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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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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도주한 아프간은 어디로?

미국 견제는 경제 측면에 그쳐… 파키스탄과 중국의 개입도 제한적
등록 2021-08-21 11:41 수정 2021-08-22 23:26
2021년 8월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전투원들이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외국으로 도피해 텅 빈 대통령궁을 점령했다. AP 연합뉴스

2021년 8월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전투원들이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외국으로 도피해 텅 빈 대통령궁을 점령했다. AP 연합뉴스

‘카불 엑소더스’가 연일 뉴스를 채우고 있다. “학살이 일어날 것”이라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겁에 질린 절규, 그럼에도 대통령마저 도망쳐버린 나라에서 계속 싸우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철군 계획을 발표하고 넉 달 만에 아프간은 아수라장이 됐다. 2021년 8월16일, 전국을 거의 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 곳곳에 탈레반 검문소가 세워졌고 총을 든 전투원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조건 없는 철군’을 얘기했을 때부터 탈레반은 평화협상에 기댈 인센티브가 없어졌다. 아프간 정부는 부패했고, 현지 치안병력은 미군의 지원과 정보력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마디하 아프잘의 말을 빌리면 “미군 철수는 아프간 정부와 군대가 깔고 앉아 있던 양탄자를 잡아 빼버린 꼴”이 됐다.

탈레반 태도는 근본주의 못 벗어나

1996~2001년 집권했을 때 탈레반은 여성의 고용은 물론 교육마저 금지했다. 여성은 집 밖에 혼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얼굴을 몽땅 가린 부르카를 씌웠다. 불교 유적을 부수고 소수민족을 핍박했다. 그러다 세계에 찍힌 과거의 실책을 피하기 위해 탈레반 지도부가 애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몇 주 새 탈레반은 러시아, 중국, 이란에 대표단을 보냈다. 이 나라들이 걱정하는 것은 ‘스필오버’(Spillover)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아프간 밖으로 넘쳐나와 주변의 안정까지 흔드는 것을 우려할 뿐이다. 탈레반은 내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골치 아픈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탈레반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최소한 자신들의 집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들 필요가 있다. 카불을 점령한 뒤 예전보다는 유화적인 조처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이 달라졌다고 보는 이는 없다. 어떤 화법을 쓴들, 이슬람 수니 극단주의에 기초한 이념은 그대로다.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8월17일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허용하겠지만 이슬람의 틀 안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교리로 결정하겠다는 것 자체가 변화를 거부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바이든 정부는 영악한 선택을 했다. 당장은 비난을 듣겠지만 어차피 못 이길 전쟁을 끝낸 것이니까. 미국을 탓하기는 쉽지만 극단주의이든 내전이든 경제난이든 간에 근본적인 문제는 아프간에 있다. 바이든 말대로 “아프간 사람들의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도주는 충격적이다. 이제 인도적 재앙이 일어난다면 과연 누가 탈레반을 막을 수 있을까.

미국이 가진 압박 수단은 달러다. 국외로 도주한 아프간 중앙은행 총재 아즈말 아흐마디는 미국 경제매체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예치금 90억달러는 거의 모두 해외에 있고 미국이 차단하고 있어서 탈레반이 손댈 수 있는 금액은 0.1%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양귀비를 키우고, 아편과 헤로인을 팔고, 민간인을 납치해 몸값을 받으며 조직을 유지해왔다. 그걸로 정권을 운영할 수는 없다. 달러가 들어오지 않으면 현지 통화인 아프가니의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급등할 것이다. 탈레반 대변인도 “우리 경제를 위해 여러 나라와 얘기하고 있다”면서 외부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미국의 압박 수단은 달러와 원조뿐

아프간 정부는 세입의 10배를 외부 원조로 해결해왔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 198억달러의 43%가 원조금이다. 바이든 정부는 아프간에 배정될 4억5천만달러 상당의 국제통화기금(IMF) 돈도 탈레반에 넘어가지 않도록 막을 계획이다. 미국 송금업체 웨스턴유니온은 아프간으로의 송금을 차단하겠다고 발표했다. 2020년 해외에 나가 있는 아프간인들이 고향에 보낸 돈은 약 7억9천만달러(약 9300억원)로 GDP의 4%에 이르렀다. 탈레반을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미국과 유럽연합이 아프간의 대외무역을 제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경무역이 완전히 봉쇄될지 알 수 없고 아프간의 교역액 자체도 많지 않다. 불법 무역을 빼면 2020년 수출액은 7억8천만달러에 그쳤다.

무엇보다 미국은 전쟁에서 지고 도망치는 모습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반세기 전의 ‘사이공 탈출’과 이번 ‘카불 탈출’의 유비(類比)는 명확하다. 바이든 정부는 패전을 자인함으로써 아프간을 관리할 지렛대를 잃었다. 이제 서방은 중국, 혹은 못 미더운 파키스탄만 쳐다봐야 한다.

아프간 동쪽 파키스탄은 미국의 동맹국이지만, 파키스탄 군부는 탈레반의 태생 때부터 긴밀한 관계였다. 과거 극도로 고립됐던 탈레반 정권에는 파키스탄과의 관계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암묵적인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파키스탄 의존도가 줄어들 것으로 관측된다. 파키스탄 역시 내부 극단세력을 통제하는 것에만 신경 쓸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아프간 북부의 요충지인 와칸회랑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양까지 내려가는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PEC)을 추진 중이며, 가스관 연결 같은 사업도 걸려 있다. 중국이 아프간에 개입하려 들지는 않겠지만, 탈레반이 세계의 지탄을 받는 행위를 다시 한다면 그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국에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중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최소치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중국이 아프간과 경제협력을 하면서 극악한 행동만은 못하게 견제해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대치다.

미군이 떠난 뒤 베트남은 고립을 지나 개혁과 개방으로 나아갔고, 아시아의 새로운 생산기지가 됐다. 아프간도 그럴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비현실적인 전망이다. 카불은 현실판 <모가디슈>가 되고 아프간은 제2의 소말리아가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제2의 모가디슈’ 될 가능성 더 커

너무나 마음 아픈 것은 그곳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아프간인 4천만 명을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군대를 파견한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는 일부 사람에게라도 직접적 책임이 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협력한 라오스의 소수민족 몽족을 내팽개친 전과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8월18일 <에이비시>(ABC) 방송 회견에서 “5만~6만5천 명의 아프간인 미군 협력자와 가족들도 출국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은 독일군과 일했던 아프간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한국도 파병을 했다. 국내 구호개발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교육받고 돌아갔거나 아프간에서 업무에 협력한 현지인들을 걱정하는데, 한쪽에는 ‘아프간인들의 민족 해방’이라고 치하하는 사람들까지 보인다. ‘카불 함락’은 한국에도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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