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당 내분 과정에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조순형 대표, 다음엔 또 어떤 ‘장관’을 보여줄까 </font>
임석규 기자/ 한겨레 정치부 sky@hani.co.kr
“‘미스터 쓴소리’가 ‘정통모임의 오야붕’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일 없는 내분 끝에 만신창이가 돼버린 민주당 홈페이지엔 조순형 대표를 비아냥대는 이런 종류의 글이 끝없이 올랐다. 당직자들도 “지도자를 잘못 만난 조직이 어떻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혀를 찼다. 민주당 당직자 118명 가운데 108명이 조 대표 퇴진 요구에 서명했다.
조 대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분당으로 반파된 민주당을 재건할 ‘구원투수’로 기대를 모았다. 조 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한때 잘나가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어쩌다가 민주당을 침몰시킨 주역으로 조롱받는 처지가 됐을까.
웬만해선 그를 만날 수 없다
지난해 대표 경선을 앞두고 열린 한 토론회에서 자신의 단점을 한 가지씩 꼽아달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조 대표는 머뭇거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사귀지 못하는 점”이라고 답했다. 이후 이 대답이 매우 솔직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조 대표는 당의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렸다. 각종 단체 대표들의 면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절했다. 외부에 나갔다가 대표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지 않았다고 그를 보좌해온 당료들은 전했다.
당내 의원들도 조 대표를 여간해선 만나기 어려웠다. “소장파 의원 16명이 서명한 의견서를 조 대표에게 전달했는데, 전화 한 통화 주지 않고 묵살했다. 간신히 박인상 의원과 함께 만나기는 했는데,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 대표가 퇴진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불출마 선언과 함께 탈당한 설훈 의원의 얘기다.
조 대표는 외부 일정도 싫어했다. 특히 방송과 사진촬영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는 극도로 꺼렸다. ‘쑈’로 비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지난 3월3일 민주당은 ‘삼겹살데이’라는 행사를 기획해 축산인들과 지도부의 점심자리를 마련했다. 조 대표는 참석하기는 했지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손사래를 치며 “고기 먹는 데 무슨 사진이냐”며 짜증을 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에도 사무총장이던 강운태 의원은 조 대표에게 사회 각계 원로인사 방문 등 빽빽한 외부 일정표를 내놓았지만 조 대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외부 일정도 참석하지 않았다면 조 대표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도서관이었다. 국회도서관 5층 의원 열람실. 조 대표는 틈만 나면 이곳을 찾아 홀로 머물렀다. 점심도 이곳에서 도시락을 시켜 먹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가 되기 이전부터 이곳은 조 대표의 전용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의원들이 거의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당직자들이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며 당사 로비에서 농성을 벌이는 그 순간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였다.
저녁엔 일찍 퇴근해 가족과 함께 보냈다. 한화갑 전 대표는 “총선을 앞둔 정당의 대표가 저녁 6시에 퇴근하면 어떻게 당을 똑바로 이끌 수 있겠느냐”고 당 중앙위원회에서 공개적으로 조 대표를 면박하기도 했다.
정치란 흔히 ‘대화와 타협의 예술’로 일컬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람 만나기를 싫어한 조 대표는 애초부터 정당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는지도 모른다. 조 대표의 독특한 성격은 민주당 내분 국면에서 파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추미애 의원과 소장파 의원들이 쇄신을 요구했을 때도 조 대표는 대화를 거절한 채 두 차례나 ‘재신임’이라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차라리 국회의장을 했더라면…”
조 대표는 대화 대신에 법과 당헌·당규와 절차를 내세웠다. 조 대표가 끝까지 퇴진을 거부한 명분도 “당 중앙위원회가 이미 나를 재신임했는데 특별한 절차도 밟지 않고 그냥 물러나라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는 논리였다. 조 대표의 이런 성격을 두고 당내에선 ‘기계적 원칙론자’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한때 그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한 측근은 “그분은 매사에 융통성이 없었고, 고집이 매우 셌다”며 “대표가 아니라 국회의장을 했더라면 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당에서 대표의 일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당의 얼굴인 대표가 어떤 일정에 참석해 누구와 만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당의 이미지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대표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선거철을 맞아 지하철도 타고 재래시장도 방문하며 택시기사들과 부지런히 만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벤트이고 일회성 행사다. 그러나 국민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선 이런 ‘쑈’라도 마다하지 않는 게 정치권의 생리다. 이런 행위를 극도로 싫어한 조 대표는 태생부터 정당의 대표 체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름대로 개혁적 색채를 유지하던 조 대표는 어느 순간 정책 노선에서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국회정치개혁특위가 선관위의 단속권한 약화를 시도해 여론이 들끓었으나 조 대표는 이를 외면하고 침묵했다. 선거법 협상 과정에서 이른바 ‘박상천 게리맨더링’ 논란이 불거지면서 민주당이 구석에 몰렸는데도 조 대표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조 대표는 박상천 전 대표 등이 ‘분권형 개헌론’을 강하게 주장하자 평소 주장해온 ‘권력구조 개헌 불가’라는 소신도 꺾었다. 이라크 파병안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권고적 반대당론’과 달리 찬성표를 던졌다.
당 관계자들은 “조 대표가 박상천 전 대표 등 후단협과 정통모임쪽 인사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조 대표는 전당대회 이전까지는 한화갑 전 대표와 추미애·김상현·강운태 의원 등과 ‘중도파 5인방’을 이뤘으나 박 전 대표쪽의 지원을 받아 1위를 차지한 이후엔 정통모임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조 대표가 탄핵안 가결의 선두에 선 배경에 대해 일각에서는 조 대표의 개인적인 욕심이 작용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조 대표가 ‘탄핵안 가결 이후의 대안’으로 자신을 염두에 두고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조갑제씨 등 보수 논객들은 공공연히 ‘조순형 대통령론’을 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 대표는 “‘대권바이러스’에 한번 감염되면 잘 낫지 않는데, 나는 걸려본 적이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노 대통령 사퇴에 기대를 거는 걸까
조 대표는 자신의 말대로 정말 다른 ‘욕심’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의원과 출마자 대다수가 공천까지 반납하겠다며 퇴진을 요구하고, 대부분의 당료들이 가세했는데도 왜 대표직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대구 지역구 선거를 위해서?’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조 대표를 가까이서 보좌했던 강운태 사무총장은 최근 지인들에게 “추미애 의원과 조 대표쪽을 오가며 중재를 하다보니 조 대표가 정치적 야심이 대단한 것 같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끝까지 대표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데는 개인적인 야심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조 대표는 총선 이후에도 국회의원 당선 여부와 무관하게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절차가 끝날 때까지는 대표직을 유지할 계획인 것 같더라”고 전했다. 헌재의 탄핵심판이 인용돼 노 대통령이 사퇴할 가능성에 조 대표가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얘기다.
당 내분 과정에서 불요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조 대표가 총선 이후의 국면에서 또 어떤 ‘장관’을 연출할지 기대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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