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요동쳤던 한반도 정세가 하반기 들어 다시 한번 변곡점을 향해 가는 모양새다.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평창 평화체제’는 4·27 남북 정상회담을 거쳐, 6·12 북-미 정상회담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로부터 두 달여, 겉으로는 결정적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남북도, 북-미도 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물밑 협의를 이어가는 상태다. 그 과정에서 삐걱대는 모습도 보였다.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역동적인 시기가, 또 한 차례 다가오고 있다.
예정된 일정부터 따져보자. 4·27 판문점선언에 따라 개성공단 부지에 설치하기로 한 남북연락사무소 개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연락사무소가 문을 열면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하루 24시간, 365일 얼굴을 맞대고 남북관계의 크고 작은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그야말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게다. 때맞춰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8월20~26일)도 열린다. 더디기는 하지만,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9월 평양 남북회담, 합의 ‘이행’에 초점</font></font>8월 말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진다. 이번이 네 번째 방북길이다. 북-미 정상회담 직후(7월6~7일) 이뤄진 3차 방북 때는 북쪽과 원만한 협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북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협상 태도가 일방적이고 강도적”이라는 비난 담화를 내기도 했다.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을 맞바꾸는 ‘시간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올 들어서만 벌써 세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북한 정부 창건일(9월9일)을 전후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답방 형식으로 평양을 찾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9월 안에’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다. 지난 4·27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김 위원장은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래저래 9월 초순 북-중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 쪽은 한국전쟁 종전선언에 ‘당사자’로서 참여할 뜻임을 점차 분명히 하고 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9월 중순에 열릴 전망이다. 9월 하순으로 넘어가면 미국 뉴욕에서 유엔 총회가 예정돼 있어 시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4·27 정상회담에서 ‘원칙’에 합의했다면, 9월 정상회담에선 ‘이행’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은 8월16일치에서 “북남관계 개선 문제는 결코 그 누구의 승인을 받아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제재 압박과 관계 개선은 양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과 미국이 풀어야 할 ‘비핵화’에 발목이 잡혀, 남북 합의사항인 판문점선언 이행이 지지부진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문 대통령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문 대통령은 8월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 관계 진전의 부수적 효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북관계의 발전이야말로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는 동력입니다. 과거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기에 북핵 위협이 줄어들고 비핵화 합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역사적 경험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평화경제, 경제공동체의 꿈을 실현시킬 때 우리 경제는 새롭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풀어 북-미 협상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밝혀온 문 대통령의 일관된 구상이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핵 이후’에 대한 더 큰 꿈도 펼쳐 보였다. 유럽연합에 버금가는 동북아판 다자 경제·안보공동체 구축이다. 이 역시 이른바 ‘한반도 신경제지도’와 신북방·신남방 정책을 중심으로 한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 구상의 핵심 뼈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51년 전쟁 방지, 평화 구축, 경제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유럽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창설했습니다. 이 공동체가 이후 유럽연합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출발지였던 용산에서 저는 오늘,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합니다. 이 공동체는 우리의 경제 지평을 북방대륙까지 넓히고 동북아 상생번영의 대동맥이 되어 동북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동북아 다자 평화·안보체제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엔 총회, 한국전쟁의 끝?</font></font>9월18일엔 제73차 유엔 총회가 열린다. ‘세계 평화’를 주제로 고위급 본회의가 9월24일 시작된다. 9월26일은 국제 핵무기 전면 폐기의 날 기념행사가 총회장에서 열린다. 이 기간에 각국 정상의 총회 연설이 집중적으로 이어진다. 김정은 위원장의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한 방미와 2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점치는 보도가 미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나온 터다. 회의론이 적지 않지만, 유엔 총회 기간에 남·북·미·중 4자 정상 간 한국전쟁 종전선언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가능할까? 북한과 미국의 엇갈린 ‘시간표’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렸다. 해법은, 어쩌면 북-미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되새겨보자.
“한국전쟁이 (곧) 끝난다!” 4월27일 미국 동부 시각으로 저녁 7시55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메시지다. 강조하려는 듯 문장 전체를 대문자로 쓰고는, 끝에 느낌표까지 붙였다. 그는 이어 “미국과 ‘위대한’ 미국민들은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문장의 끝에도 느낌표가 붙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끝’을 언급한 것은 4·27 남북 정상회담 때문이다. 회담의 결실인 판문점선언 전문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13개 합의사항은 크게 세 항목으로 나눠 열거됐다.
첫째, ‘남북관계의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이다. 둘째,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셋째,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이다. 세 번째 항목 아래에 붙은 네 합의사항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가 핵심이다.
“③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④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북-미 정상회담 결과는 어떤가?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4개항에 합의했다. 첫손에 꼽은 것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이다. 이어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이다. 셋째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이고, 넷째는 미군 전쟁포로·실종자 유해 송환이다. 북한은 약속대로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인 지난 7월27일 미군 유해 55구를 미국 쪽에 인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닮은꼴인 판문점선언과 북-미 공동성명</font></font>눈여겨볼 건 따로 있다. 판문점선언과 북-미 공동성명의 유사성이다. 판문점선언 맨 앞에 등장하는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남북관계 개선·발전’은 북-미 공동성명 1항인 ‘평화·번영을 위한 새로운 북-미 관계’와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판문점선언 2·3항)은 북-미 공동성명 2항과 겹쳐진다. 북-미 공동성명이 세 번째로 언급한 비핵화는 판문점선언 3항에 딸린 합의사항에 포함됐다. 판문점선언과 북-미 공동성명의 핵심 내용은 사실상 똑같다는 뜻이다.
최고 지도자 간 정치적 합의사항을 문서로 정리하는 건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낱말 하나 선택하는 데도 협의와 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판문점선언과 북-미 공동성명의 순서는 △새로운 남북, 북-미 관계 △평화체제 구축 △비핵화로 이뤄졌다. 적대로 점철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면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3월5일 평양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와 관련해 밝힌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란 표현으로 비핵화 원칙을 밝히고, ‘군사적 위협이 없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이란 말로 그 조건을 제시했다. 미 외교·안보 전문매체 는 8월13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다짐을 밝히는 성명에 서명했다. 하지만 비핵화는 합의사항의 순서상 세 번째 단계다. 먼저 ‘새로운 북-미 관계’를 세우고, 미국과 ‘평화체제’를 구축한 뒤에야 비핵화로 갈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지금 미국 쪽에 합의사항 이행 순서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 협상은 매일이다시피 이어진다. 헤더 나워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8월9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미) 대화는 전화로도, 메시지로도, 전자우편으로도 이뤄질 수 있다. 대화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네 번째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 판문점을 통한 북-미 접촉도 이뤄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신경전’도 치열하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8월7일 에 출연해 “미국은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이행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비핵화 조처를 밟아나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은 이틀 뒤인 8월9일 대변인 담화를 내어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발사를 중지한 데 이어 핵시험장을 폐기하는 등 실제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취했지만, 7월 초 평양에서 진행된 1차 조-미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은 일방적인 ‘선 비핵화’를 고집했다. …조-미 수뇌회담(정상회담) 공동성명 이행의 선결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신뢰 구축을 위한 우리의 성의에 찬물을 끼얹고 대화 상대방을 모독하면서 그 무슨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삶은 닭알(달걀)에서 병아리가 까 나오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지난해 11월 말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와 함께 대화 노력에 시동을 걸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지난 4월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은 북한판 개혁·개방 선언으로 평가된다. 핵을 머리에 이고는 경제를 건설할 수 없다.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고는 본격적인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수 없다. 김 위원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종전선언은 새 협상의 시작</font></font>핵을 개발하던 북한과 핵을 가진 북한은 다르다. 상반기에 봇물 터지듯 이어진 한반도 정세의 역동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것도 ‘달라진 북한’을 정확하게 봤기 때문이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원칙’과 ‘순서’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북-미 협상의 마지막 단계인 ‘출구’에 놓여 있던 종전선언을, 이제는 협상의 문을 여는 ‘입구’에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비핵화를 통한 평화’에서 ‘평화를 통한 비핵화’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은 8월17일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종전선언의 채택은 역사적인 판문점 수뇌상봉(정상회담)과 싱가포르 조-미 수뇌회담에서 합의되고 내외에 공표한 문제로서, 조선반도의 긴장 완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선차적이고 필수적인 공정이다. 우리는 싱가포르 조-미 공동성명을 존중하고 성실히 이행하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조-미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미국은 응당 종전선언 채택 등 단계적이며 동시적인 행동 조치를 통해 호상 신뢰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종전선언이 채택되면 조선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되게 되는 것은 물론 세계의 안전보장에서도 획기적인 전진이 이룩될 것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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