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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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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방울의 물!

등록 2000-07-26 00:00 수정 2020-05-02 04:21

황석영은 ‘지는 게임’에 돌입했지만, 그 한방울이 잔을 넘치게 할 것이다


황석영씨에게 뜨거운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그의 결정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작가로서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그런 용단이었다. 이거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나는 우리 시대에 황석영이라는 작가를 갖게 된 걸 큰 기쁨이자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국언론의 먹이사슬 구조

왜 살신성인인가? 그는 ‘지는 게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지는 게임’인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신화’란 결코 이성과 논리로 격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화’의 문제다. 우선 이성과 논리에 대해 말씀드린 다음 ‘신화’에 접근해보기로 하자.

그간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하는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못된’ 짓을 저질러왔다. 이건 좌파·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야비한’ 행태로 간주돼 온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들이 왜 그런 짓을 하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선 한국사회의 독특한 언로(言路)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은 모든 영역에서 중앙 집중성이 대단히 강해 엄격한 위계질서와 1등에 대한 숭배가 거의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고착된 나라다. 예컨대, 서울대를 생각해보라.

일개 가문이 겨우 한자리 수 지분을 갖고 거대한 기업군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미디어 시장에 작동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자체의 힘보다는 그것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미디어 위계질서’의 상층부에서 행사하는 힘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즉, 로 인해 작동되는 한국 미디어계 전반의 ‘자기검열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한국의 모든 진보적인 또는 진보적인 냄새를 제법 피우는 출판사들이 확보하고 있는 필진의 총합은 한국사회의 ‘극우 헤게모니’를 깨기에 충분할 만큼 엄청난 규모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하게 파편화돼 있다. 각자 생존에 허덕이고 있으며 개인적인 ‘인정 투쟁’에 함몰돼 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를 홍보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한다. 당연히 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이 ‘미디어 위계질서’ 또는 ‘먹이사슬 구조’가 무서운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의 정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이다. 유신과 5공 체제를 가장 열렬히 찬양했던 신문이 여전히 그 정신을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으로 역설하면서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게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라는 걸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있을까?

신문이 어디 전화와 같은가?

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하는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는 이론은 일종의 ‘전송체 이론’이다. 신문이 전화와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거다. 어떤 신문이건 내가 그 신문을 이용해 좌파·진보적 메시지를 전파하면 되는 것이지 그 신문 자체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과연 신문을 전화로 볼 수 있나? 오히려 반드시 가치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정당에 가까운 게 아닐까? 만약 가 장사에 도움이 되는 한 극우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념과 정치적 입장을 공정하게 파는 신문이라면, 즉 오직 그런 상업적 가치에 따라서만 편견을 드러내는 신문이라면, 를 전화로 보는 게 타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 과연 그런 신문인가?

만약 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하는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우리가 굳이 진보 매체를 키워야 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하는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이 좀더 정직해지기를 바란다. 그들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바로 ‘힘의 논리’, 즉 의 영향력이다. 에 글을 기고했던 어느 좌파 지식인은 독자의 일부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책무’라는 주장을 하셨다. 그 선의를 100% 믿는다 해도 그건 지나친 패배주의다.

의 ‘유능’도 인정해줘야 한다. 는 매우 영악한 신문이다. 춥고 배고픈, 또는 ‘인정에 대한 욕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문인들을 따뜻하게 끌어안아 콧등이 시큰할 정도로 감동시킨다. ‘강한 영향력’과 ‘높은 원고료’만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또 하나의 미끼를 던진다. 이 신문은 문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훤히 꿰뚫어보고 그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그 어떤 신문보다 먼저 더 잘 긁어줌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정치경제적 극우성을 위장하는 데에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지식인은 좀 달라야 한다

여기까지가 이성적·논리적 대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대단히 무력하다. 한국사회는 ‘봉건’과 ‘포스트모던’이 공존하는 희한한 사회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주장은 현실적인 실천 방안으로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 몇 가지 ‘신화’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신화’는 이른바 ‘구조 개혁론’이다. 황석영씨가 “이른바 ‘안티조선’쪽은 소극적 진영주의로 ‘충실한 반대당’식의 내부적 권력이 되어버릴 위험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 개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의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나는 황석영씨의 말씀에 동의한다. 내 답은 를 키우자는 것이다. 꼭 가 아니라도 좋다. ‘다양성’을 위해 이른바 ‘빅3’를 제외한 신문들을 키우자.

그러나 황석영씨가 원하는 답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는 모든 언론사에 통용되는 언론사 내부의 구조 개혁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다. 그게 바로 ‘정기간행물 등록에 관한 법률 개정 운동’이다.

물론 나와 ‘안티조선’은 이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 그러나 이건 ‘안티조선’의 운동과 상호 보완적인 것이지 ‘안티조선’의 운동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간법이 어떻게 개정되건 는 달라지지 않으며 달라진다 해도 한 세대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안티조선’은 한 세대의 기간은 너무 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신화’는 ‘소비자 주권론’이다.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터인데 왜 주제넘게 개입하느냐는 것이다. 독자들을 바보로 아는 ‘엘리트주의’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해선 비교적 이런 비판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 공산품을 대상으로 한 ‘소비자운동’에 대해서도 이런 비판은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유독 신문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기분 나빠 하는 걸까?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선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드릴 수 있지만, 그건 무력하다(‘주류에 속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그 답이다). 당장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조차 허용되질 않는다. 그래서 ‘안티조선’은 를 껴안는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좀 달라야 하지 않나?

세 번째 신화는 ‘음모론’이다. 어느 분은 공개적으로 일간지에 ‘안티조선’의 활동 이면엔 ‘정치이념적·지역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니냐는 주장까지 하셨다. 내심 그리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겠다. 왜? 이 나라는 ‘음모 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답을 드리자면 이렇다. ‘정치이념적 배경’은 분명히 있다. 나를 놓고 말하자면, 나는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자다. 나는 를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신문을 말살하거나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제몫’만 누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이유로 인해 ‘제몫’ 이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가능케 하는 일부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분은 김대중 정권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리 말씀하시는 것 같아 이에 대해서도 답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과 가 상호 적대적인 관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DJ는 ‘정권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와 그 새끼 매체들에 잘 보이려고 안달을 하고 있다. DJ정권의 이른바 ‘실세’들도 ‘개인 플레이’에만 미쳐 있다.

나는 DJ정권은 YS정권짝 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DJ정권이 아니다. 앞으로 그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그 정권도 YS정권, DJ정권식으로 를 대할 거라는 게 진짜 문제다. 정치인들이 나부터 크고 보자며 저지르는 ‘개인 플레이’의 총합은 앞으로 계속 이 나라의 진로가 한줌도 안 되는 극우 매체 집단에 휘둘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에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포지티브 전략'만 써야 한다고?

‘지역적 배경’의 음모가 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이는 가 ‘영남 패권주의’를 상술(商術)로 이용하는 신문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인가? 그걸 비판하는 것도 ‘지역적 배경’을 가진 ‘음모’인가? 그러니까 ‘지역주의 극복’을 부르짖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네 번째 ‘신화’는 ‘포지티브 전략’에 대한 막연한 숭배다. 더 좋은 신문을 키우면 되지 왜 특정 신문을 비판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사실 이게 바로 서기 2000년의 한국사회가 당면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투쟁이라는 건 ‘네거티브 전략’이었지만 그걸 두고 흠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군사독재정권은 사라졌으니 ‘포지티브 전략’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신문을 포함한 문화 영역은 아직 그대로인데 말이다.

물론 나는 를 키우자는 ‘포지티브 전략’을 주장했다. 그러한 ‘포지티브 전략’을 위해서도 좌파·진보적 지식인들이 를 상종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야비한’ 놈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나는 내가 ‘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내 능력으론 도저히 ‘신화’의 벽을 깰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잔을 넘치게 하는 법이다. 나는 황석영씨가 그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나는 그의 고귀한 뜻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이 나올 것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personak@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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