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정쩡한 A급이 될 바엔…”

등록 2000-09-06 00:00 수정 2020-05-02 04:21

팬클럽까지 보유한 B급문화판의 스타들 “인간 본연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사진/“우리에게도 열성팬이 있다.” 에로영화계의 스타들. 왼쪽부터 이시아, 조영원, 은빛)

“스스로 벗는 걸 창피해하면 그게 싸구려죠. 쑥스러워할 거면 왜 벗어요? 저는 어쩡쩡한 A급보다 최고의 B급이 되고자 했어요.”

그는 당당하다. 에로배우 이시아(25)씨. 조막만한 얼굴처럼 자그마한 몸집이 에로배우 맞나 싶을 정도로 작아보이지만, 그는 분명히 1급 에로배우다. 여배우 수명이 1년 넘기기도 힘든 에로비디오판에서 그는 올해 6년째 활동하고 있는 극히 드문 배우다. 패러디 제목이 장안의 화제가 됐던 의 주연이 바로 그다.

룸살롱 마담의 ‘미인대회 응모’

이시아씨는 하루 평균 스무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팬클럽까지 있다. 에로비디오 스타라는 점 때문에 메일 가운데는 저열한 것들도 있다고 한다. 가령 “당신과 자고 싶다”는 식의 메일이다. 그런 메일이 그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뜨면 다른 팬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팬들이 그 메일을 보낸 이들을 공격해 물리쳐줄 정도로 열성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팬들 반응에 놀랄 때가 많아요. 저도 잘 기억 못하는 제 머리 스타일의 변화를 순서대로 기억하는 팬들도 있고, 몇년 전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메일을 보내는 분도 있어요.”

비단 이씨뿐만 아니라 요즘 에로비디오계의 스타들인 이규영, 유리, 이미소, 은빛, 조영원, 차수연씨 등의 인기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제는 영화를 그만둔 이규영씨의 경우 한때 열성팬들이 ‘이규영 복귀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돌아오라고 열렬히 외치고 다녔을 정도이다. 지금도 그의 팬클럽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기획사들이 도입한 스타시스템과 개성적인 이미지로 ‘B급영화 스타’로 손꼽힌다. 신체사이즈 등 연기 외적인 것으로 이름만 알려졌던 앞세대 에로비디오스타들과는 그래서 차이가 있다.

B급문화판에도 스타는 존재한다. B급문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B급스타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요즘은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숨겨야 할 것으로 여겨지던 분야에서도 당당하게 얼굴을 내세우는 스타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 역시 우리 사회에서 요즘 불고 있는 ‘B급문화’의 바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최근 화제가 됐던 인터넷업체 조이헌트가 주최한 ‘미스 황진이 선발대회’였다.


(사진/'유흥업소’나 ‘서비스업종’ 종사자만 참여한 ‘미스 황진이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최한나씨와 못난이상을 받은 정진수씨)

이 미인대회는 다른 미인대회와는 달리 응모규정이 ‘유흥업소’나 ‘서비스업종’ 종사자였다.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서빙을 하거나 룸살롱, 단란주점에서 술시중을 드는 여성만이 참가해 인터넷에 한달 동안 사진을 띄워 네티즌들의 인기투표로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지원자가 적을까봐 주최쪽도 크게 걱정을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어 250여명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룸살롱 등 주점에서 근무하는 ‘아가씨’들이었다. 또한 이런 대회의 성격상 일반 음식점 종사자들도 참가를 꺼릴 법했지만 많은 응모자들이 얼굴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최하나(21)씨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응모한 경우. 주최사인 조이헌트가 준비중인 영화에 기용될 예정이다. “처음에는 룸살롱 종사자만 지원하는 것으로 오해한 부모님이 대회 참가를 말렸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꺼릴 것이 없어 지원했다”고 한다. 대상을 수상한 최씨 못잖게 룸살롱 종사자임을 밝히고 얼굴까지 공개한 다른 수상자들이 더욱 화제가 됐다. 미모 부문이 아닌 특별상 ‘못난이상’을 받은 정진수(28)씨는 자신이 안산시에 있는 한 룸살롱의 ‘마담’임을 밝히고 참가했다.

메들리계의 신화, 김란영

“숨기고 싶은 것도 없고 직업에 창피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손님들도 제가 출전한 것을 알고 인터넷 투표에서 표를 던져주시기도 했고요. 사람들이 이 업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불식시키고 싶어서 나갔어요.”

이제 스타는 꼭 주류문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과 문화적 취향의 다양화 현상과 맞물려 다양한 스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B급감수성의 대표적 코드라고 할 수 있는 인간본연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대중음악계에는 H.O.T나 조성모가 아닌 ‘밀리언셀러’ 가수들이 있다. 김란영, 만석이, 신웅, 민승아 등 생소한 이름들이 그들이다. 주류 대중가요판이 아닌 이른바 ‘가요메들리시장’, 즉 버스터미널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주로 팔리는 ‘카드라이브뮤직시장’의 스타들이다. 특히 80년대부터 카페뮤직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김란영씨는 우리나라의 어떤 가수도 이루지 못한 1천만장 판매고를 올린 ‘메들리계의 신화’로 알려진 인물이다.

스테디셀러를 레퍼토리로 삼는 메들리음반의 특성상 이 시장은 장기전으로 승부한다. 86년부터 메들리음반을 녹음해온 진성(40)씨는 신웅, 박진석, 민승아씨와 함께 남성 메들리 4인방의 한명으로 꼽힌다. 등으로 대박가수가 된 진씨는 지금 10번째 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당대의 스타라고 하는 가수들에게 메들리 녹음을 시켜보라. 제대로 할 수 있는 가수는 아마 없을 거다”라고 진씨는 단언한다. 그만큼 듣기는 쉽지만 제대로 부르기는 어렵다는 게 메들리가수들의 자부심이다. 진씨의 말이 허투루 하는 과장은 아니다.

보통 메들리가요는 대여섯 시간에 녹음을 끝내야 한다. 제작의 영세함 때문에 녹음스튜디오 대여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키맞추고 여러 번 다시 녹음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준비된’ 가수가 아니면 녹음의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반주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메들리가요는 초벌녹음에 한번 더 소리를 입힌다. 소리를 보강하기 위해서다. 가수들은 처음 부른 노래에 맞춰 다시 한번 그대로 부른다. 소리의 키와 박자에서 한치의 오차가 있어서도 안된다. 보통 실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기술이다. “메들리가수들은 어릴 때부터 노래신동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웬만한 감각이나 노래실력 가지고는 기계조작이 거의 없는 메들리를 소화할 수 없다.” 메들리가요를 전문으로 녹음하고 있는 윤스튜디오의 엔지니어인 전영찬씨는 “메들리가수야말로 가창실력으로 진검승부를 하는 음악인들”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B급 정서를 내세우는 A급 스타들

최근 들어서는 주류음악계에서 물러난 가수들이 이 시장에서 새롭게 약진하고 있다. 80년대 록그룹에서 활동했던 위일청씨와 이치현씨가 대표적이다. 이들을 영입해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시영레코드의 문규현 대표는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업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급화를 추구해야 한다. 발굴로 모험을 걸기보다는 실력을 검증받은 가수들을 쓰는 편이 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요즘 메들리시장의 새로운 경향을 설명했다.

B급열기는 요즘 새로운 현상도 빚어내고 있다. ‘싸구려’라는 도맷금으로 넘어가던 B급문화가 신세대들에게 어필하면서 뒤늦게 컬트적 가치를 인정받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환갑잔치를 전전하던 신바람 이박사의 뒤늦은 인기는 그 대표적인 예다. 저예산영화의 지존으로 꼽히는 남기남 감독도 최근 들어 B급영화의 개척자로 조명을 받았다. 거슬러올라가면 정비석의 은 발표 당시 통속소설로 받아들여졌지만 이젠 거장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예들은 B급 감수성이 시간과 세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과 발전을 거듭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B급정서를 내세우는 A급스타들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는 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직설적이고 코믹한 가사와 전형적인 뽕짝스타일의 이라는 곡을 히트시켰던 가수 DJ DOC는 자신들이 ‘양아치’임을 당당히 외치며 등장했다. 만화계에서는 성적 욕망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묘사한 의 양영순씨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런 맹아들이 싹터 지금은 B급문화가 성숙 직전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요즘에는 B급적 감수성이나 이미지로 성공한 스타들은 방송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클론을 패러디한 클놈이나, 촌스런 분위기의 평범한 광고모델들, 그리고 마치 80년대 고고장 디제이처럼 라디오를 진행하는 박철씨 등도 ‘B급적 A급스타’로 볼 수 있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