 항목을 빼고 계량지표만으로 평가했더니 우리나라의 등수가 38위에서 15계단 올라간 23위로 나타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강삼모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1년 사이에 거시경제 지표가 크게 나빠진 게 아닌데도 전반적인 경쟁력 순위가 크게 떨어진 것은 서베이(설문조사) 항목에서 폭락했기 때문”이라며 “기업인들이 정부를 과도하게 나쁘게 보는 인식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올해의 경우 조사 시점 또한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설문조사를 대행한 KDI가 설문지를 배포해 수거한 것은 총선을 앞둔 4월 초·중순으로, 대통령 탄핵 사태 뒤의 후유증 탓에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시기였던 것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탄핵이니 뭐니 해서 여야가 지지고 볶을 때여서 기업인들의 심리가 위축되고 불만이 팽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조사 결과를 온통 무시하는 태도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조사 방법에서 뚜렷한 한계를 띤다고 하더라도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경쟁력 지표로는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로선 얼마든지 참고지표로는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쪽에서 순위가 높아졌을 때는 자랑스러운 치적거리로 내세우다가 등수가 떨어지면 애써 눈을 감으려 하는 이중적인 자세는 보수언론의 호들갑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정부는 경각심 가져야 하지만…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설문조사 방식에서는 실제로 심각하지 않더라도 응답자가 그런 인식을 갖고 있으면 답을 부정적으로 쓰게 된다”며 “경쟁력이란 게 경영인이란 개인의 인식과도 관련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등수가 떨어진 것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미래 성장 전망치를 낮춰 잡는 등 다른 많은 기관들에서도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걱정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로선 의연하게 대응하되 경각심은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형근 연구위원은 “정부가 잘한 부분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일관된 정책 기조에 따라 꾸준히 개혁을 추진하는 등 기본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설문조사 방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밝혀 정치적 공세에 악용되는 현상에 경계감을 표시했다.

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노사관계 협력 부문의 등수가 92위로 나온 것을, 노조편향적인 정부 정책의 결과라고 못박는 게 과연 합당한 것일까? 뒷맛이 개운치 않은 조사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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