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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그의 마지막은 쓸쓸했네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억지춘향’ 은퇴 기자회견에 상처받은 농구천재, 아쉬운 경기로 30년 선수생활 마감

박상혁/ 편집장 ymulty@naver.com

‘겨울 스포츠의 꽃’이라 불리는 2003-2004 시즌 애니콜 프로농구가 지난 4월10일, 전주 KCC 이지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언론들의 초점은 당연히 KCC의 우승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빠지지 않은 기사가 있었다. 바로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농구천재’ 허재(39)에 관한 기사들이다. 왜냐면 이번 챔피언 결정 7차전은 그가 농구선수로서 마지막으로 뛴 공식 경기였고,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는 그의 유니폼 입은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지의 추측성 기사가 만든 해프닝

그러나 화려해야 할 ‘천재’의 퇴장은 막 정리가 끝난 농구 코트처럼 쓸쓸했다. 그것은 허재의 소속팀인 원주 TG 엑서스가 챔피언 등극에 실패한 탓만은 아니었다. 스포츠 스타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국내 프로 스포츠계의 비뚤어진 행태가 ‘천재’의 마지막 무대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지난 3월9일 는 1면 머리기사로 허재의 은퇴와 관련된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사실 허재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는 것은 농구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허재가 구체적으로 언제 은퇴를 하고, 은퇴 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진 게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기사는 이른바 ‘특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특종이 생산된 과정은 한편의 코미디를 방불케 했다. 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TG구단은 다른 신문들의 ‘낙종’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허재의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허재는 자신의 은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TG는 3월8일 오후 3시 신사동에 위치한 한국농구연맹(KBL)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은 정규리그가 끝나고 모든 팀들이 3∼4일에서 길게는 1주일 정도의 휴식기에 돌입하는 시점이었다. 모든 선수들이 집으로 돌아가 짧게나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팀에 합류해 시즌 마무리 훈련이나 플레이오프에 대비한 훈련을 하는 게 보통이다. 허재 역시 3월7일 전자랜드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를 끝내고 모처럼 휴가를 받아 취미로 즐기는 골프를 치러 가기 위해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 갑작스러운 구단의 연락을 받았고, 황급히 예약을 취소한 뒤 양복을 입고 KBL회관으로 나왔다.

허재는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기자회견장에서 은퇴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는데…. 뭔 일 있어요?”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는 기자회견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공식 소감’을 발표하면서는 “이렇게 갑작스레 은퇴 발표를 하게 돼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평소에 자신만만하고 여유 넘치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를 지켜보는 농구팬들은 안타까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같은 팀원이자 허재가 많이 아끼는 후배 김주성을 비롯한 선수들 역시 그의 기자회견 소식을 몰랐다. 각자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수들은 기자회견 당일 오전에 구단 매니저의 연락을 받고 황급히 모여들었다. 그날 중요한 선약이 있었던 신기성과 양경민은 회견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전에 구단이 기자회견을 계획했더라면 신기성과 양경민이,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또 자신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대선배 허재의 은퇴 기자회견장에 참석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가 애초 쓸 예정이던 허재 은퇴 기사는 ‘허재, 올 시즌만 뛰고 은퇴한다’는 누구나 다 짐작하고 있던 평범한 기사였다. 언제 은퇴를 하고 어디서 어떻게 지도자 수업을 받을 것인지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기는 했지만, 본인과 구단의 확인이 없는 추측성 기사였던 것이다. 의 기사는 허재나 구단쪽이 아닌 다른 루트를 통해 기사 소스를 얻었다고 알려졌다.

왜 구단은 ‘이상한’ 기자회견을 마련했나

그런데 의 움직임에 TG구단은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TG구단은 처음에 “챔프전을 앞두고 이런 기사가 나가면 선수들 사기가 떨어진다”면서 “절대 쓰지 말아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TG쪽은 아예 전 언론사를 상대로 ‘풀을 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독자들 중에는 “허재 은퇴 기사가 어디에 실리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언론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언론사 기자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물을 먹게’ 되면 부서장에게 혼이 날 수밖에 없고 기자로서 능력을 의심받게 마련이다. 이런 ‘문책’은 엉뚱하게 취재원(구단)에게 불똥이 튄다. 물먹은 기자들은 해당 구단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허재의 은퇴는 농구계는 물론 국내 스포츠계의 큰 뉴스다. 이를 먼저 보도하는 신문은 ‘대박’을 터뜨리는 것이고, 반대로 물먹은 신문들은 ‘쪽박’을 차는 심정이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는 TG구단은 다른 언론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부랴부랴 허재의 ‘어색한’ 기자회견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TG구단의 의도와는 반대로 허재의 은퇴 기자회견은 오히려 의 기사를 특종으로 만들어준 결과가 돼버렸다. 에 따르면 허재의 은퇴 관련 기사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기사였는데, 경기가 없는 휴식 기간에 적당한 기사거리를 찾다가 기사화된 게 제대로 ‘아다리’가 맞아버린 것이다. 차라리 TG쪽이 가만히 있었다면, 다분히 ‘추측성 기사’로 묻혀버렸을 기사가 본의 아니게 특종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해프닝을 어느 누구의 잘못으로 특정할 수는 없다. 누가 잘못한 것인지 그것을 굳이 밝힌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어떻게든 특종을 낚아야 하는 언론들이나 모기업의 홍보수단으로 언론의 노출 빈도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고 지원이 결정되는 구단의 입장에서 볼 때, 최선의 결정이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30년 동안 한국 농구를 위해 뛰어왔고,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쉬움이 많던 국제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을 대표해 많은 비난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농구천재에게 이런 어색한 은퇴 기자회견을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해프닝’이었다.

지난 4월10일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 결정 7차전에서 TG구단은 허재의 등번호인 9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는 행사를 열었다. 꽃다발을 받는 허재의 모습은 상기돼 있었다. 경기 시작 전 몸을 풀면서 그는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 담긴 영상물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담기 위해 쏟아지는 수십대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그는 대형 멀티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비디오를 보면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예전 기아 시절부터 그의 팬이었던 두명의 여성이 눈시울을 붉히며 꽃다발을 건네다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재! 허재!’를 외치며 박수를 치던 원주팬들도 하나둘씩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왜 우냐?”며 팬의 등을 토닥이던 허재 역시 눈시울을 약간 붉혔다.

그리고 시작된 그의 마지막 공식 경기. 2년 선배인 전창진 감독의 배려로 스타팅 멤버로 출전한 그는 총 11분8초를 뛰면서 4득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팀은 결국 83-71로 패하고 말았다. 스포츠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지만, 그에게는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그래서일까. 패배가 확정된 직후, 종료 벨이 울리기도 전에 라커룸을 향해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은 더없이 쓸쓸했다. 원주팬뿐만 아니라 전주 KCC의 팬들도 유니폼을 입은 그의 마지막 뒷모습을 향해 아쉬움의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허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천재여 안녕히….”

“진 팀에 왜 많이 와 있는 거야?"

[허재의 마지막 뒷풀이]


챔피언 결정 7차전이 끝난 뒤, 원주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허재를 비롯한 선수단과 구단 관계자 그리고 기자들이 참석한 회식이 열렸다. 허재는 성격상 울고불고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기자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하게 회식 장소에 나타난 허재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우승팀에 가지 않고 왜 이렇게 진 팀에 많이 와 있는 거야?”라며 기자들 옆에 앉은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과 함께 술잔을 부딪쳐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의 아버지인 허준 옹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한 기자가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라고 물었다. 허재가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넣은 뒤 입을 열었다. “먼저 서울로 올라가셨어. ‘이놈아, 이것밖에 못하니? 왜 지고 그래?’ 그러시더라구….” 은퇴한 아들을 위로해주지 못할망정 경기에 졌다고 노발대발 화를 내셨다는 얘기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 “피는 못 속이는구나.” 기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잠시 뒤 신기성과 양경민, 김주성 등이 속속 들어왔다. 신기성과 양경민은 “허재 형은 나이가 제일 많으면서도 고생을 제일 많이 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후배들의 이런 ‘칭찬’이 부담스러웠을까. “주성이는 내가 오늘 일부러 혼을 많이 냈는데…, 근데 밥은 먹었니?” 허재는 김주성의 등을 두드리며 마치 ‘친형’처럼 말했다.


[허재 프로필]

소속: 원주 TG 삼보 엑써스
생년월일: 1965년 9월28일
신장: 188cm
몸무게: 88kg
포지션: 가드, 포워드
출신팀: 상명초-용산중-용산고-중앙대-기아-삼보
주요경력:
1984년 농구대잔치 신인상, 도움주기상, 인기상
1992년 농구대잔치 우수선수상, 베스트5
1993년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득점왕, 베스트5, 수비상
1994년 농구대잔치 MVP, 베스트5, 수비상
1995년 ABC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MVP
1997~98 프로농구 챔피언전 MVP
주요기록:
프로농구 통산 8시즌 동안 4524점, 1148튄공잡기, 1572도움주기, 508가로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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