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이 신용대출 확대하고 옥석 가리지 않은 채 ‘불량자’ 낙인 찍는 금융관행들

회사원 박아무개(37)씨는 10년 이상 금융거래를 하면서 은행대출, 카드 빚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갚아온 이른바 ‘우량고객’이었다. 그러다 외환위기 뒤 일시적으로 자금흐름에 문제가 생겨 카드 빚 연체를 하게 되고 결국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후 그는 은행에 가서 신용대출을 받으려 했지만, 불량 기록 탓에 문전박대를 당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신용카드사 가계대출 폭등 “위험해!”
신용불량자이니 불이익을 받는 게 당연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전후사정을 살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상적인 금융시스템에서라면, 불량 기록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대신 오랫동안 쌓아온 우량기록에 따른 혜택도 받는 게 타당할 터이다.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자금흐름에 문제가 생긴 경우라면 숨통을 열어주어 상환능력을 높여주는 것이 결국 금융기관에도 이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국내 금융계에선 이런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국내 은행이 개인에게 신용대출을 해줄 때 따지는 평가항목은 은행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대략 20개 안팎이다. 소득, 직업, 대출 현황 등. 신용불량 기록도 이런 평가 항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국내 은행의 평가시스템에선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다른 모든 평가요소들을 압도해버린다. 신용불량자라는 점 하나만 보면 나머지 19개 항목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신용불량자가 계속 증가하고 개인 빚이 늘어나는 등 가계부실이 깊어지고 있는 배경에는 금융기관들의 이런 행태(대출 관행, 신용정보 관리 등)가 한몫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가계부문 빚은 자꾸 늘어나고 경기불황으로 상환능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돼 악순환의 궤도에 빠져들고 있다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신용불량자 등록기준은 오히려 강화돼 누구나 뜻하지 않게 블랙리스트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올해 4월 바뀐 규정(은행연합회 신용정보규약)에 따라 금액에 관계없이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을 3개월 이상 연체하면 곧바로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 원금은 물론, 이자납입을 3개월 이상 끌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신용카드 사용대금은 5만원 이상 연체한 경우 해당된다.
금융기관의 가계대출(가계일반자금+주택자금)은 외환위기 이후 일시적으로 줄었다가 지난 99년 2/4분기부터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98년중 19조1천억원 줄었던 가계대출은 99년 한해 25조1천억원, 지난해에는 47조3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이에 따라 99년 말 190조9천억원(전년동기 대비 15.1% 증가) 수준이었던 가계대출은 지난해 말 238조2천억원(24.8% 증가)으로 뛰어올랐다.
지난해 4/4분기 이후 소비는 급속히 위축되고 있음에도 가계대출 증가세는 계속되고 있다.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지난해 12월 이후 소비심리 위축을 반영하듯 증가폭이 둔해지기 시작해 올 1월에는 1467억원 줄었으나 2월 들어 은행권의 대출금리 인하 등 대출확대 경쟁으로 다시 1조5천억원 증가세로 돌아섰다.
최근 들어선 각 은행들이 신용대출을 적극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3월1일 가진 ‘국민과의 대화’와 4월23일 은행장들과 가진 오찬모임에서 신용대출 확대를 거듭 당부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 또한 가계부문의 빚이 계속 늘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신용대출을 비롯한 가계 빚이 늘어나는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상환능력만 뒷받침된다면, 신용대출은 오히려 권장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가계대출 증가세의 배경에 부실화의 싹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아직은 가계대출이 기업대출에 비해 수익성(금리)·안정성(떼이지 않을 확률) 모두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각 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가계대출쪽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시스템 전반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가계대출을 포함한 신용카드 사용액이 폭증세를 보이고 있어 이런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7개 신용카드회사(비씨카드, LG캐피탈, 삼성카드, 국민카드, 외환카드, 다이너스카드, 동양 아멕스카드)의 매출실적은 모두 214조324억원으로 사상 처음 200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99년의 91조1067억원의 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최근의 경기위축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 사용액은 급증세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용정보 공유하는 체계를

이는 가계대출 연체율 상승과 가계부실 심화를 낳고, 결국 신용불량자 양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카드관리를 잘못해 파산 직전에 처한 최아무개씨의 사례는 이런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금융기관들의 경쟁적인 판촉 활동에 따라 ㅅ카드, ㄱ은행, ㅅ은행, ㅂ카드, ㄴ은행에서 카드를 발급받은 최씨는 실직자 신세로 전락하면서 카드대출을 이리 빼고 저리 메우는 지경에 처했다. 웃기는 일은, 당시 해당 금융기관들은 최씨의 신용도는 따지지도 않고, 카드결제가 꼬박꼬박 이뤄지는 실적만으로 한도를 100만원에서 200만, 300만원으로 쉽게 늘려줬다는 점이다. 금융기관들의 행태 탓에 문제를 키운 전형적인 모습이다.
은행연합회 심재철 신용정보기획팀장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의 대출행위는 주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가계대출 또한 주식투자와 마찬가지로 과거 실적이나 현재 상황 못지않게 미래의 가치도 중요한 변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내 금융계의 실상은 이와 거리가 멀다. 앞에서 예를 든 박씨의 예처럼 불량 기록을 1번이라고 남기면, 나머지 평가요소는 깡그리 무시돼 옥과 돌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이를 금융기관들만의 잘못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옥과 돌을 구별할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개인신용정보가 축적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10년간 착실히 거래하다 한순간 실수나 불운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와 상습적으로 연체를 일삼는 이를 판별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용불량자 기록만을 보고 대출불가 판정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게 은행쪽의 설명이다. 각 은행 차원의 이런 결정은 그러나 은행권 전체, 나아가 사회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대단히 불합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신용상태(거래실적)에 따라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신용을 쌓을 인센티브(의욕)가 없어지며 이는 금융시스템의 후진성(담보대출 관행 등)으로 이어진다. 금융기관 처지에서도 속내용이 멀쩡한 고객과 거래할 길을 잃음으로써 결국은 손해를 입게 된다. 신용불량자 또한 재기할 기회를 원천봉쇄해 결국 모두가 잃는 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 것일까. 심재철 팀장은 “불량 기록뿐 아니라 우량 기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내 은행이나 카드사들은 개인고객들의 신용정보를 나름대로 쌓고 관리하고 있지만, 전체 금융권이 공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은행연합회가 관리하는 금융공동정보망에는 신용불량 기록, 대출잔액 정도만 쌓일 뿐이다. 이는 ㄱ은행과 거래를 하던 고객이 ㄴ은행에 갈 경우 ㄱ은행에서 쌓은 양호한 거래실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신용불량자들을 대하는 인식이 문제
이런 문제점은 법·제도적 정비를 통해 상당부분 개선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신용정보 보호 및 이용에 관한 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금융기관에 집중시켜야할 신용정보 대상에 과거의 거래실적도 풍부하게 담도록 하면, 옥과 돌을 구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99년 관련법규 개정 시도가 한 차례 있었고, 최근 들어서도 이런 주장이 몇 차례 제기됐음에도 좀처럼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개개인의 거래실적 중 활용가치가 가장 높은 게 다달이 결제되는 카드결제 실적인데, 이를 순순히 내놓기가 아까운 대형 카드사들이 로비를 벌여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환경의 변화로 신용거래는 계속 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신용불량자 또한 증가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많다. 신용거래 확대에 경기침체가 덧붙여지면 증가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추세에서 신용불량자 수를 원천적으로 줄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따라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소비자 개개인 차원에서 절제있는 신용거래 습관을 통해 신용불량자로 등재되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신용불량자 대열에 든 수백만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가 필요해보인다.
신용불량자는 신용도로에서 한순간 교통질서를 어긴 이들일 뿐일 수도 있다. 교통질서를 어긴 이들 중에는 상습적인 음주운전자도 있지만, 건널목에서 신호를 어긴 경범자도 섞여 있는 법이다. 심재철 팀장은 “교통질서를 어겨 딱지를 뗀 이들이 1천만명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서울 시내 교통에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며 “신용불량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옥석을 가리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신용불량자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들을 대하는 인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기업대출에 비해 안정성이 높다는 이유로 경쟁적으로 가계대출(특히 카드대출)을 늘림으로써 잠재적인 파산자를 양산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의 행태에도 적절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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