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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격전지 우크라 바흐무트, 점령이 곧 승리는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최대의 격전지 바흐무트…러시아가 점령해도 앞으로 전황이 더 중요해
등록 2023-05-27 02:17 수정 2023-05-30 05:09
우크라이나 바흐무트의 극장과 가게가 파괴되기 전인 2022년 5월8일 모습(위), 교전으로 건물이 파괴된 2023년 5월15일 사진이 대비된다.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바흐무트의 극장과 가게가 파괴되기 전인 2022년 5월8일 모습(위), 교전으로 건물이 파괴된 2023년 5월15일 사진이 대비된다. AP 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서방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던 2023년 5월22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가 러시아에 결국 함락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젤렌스키는 이날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바흐무트를 통제하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바흐무트는 오직 우리 마음속에 있다. 비극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흐무트가 10개월의 격렬한 전투 끝에 러시아 점령이라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상징적 중요성에 집착한 소모전

미국 국방부도 5월24일 러시아가 이 도시를 통제하냐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서방 언론에 우크라이나 전쟁 전황을 제공하는 미국 ‘전쟁연구소’(ISW)도 그날 우크라이나군 참모부가 2022년 12월 이후 처음으로 낸 상황보고서에서 바흐무트 전투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연구소는 이는 바흐무트 전투를 주도한 러시아의 용병 부대 와그너 그룹이 도시 내에서 더 전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2022년 8월 초부터 본격화한 바흐무트 전투는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격전지로 떠올랐다. 러시아가 결국 점령했지만 양쪽의 손익은 아직 진행형이다. 양쪽이 바흐무트 자체의 전략적 가치보다 병력과 자원을 투입하는 피해를 감수하는 소모전을 벌였고, 상징적 중요성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우선 러시아는 도시 점령 자체로 상징적 승리를 거뒀다. 2022년 여름 북부 하르키우와 남부 헤르손을 탈환당한 뒤 처음이다. G7 정상회의에 맞춰 바흐무트를 점령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이 회의의 초점으로 삼으려던 서방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바흐무트 전투에 집착한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병력과 자원을 소모시키려는 전략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와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의 진정한 목적은 바흐무트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소모하는 ‘고기분쇄기’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2022년 말부터 서방 군사 당국들은 우크라이나가 전략적 가치가 없는 바흐무트 사수에 집착하지 말고 포기해야 한다는 불만을 표출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소모전 전략에 말려들었다는 우려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보면 바흐무트는 자국의 항전 능력을 과시하고, 서방의 지원을 촉구하는 전투 장소였다. 2022년 12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을 전격 방문하기 직전에 바흐무트를 찾았다. 미 의회에 가서는 바흐무트 전투 병사들의 사인이 적힌 국기를 과시했다. 우크라이나는 바흐무트 항전을 고리로 서방에서 중거리 정밀무기, 장갑차와 탱크, 결국엔 이번 G7 정상회의를 즈음해 F-16 전투기 지원까지 이끌어냈다.

누가 더 큰 희생과 대가를 치렀나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역시 바흐무트 전투의 목적이 러시아 전력을 묶어두고 소모시켜서, 2023년에 예고된 자국의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특수군 사령관 예우헨 메제비킨 대령은 “그들을 소모시키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5월21일 <에이피>(AP) 통신에 말했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 전략연구소의 필립스 오브라이언 교수는 “러시아군은 바흐무트 주변에서 막대한 희생을 겪고 소모돼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런 주장과 평가를 보면, 바흐무트 전투에서 양쪽의 손익은 누가 더 큰 희생과 대가를 치렀냐는 데 달렸다.

프리고진은 5월24일 공개된 정치전문가 콘스탄틴 돌고프와의 인터뷰에서 계약제 용병 1만 명과 교도소에서 차출한 수형자 1만 명을 포함해 2만 명이 숨지고 약 3만 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그는 와그너 그룹에서 5만 명 정도가 가장 많은 동원이었다며, 우크라이나군 8만2천 명을 상대했다고 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 군인 약 5만 명이 숨지고 5만~7만 명이 다쳤다고 주장했다. 와그너 그룹이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기는 그의 주장대로 힘들 것이다. 이 전쟁에서 동원된 양쪽 병력이 20만~30만 명임을 고려하면, 바흐무트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양쪽 병력이 최대 10만 명 내외고 수만 명의 사망자는 과장이다. 양쪽이 2만 명의 희생자를 낸 것도 매우 높은 사망자 비율로 평가된다.

전상자 수보다는 이 과정에서 누가 더 전력을 소모하며 기회비용을 치렀냐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정규군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았다. 와그너 그룹의 손실이 컸다면 러시아 쪽에도 피해라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용병 특성상 특정 지역 전투에만 투입되고 광범위한 정규전 전선을 맡지는 않는다. 이는 향후 벌어질 우크라이나의 반격 공세에 임할 러시아 정규군 전력이 비교적 보전됐음을 의미한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정규군을 동원해 격전을 치러, 예고한 반격 공세에 들어갈 전력을 소모한 것은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쪽은 이제 바흐무트 함락 직전에 주변 외곽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려, 바흐무트를 포위해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 입장이다. 한나 말랴르 우크라이나 국방차관은 “적은 바흐무트를 포위하는 데 실패했다. 도시 주변의 고지를 상실했다. 우리 군은 계속 전진했고 도시 절반을 포위했다”고 평가했다. 전력이 보충되면 공세로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프리고진도 5월24일 소셜미디어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바흐무트를 포위하고 크림을 공격하려 할 것”이라며 “위험한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항전 효과 거둘 수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였던 바흐무트 전투의 승패는 향후 전황으로 결정 날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바흐무트 전투에서 진정한 승자는 도시 점령 여부보다는 다음 국면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월스트리트저널> 등 서방 언론들은 전했다. 여전히 예고 상태인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무위로 끝나거나 역공당한다면, 바흐무트에서 러시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점령지를 파고들어 점령 상태를 바꿔놓는다면, 우크라이나는 바흐무트에서 항전 효과를 이룬 것이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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