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집권 한 달도 안 돼 최악의 정치적 위기로 내몰렸다. 검은돈과 말 바꾸기 논란 속에 꺼내든 조기 선거 카드가 자충수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시바 총리는 여론의 뭇매 속에 갈수록 커지는 당내 압박을 넘어 ‘재신임’에 성공할 수 있을까?
2024년 10월27일 치른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예상을 뛰어넘는 참패를 기록했다. 엔에이치케이(NHK) 방송 등 일본 매체의 보도를 종합하면, 최종 개표 결과 자민당은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해 191석을 얻었다. 2021년 10월 치른 직전 선거 때 얻은 의석(259석)보다 68석이나 줄어든 수치다.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공명당도 기존보다 8석 줄어든 24석을 얻는 데 그쳤다. 두 정당의 의석수를 합해도 중의원 과반(233석)에 18석이나 부족하다.
야당은 약진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직전 선거 때보다 52석을 늘린 148석을 차지했다. 오사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정당 일본유신회와 중도보수 성향의 국민민주당도 각각 38석과 28석을 얻으며 선전했다. 진보 성향의 레이와신센구미와 공산당도 각각 9석과 8석을 확보했다. 이 밖에 극우 성향의 참정당과 보수당이 각 3석씩을 얻었고, 무소속 후보도 12명 당선됐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이끈 민주당이 308석을 차지하며 압도했던 2009년 8월 총선에서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이끈 자민당은 119석을 기록하며 정권을 내줬다. 자민당은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다시 전면에 내세웠고, 2012년 12월 총선에서 294석을 얻으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후 치른 3차례 선거에서 △2014년 291석 △2017년 284석 △2021년 259석 등 의석수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긴 했지만, 200석 아래까지 추락한 것은 12년 만에 처음이다. 핵심 원인은 고질적인 부패였다.
2023년 말 아베 전 총리가 꾸린 자민당 내부 6개 파벌 중 최대 계파인 아베파 등이 후원 행사에서 모금한 정치자금을 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렇게 조성한 비자금은 소속 의원들이 나눠 썼고, 사용처 역시 불문에 부쳐졌다는 게다. 대대적인 수사에 나선 도쿄지검은 2024년 1월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아베파와 니카이파의 회계책임자를 불구속 기소하고, 기시다 후미오 당시 총리가 속한 기시다파의 전 회계책임자를 약식 기소했다. 2018~2022년 5년간 아베파는 6억7503만엔(약 60억7천만원), 니카이파는 2억6460만엔, 기시다파는 3059만엔을 모금한 뒤 회계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비자금을 조성해 무단 사용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 아베파 등 3개 파벌이 해산을 선언했다. 자민당은 자체 진상 조사를 거쳐 2월13일 “전현직 의원 85명이 정치자금 보고서를 부실 기재했고, 관련 금액은 5억7949만엔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자민당의 자체 조사 발표를 신뢰한다는 여론은 10%에도 이르지 못했다. 교도통신 등의 여론조사 결과, 2021년 10월 집권 직후 60%에 다가섰던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은 2024년 2월 24.5%까지 곤두박질쳤다. 총체적 불신이었다.
기시다 전 총리의 지지율은 집권 막바지인 8월에 18%대까지 떨어졌다.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기시다 전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는 형식으로 총리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시바 총리는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9월27일 자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그는 10월1일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실시한 총리 선출 투표에서 각각 과반의 찬성을 얻으며 무난히 집권에 성공했다.
이시바 총리의 부친은 참의원과 돗토리현 지사를 지낸 이시바 지로다. 은행원으로 일했던 이시바 총리는 부친의 사망 뒤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한 ‘2세 정치인’이다. 그럼에도 그는 유력 정치인이 이끄는 파벌이 주도하는 일본 정치권에서 ‘비주류’를 자처했다. 한때 ‘수월회’란 군소 파벌을 이끌기도 했지만, 그는 자민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정책 실패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당내 야당 노릇을 자처해 ‘미스터 쓴소리’란 별칭까지 얻었다. ‘쇄신’이 필요했던 자민당 주류가 이시바 총리의 손을 들어준 이유다. 하지만 ‘5수’ 끝에 총리에 오른 그는 취임 직후부터 기존과 다른 말과 행동을 내놓기 시작했다. 조기 총선을 밀어붙인 게 대표적이다.
애초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조기 총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정부·여당과 야당이 제대로 논쟁을 벌여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한 뒤 선거를 치르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집권 직후 태도가 돌변했다. 새 정부 출범에 대한 기대감이 높을 때 선거를 치르는 게 유리하리란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결국 이시바 총리 정부 출범 9일 만인 10월9일 중의원을 해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 내각이 들어선 뒤 실시하는 ‘가장 빠른 조기 총선’이다.
같은 날 이시바 총리는 파벌 비자금 조성과 사용에 연루된 정치인을 공천에서 배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체 조사로도 85명이 ‘뒷돈’을 챙긴 것으로 확인됐지만, 공천을 받지 못한 정치인은 단 12명에 그쳤다. 여기에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가 10월23일 “자민당이 총선 후보 등록 직후 비자금 사건으로 공천 배제된 후보가 이끄는 당지부에도 2천만엔을 입금했다. 자금 원천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되는 정당 교부금”이라고 보도하면서 자민당에 대한 비판 여론의 불길이 거세졌다.
선거 참패에도 이시바 총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선거 다음날인 10월28일 자민당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민당은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당의 개혁 자세에 대한 국민의 질책으로 받아들인다. (…) 국정은 한시도 멈출 수 없다. 국민 생활과 일본을 지키는 일을 완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유신회와 국민민주당 등 보수정당을 상대로 연정 확대 협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새 총리 선출을 위한 특별국회는 일본 헌법에 따라 투·개표 뒤 30일 안에 소집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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