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에서 기계가 패배한 미래에서 온 킬러 로봇이 나중에 인류의 리더가 될 남자의 어머니를 암살하려 하고, 그 로봇을 따라 미래에서 온 전사가 그 어머니를 보호한다는 것. 나중에 그 전사는 어머니와 동침해 리더의 아버지가 되니 결국 과거를 바꾸려는 노력은 오히려 과거를 고정하는 결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는 영화 한 편만으로 머물 작품이 아니었다. 일단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속편 전문 감독인 제임스 캐머런이었다. 감독 데뷔작은 의 속편이었고 각본가로서는 의 속편을 써서 히트시켰으며 의 속편을 만들어 블록버스터 감독의 위치에 오른 남자가 자신의 히트작을 그대로 두는 건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미래와 과거를 연결하는 완벽한 서클이 그려진 전편에서 어떻게 속편을 끌어낼 것인가?
캐머런은 전편의 세계관과 고정관념을 뒤집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았다. 여전히 기계는 존 코너를 막기 위해 킬러 로봇을 보내고 존 코너 역시 과거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자를 보내는데, 하필이면 그 보호자가 1편에서 자신을 암살하려고 기계들이 보냈던 킬러 로봇 T-800과 같은 기종이었다는 것이다. 1편에서 악당 역을 맡은 배우가 2편에서는 착한 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니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는 심지어 ‘미래는 바꿀 수 있다’라는 새로운 테마까지 설정한다. 이 영화에서 코너 모자와 터미네이터는 단순히 미래를 보존하는 대신 기계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미래 자체를 바꾸려 한다. 이는 1편에서 기계들이 한 전략을 그대로 본받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관도 바뀐다. 1편에서 역사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2편에서 역사는 평행 우주를 따라 자유롭게 변화한다. 캐머런이 나중에 LD로 낸 확장판을 보면 기계와의 전쟁은 결국 일어나지 않으며 사라 코너는 평화롭게 노년을 맞아 죽고 존 코너는 성공한 정치가가 된다.
이 정도로 끝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은 계속 나오게 된다. 3편에서 2편의 확장판이 그렸던 역사는 다시 사라진다. 사라 코너는 요절했고 리더로서의 미래를 잃은 아들 존 코너는 다소 허접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런데 또 미래에서 암살자와 보호자가 오고…. 여기서 결말만 이야기한다면, 결국 기계와의 전쟁은 일어나고 터미네이터의 계획도 역사 개변이 아닌 역사 보존으로 바뀌게 된다. 5월21일 개봉을 앞둔 4편 은 어떠냐고? 역시 3편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역사는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의 유지 또한 피투성이 노력을 통해 얻어내야 한다. 그럼 2편에서 사라 코너가 겪었던 미래는 일어나지 않은 걸까? 3·4편의 각본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2편 확장판의 결말은 정말로 일어났고, 3편과 4편은 2편의 연장이 아니라 1편 이전의 역사라고 말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스프링처럼 같은 중심을 따라 엇갈리게 회전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의 배배 꼬인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매 편 존 코너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바뀌는 것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3편과 4편도 제대로 이어지는 게 아니고 이들 역시 각자의 시간선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사상 가장 괴상한 부자 상봉 장면어느 쪽이건 암담한 이야기다. 평행우주설을 따른다면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하고 순환우주설을 따른다면 세계는 탈출할 수 없는 지옥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할리우드 영화작가들에겐 나쁜 소식이 아니다. 평행우주설을 받아들이면 과거에 엄격하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생산해낼 수 있다. 미래가 탈출할 수 없는 지옥이라면 살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끔찍하겠지만 온갖 종류의 로봇들이 폐허가 된 지구 위를 질주하며 인간들을 학살하는 스펙터클과 그들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액션물을 만들 수 있다.
4편에서 여러분이 기대할 수 있는 것도 딱 그 수준이다. 타임 패러독스와 운명, 자유의지를 탐색하던 과거의 여정은 3편에서 끝났다. 이제 그들은 폭력과 전쟁 자체를 다루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도 존 코너와 카일 리스가 나오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점은 시리즈의 팬들에겐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존 코너와 카일 리스가 만나는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괴상한 부자 상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영화는 이 장면을 그냥 밋밋하고 싱겁게 그려버린다. 영화는 인간에겐 관심이 없다. 파괴하고 파괴되는 다양한 기계들이 훨씬 근사하고 매력적이다. 4편이 전편의 미학을 물려받아 발전시키는 부분들도 이 영역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인물이 나중에 카일 리스의 친구가 되고 그와 존 코너를 만나게 돕는 인물 마커스 라이트라는 점이다. 적어도 그는 이 영화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속죄의 길을 찾는 유일한 인물인데, 놀랍게도 기계인간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 정체성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싶은 모양인데,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의도와는 다르게 읽힌다. 지금 를 만드는 사람들은 인간보다 기계를 훨씬 능숙하게 다루며, 아마도 5편에 본격화될 인간의 드라마에 접근하기 위해 둘 사이의 중간자인 기계인간이 필요했다고 말이다.
듀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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