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개 나라가 찬성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반대표 던져… 힘 센 나라 ‘합의무시’가 가장 큰 걸림돌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수없는 대량학살과 인종청소 등 비인도적 만행을 목격했다. 그렇지만 그런 학살자들을 제대로 단죄한 적은 많지 않다. 국제형사재판소(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는 그런 인류의 무력함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범죄가 있는 곳에 처벌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국제사회에서도 확립함으로써, 참혹한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예방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최근 50년 사이 가장 중요한 인권기구로

과거에도 이른바 전범을 처벌하는 국제재판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수뇌부에 대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를 비롯해, 최근의 옛 유고 국제전범재판소,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재판소들은 특정 국가의 특정 행위만을 대상으로 한 재판인데다, 승전국들에 의한 일방적 단죄라는 점에서 보편적 의미의 국제재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 뜻에서 이번에 출범하는 ICC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제법상 개인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설적 제도다. 이에 따라 ICC는 최근 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인권기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1998년 로마에서 열린 유엔 외교회의에서 모두 120개 나라가 ICC 설립에 찬성했고, 반대한 나라는 7개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이스라엘·인도 등과 함께 반대쪽에 손을 들었다. 2003년 1월 말 현재 로마규정에 서명하고 의회비준을 거친 나라는 모두 88개국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1월 83번째로 비준국이 됐다.
ICC는 전심, 1심, 상소부 등 3심제로 이뤄진다. 전심이란 재판부가 특정 사안이 재판 대상이 되는지 여부를 미리 가리는 제도다. 기소 남발과 정치적 목적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다. 재판부는 모두 18명의 재판관으로 이뤄지는데, 전심과 1심은 3명, 상소부는 소장을 포함한 4명의 재판관이 맡는다. 검사(소추관)는 1명이다. 검사는 직접 수사에 착수할 수 있고, 유엔 안보리나 조약 당사국의 제소에 따라 수사를 시작할 수 있다.
ICC가 재판할 수 있는 범죄는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 크게 4가지다. 지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를 예로 들어 이들 4가지 범죄유형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집단살해죄는 가해자가 특정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와 집단구성원을 살해 또는 위해할 의도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성립하는 범죄다. 따라서 9·11 테러범들이 미국 국민의 일부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인명을 고의적으로 살해했다는 점이 입증되면 집단살해죄가 성립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세르비아의 전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인도에 반한 죄로 옛 유고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됐다가 최근 집단살해죄 혐의가 추가된 바 있다.
9·11테러는 재판에 부칠 수 없게 돼
9·11 테러는 불특정 민간인에 대한 살인행위며, 동시다발적이고 체계적으로 행해진 테러행위라는 점에서 로마규정 제7조의 인도에 반한 죄(민간인에 대한 폭넓은 또는 체계적 공격의 일부로서 행한 살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민이라는 집단을 파괴할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대량살상만을 노렸다면 집단살해죄가 아닌 인도에 반한 죄만 성립할 수 있다.
전쟁범죄는 실제 전투행위를 하며 민간인을 학살했거나 생존자나 포로를 죽였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9·11 테러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 행한 것이므로 전쟁범죄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ICC가 9·11 테러를 재판에 부칠 수 없는 결정적 조항이 있다. 로마규정 제11조에는 “재판소의 시간적 관할권으로서 이 규정이 발효된 이후 행한 범죄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가진다”고 돼 있다. 로마규정은 2002년 7월1일부터 발효됐으므로, 그 이전에 발생한 9·11 테러는 재판 대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침략범죄인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승인 없이 행하는 침략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ICC는 침략범죄의 재판관할권(비당사국의 행위가 재판 대상이 되는지 여부 등)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그러므로 만약 미국이 유엔 안보리의 승인 없이 이라크를 침공하더라도 침략범죄 조항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김영석 교수(아주대·법학)는 “침략범죄의 경우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ICC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이다. 유엔 산하기구는 아니지만, 유엔의 재정지원을 받는 ICC가 유엔 분담금의 가장 큰 몫을 담당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협력과 지원 없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은 2002년 6월30일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군의 ICC 기소면제를 요구하며 보스니아 평화유지활동 연장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이를 미끼로 국제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는 미군에 대한 ICC 기소를 1년간 면책한다는 결의안을 관철시킨 바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문명비판가인 노엄 촘스키는 국제합의를 무시하는 미국을 ‘불량국가’라고 낙인찍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이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적 합의를 이룬 ‘국제법정’호가 미국이라는 암초를 피해 순항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재성 기자 firi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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