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한강의 중류와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백제는 한반도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한강 유역의 대부분은 물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확보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의 서·남해안 지역에서 해양을 통한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북방의 대륙문화도 대거 들여왔다.
강과 평야 따라 선진문화 전파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호남벌은 강이 많고 평야로 이뤄졌다. 이 점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으로 둘러싸인 신라 지역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강을 따라 평야 지대로 이동하는 백제 지역에서는 문화의 전파와 교류가 빨랐다. 반면 신라 지역은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혀, 대륙의 선진 기술문화가 늦게 도입됐다.
백제 지역으로 내려오는 이주민들은 큰 세력 집단을 형성했고, 우수한 기술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토착사회를 선도하고 그 문화를 개발시켰다. 반대로 산맥을 넘어 신라 지역으로 이주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거의가 토착 세력에 흡수됐다. 지방에 웅거한 토착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신라 사회에는 보수 성향의 의식이 성립됐다.
주류를 형성한 이주민 세력은 백제 사회에 정착하는 한편, 다른 곳을 찾아 떠나가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문화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이 추세였지만, 특히 백제는 유학이나 불교를 일본에 능동적으로 전해주었다. 대륙에서 선진문화를 빨리 받아들여서 자기 문화를 수립하고, 그것을 또 다른 곳으로 전해주는 과정에서 백제인들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의식을 성립했다.
교류가 빈번한 백제 사회에는 이미 중국의 남북조는 물론 변방민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풍부한 문물이 들어와 있었다. 신라에 비하면 조그만 가족묘에 불과한 무령왕릉에서 무려 88종 2561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이렇듯 알찬 문물을 바탕으로 이뤄진 체제 정비는 귀족문화를 세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없이 다양한 문화를 종합하거나 방대한 영역을 통할하기 위해, 백제인들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규율 속의 절제 의식을 성립시켰다.
일찍이 주위를 정복해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 또는 선진의 개방된 문화가 한강 유역에서 호남벌을 타고 뻗어 내려올 때의 진취적 기상 속에, 백제인의 도도한 맥박과 패기가 숨어 있었다. 그 속에 노출된 백제 문화의 웅혼한 모습은 세련된 귀족문화의 발달로 조밀하게 정비되면서 우아하거나 아담하게 갖춰져갔다.
개혁이 추구하는 이상웅진 시대의 백제 불교에서 미륵신앙과 함께 계율이 강조되는 분위기는 시사점을 준다. 미륵신앙은 백제의 공인 불교에서도 수용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웅진 시대에 오히려 크게 유행했다. 본래 미륵정토 신앙은 현실 사회를 개혁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실 사회의 혼란을 부각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엄격한 계율을 강조한다. 그러나 백제 미륵신앙은 혼란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이에 따른 현실 사회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다. 피난 수도에서의 혼란을 지적하면, 이로 말미암아 백제 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냥도구를 불사르고 가축을 방생하는 등 형식에 흐를 정도로 엄격한 계율을 강조한 것은 사회의 혼란을 지적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개혁 의지를 보이고는 이상사회의 도래를 꿈꾸게 했다. 이렇듯 강조하지는 않지만 물밑에서 점차 부상하는 개혁 의지는 백제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은 전륜성왕(인도 신화 속의 임금. 정법(正法)으로 온 세계를 통솔한다고 한다)의 치세를 강조하면서 정복국가 체제를 갖추려 한 신라의 경우와 비교된다. 성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하면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백제의 절제 정신은 도가사상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오직 스스로 절제하는 것만이 바로 도를 좇는 일이요, 덕을 두텁게 쌓는 방도가 된다. 도가사상의 유행은 신선사상을 가져오게 해, 신선이 거주한다는 동래·방장·영주의 삼산을 백제 사회에 구축했다. 곧 사비도성의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에 선인이 거주하면서 조석으로 서로 왕래한다고 했다. 이는 이상사회의 건설과 바로 연결이 가능한 것이다.
무왕은 634년 신선사상에 의거해 연못과 방장산을 조성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망해루나 망해정을 세우고 거기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에는 선인이 옥천(玉泉)을 마시고 대추를 먹음으로써 늙지 않고 영구히 산다고 했다. 산경문전이나 금동용봉봉래산향로 등의 유물에는 중첩된 산 사이사이에 수목은 물론 용과 봉황이나 기린 등이 신선과 함께 노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향로나 벽돌, 거울을 제작하면서 백제인들은 가슴속 이상향을 은근히 드러냈다.
통합 속에 심은 충절백제 불교에서 신라의 화엄사상 같은 융합적인 사상을 쉽게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제의 사상에서도 통합적인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법화사상은 이런 면을 알려준다. 웅진 시대 이후 중앙집권 체제를 성공적으로 정비하면서, 백제 왕실이 귀족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하려는 사회 분위기와 연관해 법화신앙이 유행했다. 백제 왕실이 의 보문품을 강조했다면, 귀족인 사택지적(砂宅智積) 등은 법화의 대통불사상을 수용했다. 또한 관음 영험신앙은 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백제의 법화신앙은 사회계층 통합에 어울렸다.
백제의 법화신앙은 삼관법을 하나로 파악하려는 강력한 융합사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에서 표방된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의 전통을 지녔다. 그리하여 관음의 영험신앙과 법화삼매를 함께 추구했다. 이는 관음 영험신앙의 전통을 더 강조하면서, 통합적인 사상 경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백제의 통합 사상은 유교를 통해서도 진작돼 국가에 대한 충절 정신을 낳게 했다. 백제는 중국을 통해 오경이나 등의 경전을 받아들였으며, 주로 남조의 예학을 수용했다. 이미 4세기경에 사용된 목간에는 의 일부가 기록됐다. 유학의 예학은 백제인의 윤리 의식을 갖추게 하면서 실천적 성향을 드러냈다.
민족문화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백제 문화는 민족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삼국 문화를 합쳐 통일신라 시대에 민족문화를 형성했다. 비교적 온전하게 전하는 신라 문화와 비교해, 많이 훼손돼 원형을 잃은 백제 문화의 완전한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일그러진 백제 문화로 민족문화를 바르게 제시할 수는 없다. 아울러 거대하게 의미를 붙이기보다는, 백제 문화를 민족문화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백제인들의 사상적 특성으로 개방과 진취적 정신, 이상을 추구하는 개혁 성향 등을 들었지만, 이 또한 민족문화 속에 융화돼 우리 민족의 정서로 이어져 내려왔다. 후대에 편찬되면서 백제사에는 윤색되고 공백으로 남은 부분이 많다. 한성 시대에 정복국가 체제를 갖추면서, 호남벌을 따라 뻗어나갈 때의 패기라든가 사회 결집을 위한 통합 의식 등은 애써 다뤄야 할 문제다.
김두진 국민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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