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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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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엔 아무것도 없었다

등록 2004-04-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수많은 외신 몰려들지만 후송 부상자 안 실려와… 북한 비꼬는 온갖 소문 속에 동포들만 가슴앓이

단둥=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압록강에서 바라본 신의주는 평온했다.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가 일어난 북한 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불과 16km 떨어진 곳에서 전 세계의 눈과 귀를 집중시킨 대참사가 일어났지만, 신의주는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듯 묵묵히 압록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자입원 소문? 뻥이야!

취재팀은 용천에서 열차 폭발사고가 발생한 다음날인 지난 4월23일 중국 단둥을 찾았다. 단둥은 중국과 북한을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경도시다. 단둥 시내의 고층빌딩에서 압록강 너머를 바라보면 신의주 시내가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단둥은 열차 사고가 발생한 용천과는 불과 20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 한 차례씩 평양과 베이징을 오가는 화물열차와 일주일에 4회 운행하는 ‘국제 열차’의 중국 땅 첫 기착지다. 따라서 이번 참사와 관련된 소식을 비교적 정확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을 포함한 수많은 외신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단둥은 이런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중국 당국의 엄격한 보안 조치로 공식적이고 정확한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대신 북한의 열악한 환경을 은근히 비꼬는 온갖 소문과 억측이 북한에 살고 있는 중국인(화교)의 친지들에 의해 떠돌고 있었다.

실제로 열차 사고가 발생한 뒤 단둥에서는 북한의 의료 환경이 열악해 부상자 중 상당수가 단둥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를 몇몇 외신이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한 지 나흘이 지난 4월26일까지 신의주에서 건너온 부상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때 군부대 병원에 환자가 입원해 있다는 소문이 돌아 취재진들이 대거 몰려갔지만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다. 중국 당국이 사고 직후 북한의 요청으로 단둥시 제1, 제2, 제3 병원과 군부대 병원 등에 병실을 비워놓고 의료진을 대기시키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단둥시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이 지역 조선족 신문인 의 윤선일 기자는 “사고가 일어난 22일 저녁에 화교의 친척들이 단둥에서 의약품을 사서 북한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와전돼 헛소문이 돌았다. 외신들이 크게 부풀려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사건 초기에는 사망자가 3천명에 이를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며 “북쪽에서 치료할 수 없는 부상자라면 응급환자일 텐데, 사고가 발생한 지 3~4일 지나도록 단둥으로 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부상자가 이송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단둥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은 이번 사고에 대한 ‘외지인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이들은 중국과 ‘변경(邊境)무역’을 하러 온 ‘기관원’들이거나 단둥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온 시민들인데, 이들 중 일부는 외신들의 보도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4월25일 저녁 한 북한 음식점에서 만난 40대 남자는 “작은 열차 사고인데 외신들이 지나치게 확대(보도)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심지어 사고 소식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 4월24일 압록강변의 북한 음식점 송도원에서 만난 한 여성 접대원은 열차 사고 관련 소식을 묻자 “그런 일이 있었습네까?”라며 깜짝 놀랐다. 기자가 “이미 TV 뉴스를 통해 다 알려지지 않았느냐”고 다시 묻자, “일이 바빠서 TV를 잘 보지 못한다”고 답하고는 동료들에게 돌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얘기를 나눴다.

북한의 국경마을에 접근하다

단둥의 부산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압록강 너머의 북한 땅은 차분했다. 취재진이 단둥에 머문 4일 동안 신의주는 평온한 일상이 반복됐다. 압록강변의 작은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4월24일 밤에는 신의주 지역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압록강단교(6·25 당시 미군 폭격으로 끊어진 철교)에서 사진 취재 중이던 영국 의 카타리나 헤스 기자는 취재진에게 다가와 “북한에 무슨 축제가 예정돼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단둥에서의 취재는 오히려 서울보다 효과적이지 못했다. 단둥에 사는 1천여명의 한인들과 조선족들은 물론 중국인들조차 서울에서 전해오는 TV 뉴스를 듣고 북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재진은 북한의 국경 마을에 접근해보기로 했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에서 이번 열차 사고에 대한 작은 ‘단초’를 찾아보겠다는 의도였다. 단둥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국경 마을에서 북한 경비병들과 대화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내심 기대를 걸었다. 취재진은 4월25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외곽 압록강 국경지대에 있는 호산장성을 찾았다. 이 산성은 중국의 세계적 문화재인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성으로 중국인들에게 유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하지만 단둥의 한인들과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다른 이유로 이곳을 많이 찾는다. 이곳이 압록강변의 국경 마을 중 북한 땅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어른 허리 깊이에 폭이 3m 남짓한 개천을 사이에 두고 의주의 작은 농촌마을과 접해 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밀무역이 성행하고, 때때로 탈북자들의 탈북 코스로 애용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탈북자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중국 공안(경찰)에서 인민해방군 산하 특수부대로 교체했다.

취재진의 통역을 맡은 현지 안내인은 “절대 함부로 사진을 찍지 말고 한국말도 사용하지 말라”고 연신 당부했다. 열차 사고 이후 이곳에 대한 중국 국경수비대의 감시가 삼엄해진 탓이다. 안내인을 따라 호산장성 입구를 지나 500여m 남쪽으로 내려가니 북-중 국경인 작은 개천이 나왔다. 몇몇 중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고 개천 너머에는 한 70대 노인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현지 안내인은 그 노인을 가리키며 “북조선 사람”이라고 말했다.

개천에는 작은 철제 배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타면 북한 국경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안내인의 말에 따라 배를 타기로 했다. 배가 개천을 따라 움직인 뒤 5분쯤 지나자 뱃사공이 갑자기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빨리 나와, 빨리!” 사공은 떠듬떠듬 우리말로 소리쳤다. 그러자 저쪽 풀숲에서 작은 체구의 북한 병사가 나왔다. 그는 취재진을 가리키며 사공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네. 그 사람들 어디 사람이야?” “중국 살람(사람)이지….” “거짓말 마라. 조선말 할 줄 알던데?” “아냐 아냐, 이거 중국 살람이야.”

중국정부 지원발표에 시큰둥

취재진은 안내인의 눈짓에 따라 미리 준비한 중국산 담배 2갑을 던져줬다. 북한 병사의 의심을 풀기 위한 ‘뇌물’이었다. “다른 건 없네?” “과자는 없어, 없어.” 사공과 대화를 마친 북한 초병은 수풀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취재진은 그를 향해 “열차 폭발사고 소식을 들었는가”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내인을 통해 사공에게 대신 질문을 해보라고 요청했으나, “저쪽을 자극하는 민감한 질문이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배에서 내린 곳에 북한 마을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었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삼엄한 감시를 뚫고 연신 셔터를 누르는 동안 망원경으로 북녘 땅을 바라봤다. 허름하지만 비교적 잘 정비된 집들이 평화롭게 모여 있었다. 들에는 어린아이들을 동행한 마을 주민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공공기관인 듯한 건물 옥상의 인공기는 조기가 아닌 정상적인 형태로 나부끼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열차 사고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단둥은 한반도를 굽어보는 지리적 여건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단둥을 대한반도 전진기지로 삼았다. 단둥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중화제국에 편입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동쪽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의 안동(安東)은 당나라 왕조의 이런 의도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중국은 한반도를 중화권 안에 두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쪽을 붉게 물들인다’(丹東)는 이름에서 한반도에 중국식 사회주의를 전파하겠다는 중국 공산당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탓일까. 한반도 북녘 땅의 참사를 대하는 단둥의 태도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지만 단둥시 정부의 도움을 얻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4월25일 북한에 의료장비 등을 지원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조선족들은 크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4월26일 만난 한 조선족 기업 관계자는 “중국 정부는 충분한 지원을 할 여력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다”며 “결국 우리 민족끼리 돕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여느 서구의 도시 못지않게 화려하게 변한 단둥은 압록강 너머의 옛 ‘사회주의 형제 국가’의 참사를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

뭘 그리 캐묻고 다니시나?

취재팀이 중국 공안에 감금당한 사연
지난 4월25일 오후 취재팀은 단둥의 한 파출소에 3시간 동안 감금당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이것저것 캐묻고 다닌다’는 신고를 접수한 중국 공안(경찰)이 취재진을 체포한 뒤 파출소까지 무단 연행한 것이다. 사건 당일 취재진은 단둥 군부대 병원에 신의주에서 건너온 환자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관련 사실을 취재 중이었다. 그런데 군부대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급히 올라탄 택시가 문제였다.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를 소지한 채 군부대 병원 위치를 묻는 취재진을 수상하게 본 택시 운전사가 보안당국에 “간첩으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신고한 것이다.
군부대 병원에서 취재를 마치고 인근의 한 교회를 찾아가 제보자를 만나고 있던 취재진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중국 공안은 교회 주변의 빈민촌을 사진 취재하던 류우종 기자를 먼저 체포한 뒤 류 기자를 앞세워 나머지 일행이 있던 교회까지 쫓아왔다. 그 와중에 류 기자는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중국 공안관 2명에게 저항하다 팔과 손목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카메라에는 삼엄한 감시를 뚫고 어렵게 촬영한 북한 국경마을 사진이 들어 있었다.
취재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 공안들과 3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여행하는 동안 중국 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중국 공안은 구체적으로 무슨 법을 어겼고 어떤 법을 어기지 말라는 것인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단둥 취재 기간 동안 줄곧 몸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현지 안내인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개방되긴 했지만 아직도 인권은 저급한 수준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듯이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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