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30년 전이었다. 1988년 9월17일, 세상 눈길이 서울올림픽에 쏠렸다. 하루 뒤인 9월18일, 버마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소마웅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앞선 3월 랭군공대가 불길을 지핀 민주화 시위는 버마 전역으로 번졌고, 8월 들어 독재자 네윈 장군이 물러났다. 그 ‘랭군의 봄’을 짓밟은 쿠데타 군인들이 시민을 무차별 공격해 3천 명 웃도는 희생자가 났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에 빠진 국제사회는 버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1만여 청년·학생이 체포령을 피해 타이, 중국, 인도 국경으로 빠져나갔다. 그이들이 11월5일, 버마-타이 국경 까렌민족해방군 꼬무라 기지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깃발을 올리고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반독재와 민주화를 외치며 800여 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국경 전선에 목숨을 바쳤고, 세계게릴라전사에 ‘최대 희생 학생군’이라는 아픈 기록을 남겼다.
“의장 독재 16년, 이제 그만둘 때 됐네”9월15일, 까렌민족해방군 제7여단 지역인 모에이강 기슭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버마학생민주전선 다운타만 기지로 초대받아 갔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제11차 총회를 맞아 중앙위원 42명을 비롯한 지도부 78명이 모이는 자리였다. 바깥사람으로 유일하게 초대받은 나는 한자리에서 옛 동무들을 모두 만나는 큰 기쁨을 누렸다. 그동안 내가 학생군 총회에 단골로 끼어들었던 것은 취재보다 오히려 그이들과 함께 나누는 세월을 다짐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까닭이다.
“형, 목 뒤가 이상한데 한번 봐줘.”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케는 오랜만에 걸치는 군복이 어색한 듯 이리저리 매만진다. “정기총회니까 3년 만인가?” “그렇지. 벌써 16년째네.” “의장 독재 16년, 이제 그만둘 때 됐네. 골치 아픈 정치 접고 한 학기(8888 민주항쟁 참여로 만달레이의과대학 6학년 2학기에서 멈춤) 채워 산골 의사나 하는 게?” “그렇잖아도 다들 돌아오라고 난리야. 이제 교수들이 다 동기니까 얼굴만 내밀면 학점 주고 졸업장 주겠다며.” 학생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탄케는 이내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낄낄댄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추억을 먹고사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험난한 산악 무장투쟁 30년의 동력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의장 자리가 맘에 들었겠지?” “무슨 감투라고! 알다시피 10년 전 총회 때부터 늘 사표 냈잖아. 책임질 일만 산더미 같은, 진짜 죽을 맛이야. 이게 세대교체 안 되는 우리 한계고. 젊은 친구들이 없잖아.” “까렌민족연합 의장 무투도 이 총회를 눈여겨보더구먼. 휴전협정에 이어 정치회담 앞둔 판에 학생군 새 인물 들어서면 안 된다고.” “나를 포함한 지금 지도부 말고는 전 과정을 아는 이가 없으니 소수민족해방군 진영에서는 그럴 만도 하지. 그러니 내 개인만 생각할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고.” 본디 짙은 탄케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정치 앞에서 떠날 자유도 없는 인생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이 앞선다.
“식물정부에 식물정치인만 득실대는 땅”“새 지도부 선출 말고 이번 총회 다른 의제는?” “국경 전역이 그렇듯이 우리도 정치회담 놓고 전략 짜는 거지.” “그놈의 전략, 언제까지 전략만?” “음, 죽을 때까지 회의하고 회담하다 말 것 같아.” “정치회담 결과에 따라 이게 학생군 마지막 총회가 될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지만, 정치회담이 열릴지 말지….” “정치회담, 정부군이나 정부 쪽 진짜 속내가 뭔가?” “미친 새끼들! 정부도 정부군도 말로만 평화 외칠 때가 아냐. 시민은 이제 더 기다릴 시간도 없어. 전쟁 피란민에, 물난리에, 경제는 엉망진창 먹을거리도 없고. 진짜 시민을 위한다면 곧장 정치회담 열어 내전 끝내고 평화 정착시켜야 해. 해결책이란 게 오직 그 길뿐이야. 조건은 무슨 조건, 시민 살리라는 게 정치인데!” 핏대를 올리는 탄케 소리가 외진 국경을 넘어 네이삐도의 정치인과 군인들 속을 후벼 팠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아웅산수찌는 입으로만 소수민족을 말할 뿐, 전략이나 계획을 꾸릴 만한 뇌도 없는데다 무엇보다 소수민족을 받아들일 만한 심장이 없어. 아웅산수찌를 지도자로 삼은 건 우리 시대의 비극이야.” 결국 탄케는 아웅산수찌를 겨냥했다. “지금껏 협상 과정을 보면 오히려 군 출신인 테인세인 대통령 시절이 더 나았어. 군인들과 직접 대화할 때는 그나마 우리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아웅산수찌 정부 들어서고는 되는 일이 없어. 국제사회를 향해 평화니 민주주의니 선전만 해댔지 아웅산수찌가 중재력도 실행력도 전혀 없다는 말이야.” 탄케는 버마를 “식물정부에 식물정치인만 득실대는 땅”으로 못 박았다.
계급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국경 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던 그 청춘들은 계급 없고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교육·의료·보건·환경 분야 대민사업을 벌여 소수민족 사회에 큰 힘을 보탰다. 그 청춘들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었던 소수민족해방군 틈을 비집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실어나른 전령사 노릇을 하며 국경의 변화에 중대한 발판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그 청춘들은 이제 한 움큼씩 돋아난 흰머리를 세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국경 전선에서 혁명 2세를 키우고 있다. 비록, 얼마나 더 긴 세월을 국경에서 보내야 할지 아는 이는 없지만.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이 국경에 휘날리는 한 버마의 평화는 말할 수 없다. 30년 동안 봐온 이 해묵은 청춘들이 총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까닭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제11차 총회는 탄케를 비롯한 현 지도부의 연임을 의결하면서 9월21일 막을 내렸다.
로이 따이렝·레이와·냐무·다운타만(버마)=글·사진 정문태 전선기자 beyondheadline1@gmail.com*인명·지명 등 현지어는 필자의 요청에 따라 현지인 발음에 충실하게 표기했습니다. 문장과 표현 역시 필자의 요청에 따라 최소한의 교열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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