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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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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여, 거짓된 역사여

등록 2002-08-14 00:00 수정 2020-05-02 04:22

진실 드러나는 1965년 역쿠데타의 비밀… 그는 수카르노와 국민을 어떻게 속였나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수하르토의 역할을 규정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1998년 시민들에게 쫓겨난 수하르토 전 대통령, 수십년 동안 역사책을 장식해온 ‘영웅’ 수하르토를 요즘 시민들이 내동댕이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수하르토라는 이름에 덧칠해온 탁월한 군 지도자라는 명성도 퇴색되었다. 위대한 ‘용장’이라고 불린 그의 이름에는 이제 수많은 물음표가 덕지덕지 나붙었다.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를 두번 죽였다

수하르토가 권좌에 오르면서 무용담을 늘어놓아 독립전쟁의 상징처럼 된 이른바 ‘1949년 3월1일 공격’에 대해서도, 또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던 수퍼세마르(1966년 3월11일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 수하르토에게 이른바 전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에 대해서도 이제 곧이듣는 이들이 별로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간 큰 의문을 지닐 수 있는 것만 보아도 세상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지난 시절엔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할 수 없던 ‘정통역사’였으니 말이다. 물론 언론도 그걸 성역이라고 믿고 침묵해왔다. 수하르토 시절이 어느 정도였는지 참고로 내 경험을 한마디 덧붙이자면 “정부가 부패했다”고 단 한줄 끼적인 걸로 3년 ‘콩밥’을 먹었으니, 나머지는 독자들 상상에 맡긴다.

수하르토에 대한 의문은 한발 더 나아가 이제 G30S(1965년 수카르노 정부에 대해 일부 장군들이 쿠데타를 도모하고 있다며 일단의 군인들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으로 ‘9월30일운동’이라고도 한다)에 수하르토가 직접 관련되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까지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인도네시아 언론들보다 2년이나 앞서 이 현장취재와 탐문조사를 통해 최초로 보도한 적이 있었지만.(2000년 4월20일치 304호 68쪽 ‘1965년! 구멍난 역사를 찾아라’ 참조)

아무튼 이렇게 사회적인 규모로 ‘의심’이 유발되는 현상은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때늦은 감이 들지만, 새로운 사료편찬을 통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수카르노에서 수하르토로 넘어가는 정권 이양은 하룻밤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장군들이 권력을 잡고자 오랫동안 준비해온 결과”라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수하르토가 수카르노를 두번 죽였다는 걸 떠올리기 시작했다. 수카르노의 병이 악화되도록 방치해서 1970년 6월21일 그가 죽음에 이르도록 한 사실이 첫 번째였다면, 수하르토 정부가 판차실라(인도네시아의 국가 이념을 명시한 5개 항목) 작성일에 대한 기념식을 폐지해버리고 수카르노에 대한 교육과 심지어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마저 금지해버린 것이 두 번째였다고.

시민들은 당시 수하르토가 누그로호 노토수산토(군 역사가)를 시켜 ‘판차실라’는 수카르노가 주도한 게 아니라는 서투른 역사를 만들어내며 ‘발악’했던 사실도 기억해냈다. 수하르토는 철저하게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를 지우는 일에 사력을 다했던 셈이다. 이래서 수카르노는 말년에 몸과 정신이 모두 뭉개지고 말았다. 수카르노가 권력에서 밀려나는 과정은 수하르토가 경험한 것과는 매우 큰 대조를 이뤘다. 수하르토는 권좌에서 쫓겨나고도 수많은 의사들과 뛰어난 의료시설로 목숨을 부지해왔고, 각종 법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사히 방어작전을 전개해나갔다.

역사교과서는 거꾸로 말한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이른바 ‘KKN’으로 유명한 부패·공모·족벌주의를 수사하기 위해서는 수하르토와 그 측근들을 기소해야만 하는데, 그런 일조차 쉽지 않은 걸 보면 수카르노의 최후와 수하르토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고 난 뒤에는 부정부패말고 도대체 뭘 했는지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1965년 9월 공산주의자 박멸로 수백만명을 학살한 일에서부터 1969∼79년 사이 부루섬에 투옥한 정치범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일리안자야·동티모르·아체를 강제 합병하며 수백만 현지인들을 학살한 일과 1996년 자카르타의 탄중 프리옥이나 1998년 트리삭티 대학생 살해 같은 일들이 어떻게 저질러졌는지에 대해서도 뜻있는 시민들은 파고들어 가고 있다.

“역사는 권력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던가. 1965년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인도네시아의 모든 학생들은 교과서를 통해 세뇌당해왔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동안 선생들에게 영웅 수하르토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란 대표적인 세대다. 이렇게 교육받다 보니 수하르토가 역사를 교묘하게 조종한 세계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수하르토, 그 거짓 수하르토 역사는 1965년 10월1일부터 시작되었다. 수하르토가 집권한 당시부터 심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에서 사용하는 역사책에는 “6명의 장군들과 1명의 중위가 살해된 당시 G30S에 대해서 수하르토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장군들이 살해된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수하르토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다”고 기술하고도 있다.

수하르토의 집권 배경이 되었던 G30S를 교과서들이 어떻게 기술해왔는지, 그 핵심 부분을 추려보면 대개 아래와 같다. “1965년 10월1일 금요일 이른 아침, 최고위급 장성들이 모두 납치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수하르토 소장은 급히 참모들을 코스트라드(특전사) 본부로 불러모아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수하르토는 정보부재 상태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의 행방을 먼저 탐문했다. 이어서 아침 7시 인도네시아 정부 라디오(RRI)를 통해 수하르토 소장은 G30S는 공산당(PKI)이 합법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하르토 소장의 확신은 즉각 반역자들에 대한 공격작전으로 이어졌고, 라디오 방송사를 접수한 수하르토 소장의 군대는 G30S 그룹이 핵심지로 사용했던 동자카르타의 누방 부아야와 폰독 게데를 점령했다. 수하르토 소장은 납치로 공석이 된 육군참모총장직을 수행하며 라디오를 통해 온 종일 혼란에 빠져 있던 시민들에게 냉정함을 당부했다.”

G30S를 통해 경쟁적 장군들을 제거하다

이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목격자들의 진술은 다르다. 수하르토가 쫓겨난 뒤 용감한 일부 증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수하르토가 사전에 G30S를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특히 G30S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당시 자카르타 지역 사령부 참모장이었고, 수하르토의 부하로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압둘 라티에프 대령(퇴역)이 대표적인 반대 증언자로 등장했다.

“수하르토는 G30S 이틀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수하르토의 집으로 찾아가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다. 당시 수하르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라티에프 대령의 증언은 이어졌다. “나는 G30S 개시 몇 시간 전에 다시 수하르토에게 최종적인 보고를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수하르토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라고 대답까지 했다.”( 304호 72쪽 라티에프 대령 인터뷰 참조)

전문가들은 라티에프 대령의 증언을 종합해 G30S에 대한 수하르토의 역할을 두 갈래로 추론하고 있다. 하나는 수하르토 소장이 처음부터 권력을 잡기 위한 쿠데타 계획 아래 믿을 만한 측근들을 동원해서 핵심 요직에 있던 모든 장군들을 납치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수하르토의 쿠데타 가능성을 따르는 전문가들은 G30S를 주도했던 운퉁 중령이 수하르토가 중부 자바사령관일 당시 데리고 있던 부하였고 가장 친하게 지낸 인물이었다는 사실과, 당시 모든 핵심 요직에 있던 최고위급 장군들이 모두 희생당했는데 가장 막강한 군 동원력을 지녔던 수하르토 소장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왔다. 다른 하나는 수하르토가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G30S 상황을 통해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장군들, 예를 들면 평소 수하르토를 좋지 않게 여겼던 나수티온 장군이나 아흐마드 야니 장군 같은 이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직을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실현할 호기로 여겨 역쿠데타를 도모했다는 추론이다.

역쿠데타설을 캐고 있는 전문가들은 G30S 주도자들이 모두 수하르토와 절친한 이들이었고, 이들은 ‘거사’ 이후를 대비해서 최소한 군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인물 하나 정도로 수하르토를 지목해서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상황이 발생하자 유일하게 군을 동원할 수 있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수하르토가 역쿠데타로 정권 탈취에까지 이르렀다는 추론이다.

장군들의 성기를 잘랐다고?

이후 수하르토는 G30S의 주도자였던 운퉁 중령과 외곽 임무를 담당했던 라티에프 대령을 모두 감방에 처넣어 ‘입’을 봉쇄한 셈이다. 라티에프의 증언에 따르면 “수하르토가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안심하라”고 운퉁 중령이 여러 차례 자신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운퉁 중령은 얼마 뒤 총살당하는 것으로 그 꼬인 역사를 영원히 무덤으로 들고 가버렸다.

또 하나, 수하르토는 당시 G30S 과정에서 살해된 장군들의 주검을 우물에서 건져낸 뒤, 걸와니(인도네시아 공산당 여성조직)에 대한 야비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공산당을 축출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걸와니의 일부 여성들은 난삽한 섹스파티를 벌이며 장군들의 몸을 잘랐고 특히 성기까지 오려냈다.” 이게 교과서의 내용이다. 그러나 증언자로 등장한 헨드로 수브로토(당시 주검을 촬영한 유일한 카메라맨)와 부검의는 장군들의 주검에서 잘려나간 부분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304호 73쪽 걸와니 부서기장 술라미 인터뷰 참조)

현재까지 드러난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수하르토가 1965년 9월30일 발생한 G30S를 이용해서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군을 동원해 수카르노를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결탁한 인물로 몰아세워 대중적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 것이 요체였다. 수하르토는 합법성을 확보하고자 수카르노를 강박해서 1966년 3월11일 수퍼세마르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과서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카르노가 써준 위임장에는 국가 안정을 위한 모든 권한을 수하르토에게 이양한다고 돼 있었다.”

반대쪽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본디 한장밖에 없었던 수퍼세마르가 둘로 둔갑했다고 한다. 또 원본에는 “국가가 안정되면 다시 수카르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문서 자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문제는 수퍼세마르가 위조되었건 또는 분실되었건 상관없이 수카르노가 죽을 때까지 수하르토는 권력을 이양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32년 동안 수하르토가 대통령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수카르노도 갔고, 그 수카르노를 배신하고 권좌에 올랐던 수하르토도 저무는 인생이 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대통령이 앉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뒤틀린 인도네시아 현대사는 ‘정통역사’로 둔갑한 채 도도하게 시민들을 배신하고 있다. 보란 듯이 시민을 우롱하는 교과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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