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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더 중한 인권 어디 있나”

등록 2004-10-07 00:00 수정 2020-05-03 04:23

한의사였던 탈북자 김지은씨가 북한 인권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쏟아낸 쓴소리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0년 전 ‘하바닥 비서’(하급 당세포 비서)였던 아버지는 그에게 두통의 편지를 주었다. 한통은 당에 갖다 내라 했고, 다른 한통은 혼자만 보라 했다. 당에 낸 편지에는 “딸을 바칩니다.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고, 그에게 준 편지에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땅을 떠나라”고 적어놓았다. 그런 뒤 아버지는 9일간 물 한 모금 입에 안 대고 버티다 자진했다.

평생 건설현장에서 미장일을 했던 아버지는 인민을 굶겨죽이는 닫힌 체제에 절망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40년 가까이 충성해온 당을 끝내 배신하지는 않았다. 대신 딸에게는 두 가지 길을 열어줬다. 입당해 지배층으로 살지 새 세상으로 나갈지는 온전히 딸의 선택으로 남았다. 그는 뒤의 길을 택했고, 1999년 북한을 떠나 중국에 머물다가 2002년 3월 한국인 여권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해 입국 심사대에서 탈북자임을 밝혔다. 동의사(한의사) 김지은(38)은 탈북자 김지은으로 바뀌는 순간, 앞으로는 어떤 체제나 집단에도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미 상원에서 북한 인권법안이 통과된 뒤인 10월2일 김씨의 직장인 실향민 인터넷회사 근처에서 그를 만나, 한 탈북자가 ‘단독자’로서 판단하는 북한 인권과 김정일 체제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북한 사회에서 비교적 혜택받는 계층에 속했던 한 사람으로서 보고 들은 것과 의견을 말할 뿐, 모든 진실을 알 수는 없다”면서 “다만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얘기가 뻔한 정치적 목적에 악용되는 게 화가 나고 마음 쓰리다”고 미리 밝혔다.

- 정치적 목적에 악용된다는 게 어떤 뜻인가.

= 2년 전 북한 인권 문제가 쟁점이 될 때 한 아기 엄마가 어느 언론에 “내가 살았던 자그마한 도시에서 한해에 50∼60명씩 총살당했다”고 말한 걸 본 일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도시의 인구가 남아났겠는가. 내가 살았던 청진은 인구 70만∼80만명의 큰 도시였지만 30년 넘게 사는 동안 딱 두번 공개 총살을 봤다. 또 누군가는 생체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의사였던 나로선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 당황스럽다. 북한 인권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다. 문제 많다. 다만 왜곡하고 과장하는 것은 남과 북 어느 쪽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인권문제 과장해선 도움 안 돼

그는 지난 봄 한 단체로부터 미국 하원 통과를 앞두고 있는 북한 인권법안의 초안에 대해 찬반 의견을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 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대목을 보고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에게 혹시라도 기회가 있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정치 집단들이 이를 악용하지 않을까 걱정돼 망설였다”면서 “하지만 목숨을 건진 탈북자의 한명으로서 탈북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전제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북한 인권법안 통과가 중국에 머무는 탈북자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 근본 해결은 안 된다. 난민으로 받아들인들, 미국에 필요한 사람만 골라가지 않겠나. 남아 있는 이들은 오히려 더 심한 신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법안 통과 전에 비록 민간이지만 중국에 있는 미국 국제학교에서 탈북자들을 몰아내는 걸 봤다. 화가 치밀었다. 이 법을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만든 건지, 김정일의 비위를 상하게 해서 악을 돋워 긴장을 유지하려고 만든 건지 따져보고 싶다.

- 북한 내부 상황도 악화될까.

=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탈북자 가족들이 핍박받는다는 얘기는 아직 별로 듣지 못했다. 보위부 사람들도 “연계가 있으면 돈도 얻어쓰고 하라”고 슬쩍 얘기하곤 한단다. 남한 탈북자가 북한 가족과 휴대폰 통화도 할 수 있는 정도다. 요즘에는 ‘알’도 많이 요구한다고 한다. ‘알’은 나 같은 인기 방송드라마 DVD를 뜻한다. 왜 이렇게 풀어놓을까 궁금했는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북한이 정말 달라지고 있구나. 다른 하나는 김정일이 많이 불안하구나, 이렇게라도 유지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북한 가족들이 몹시 그립지만 막상 탈북을 권유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너무 막막하지만 않으면 견디어보라”고 얘기하고 싶단다. 그는 “(북한) 밖도 쉽게 살 곳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무산계급의 딸로 태어나 대학 공부까지 시켜주고 일반 노동자보다 3배 가까운 월급을 받는 의사가 되게 해준” 체제를 그가 ‘결별’한 이유는 뭘까. 그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직무’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고 말했다. 의사였던 그조차 식량난이 한창이던 93년에는 시골에 물건을 싸들고 가 팔려다 ‘쏜 총알’(사기)에 속아 8일간 꼬박 굶은 적도 있었다. 친한 친구는 남편과 아들을 3일 간격으로 잃기도 했다. 굶주림은 차라리 참을만 했다. 소아과 병동에서 어린아이들이 약이 없어 죽어나가도 속수무책이었고, 무상 의료는 빈말이었다. 약은 병원에 있는 게 아니라 시장에 가야 찾을 수 있었다. 환자들이 ‘선생님 어떤 약 사오랍니까’라고 당연히 물을 때마다 자신의 진료가 고작 ‘환자 주머니에서 돈 빼내는 일’이라는 데에 절망했다고 한다.

“어릴 때 김일성 생일에 내가 쓴 연설문을 난데없이 시당 교육비서 딸이 연단에서 읽을 때도, 노동자의 자녀라고 병원 배치에서 불이익을 받을 때도, 심지어 아버지가 환멸 끝에 자살하셨을 때도 ‘나를 키워준 당과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인민의 생명줄을 갖고 농간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체제는 미래가 없다. 처음에는 바깥 세상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자 하는 마음으로 강을 건넜는데, 나와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일신을 위해 가족과 친구들을 떠난 것은 죄스럽지만 체제를 배반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북쪽 사람들은 가난과 굶주림이 미국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사는 내 나라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는 노랫말처럼 학습된 단결과 정보 통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바깥 세상을 알면 달라지게 돼 있다.”

김씨는 “김정일 체제는 딱 10년이면 수명이 다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 전에는 무엇이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퍼주기는 해야 한다

- 10년으로 보는 이유는.

= 김정일이 1942년생이니 건강을 유지하며 지금처럼 실권을 잡을 수 있는 기간을 나름대로 그렇게 계산한다. 그 아들 김정철이 있다지만 엄마인 고영희가 죽었기 때문에 3대까지 이어진다 해도 정권은 쇠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이 있는 한 북한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개혁개방 하려면 벌써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러면 북한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아무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도 그걸 잘 안다. 그러니 기를 쓰고 딱 핵 카드 쥐고서 버티는 거 아닌가. 차라리 자꾸 건드리지 말고 그냥 뒀으면 좋겠다. 자유래왕하고 정보 확산해서 북한 사람들 스스로 다른 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제일 좋다. 안 그러면 부담은 다 남쪽이 지게 돼 있다.

그는 거듭 “나도 어쩔 땐 김정일이 당장 확 거꾸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그러면 한반도 전체가 아주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그가 건강 상담을 해주는 사이트에는 ‘나도 탈북자였으면 좋겠다’는 비아냥이나 탈북자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담은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는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남한도 아직 ‘서로 섞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말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일인독재·우상숭배 다 반대한다. 하지만 퍼주기는 해야 한다고 본다. 대가 없이 마구 퍼줬으면 좋겠다. 밥보다 더한 인권이 어디 있나. 누구든 사람의 생명줄을 놓고 정치적 타산을 할 수 없고 해도 안 된다. 묘하게 북한 인권을 들먹이면서 김정일이 당장 망해야 한다는 주장은 북한에 퍼주기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하고 맞닿아 있더라. 김정일을 당장 거꾸러뜨리자면 대안이 뭔지, 그런 주장 하는 사람들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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