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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거부 3년, 무엇이 변했나

등록 2004-07-22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공론화 후 군사법원에서 민간법정으로… 병역 거부 수감자 세계 1위에 국제 인권문제로 부상 </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병역 거부가 공론화되고 ‘운동’이 시작된 지는 불과 3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2001년 1월 의 보도와 같은 해 3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참석한 ‘징병제 워크숍’을 그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아직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지는 않았지만, 병역거부자들의 현실은 바뀌었다. 일단 법정이 군사법원에서 민간법정으로 바뀌었다. 공론화 이전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은 법정을 선택할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입대율 100%를 달성하기 위해 병역거부자들에게 입대할 것을 강요했다. 끈질긴 입대 종용을 견디기 힘들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입대 뒤 집총 거부를 선택했다. 2001년 6월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들이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군법상 항명죄로 최장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민간 법정에서 병역법 위반으로 1년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년6개월형은 재징집을 피할 수 있는 ‘최소 형량’이다.

2002년 1월29일 당시 서울남부지법 박시환 판사에 의해 병역법 제88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받아들여졌다. 박시환 판사는 종교적 신념 등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이들에게 대체복무의 기회를 주지 않고 처벌 조항만 둔 현행 병역법 88조 1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병역법 88조 1항은 현역 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 또는 소집에 불응할 때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위헌법률심판 제청 이후 병역거부자의 재판이 헌재 판결 이후로 미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일부 병역거부자들은 불구속 재판을 받기도 했고, 병역거부자의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최소 형량’을 선고하거나 보석으로 석방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2000년 말 1640명에 이르던 병역 거부 수감자 수는 2004년 6월15일 현재 439명으로 줄어들었다. 형량이 줄어든 이후에도 병역거부자의 수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병역거부자 수는 2000년 683명, 2001년 804명, 2002년 734명, 2003년 약 550명이다. 병역 거부 수감자 세계 1위를 기록한 한국의 현실은 국제 문제로 떠올랐다. 2002년과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에 병역거부권 연대회의 등을 통해 한국 병역거부자의 실상이 자세히 보고됐다. 국제인권위원회(엠네스티)는 2002년 11월 당시 대통령 후보들에게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위헌법률심판 제청에 이어 무죄 선고도 나왔다. 2004년 5월 서울남부지법 이정렬 판사가 여호와의 증인 이아무개(23)씨 등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가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하급심에서 병역거부자에 대한 유·무죄 판결이 엇갈리자 대법원은 병역 거부 재판에 대한 대법원 선고를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7월15일 대법원의 선고가 나왔다.

이에 앞서 입법이 추진되기도 했다. 2001년 초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이던 장영달 의원 등 몇몇 국회의원들이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입법을 추진했으나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시하는 보수 기독교계와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 병역거부권 연대회의는 법학교수, 변호사, 인권활동가 등이 참여한 대체복무제 입법안을 마련하고 다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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