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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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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쿠바

42년 만에 자유시장·사유재산권 인정 개헌 추진…

자영업자 등 법적 보호 강화할 듯
등록 2018-07-24 16:21 수정 2020-05-03 04:28
‘쿠바 혁명,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미겔 디아스카넬 신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가운데)이 7월17일 아바나에서 열린 상파울루 포럼 폐막식장에서 전임자인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제1서기(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쿠바 혁명,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미겔 디아스카넬 신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가운데)이 7월17일 아바나에서 열린 상파울루 포럼 폐막식장에서 전임자인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제1서기(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사회주의 나라 쿠바에서 자유시장과 사유재산권을 공식 인정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개헌이 추진된다고 쿠바 공산당 기관지 가 7월14일 보도했다.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76년 이후 42년 만의 일이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그의 나이 80살이던 2006년 7월31일의 일이다. 그의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가 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8년 2월24일 의장직을 공식 승계한 뒤 10년간 일했다.

5년 임기를 두 차례 채운 그는, 지난 4월 미겔 디아스카넬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1년 자신이 만든 고위 공직자와 당 간부의 임기 제한 규정에 따른 게다. 그의 나이 87살, 형 피델 카스트로를 떠나보낸 것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야반도주를 한 1959년 1월1일 아바나에 입성한 카스트로 형제의 ‘60년 집권’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구촌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권력승계다.

혁명 이후 세대의 집권

디아스카넬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은 1960년 4월20일 중부 비야클라라주의 플라세타스에서 태어났다. 쿠바 혁명 1년4개월여 뒤다. 그의 집권은 ‘혁명 이후 세대’가 쿠바 국정을 책임지게 됐음을 뜻한다. 라스비야스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1982년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했다. 그는 제대 뒤 1985년부터 모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공산당 활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엔 고향 비야클라라주 공산주의청년단 제1서기 자격으로 니카라과를 방문했다.

냉전 시절 미국의 철저한 봉쇄정책 속에 쿠바는 소비에트의 ‘호의’에 기대 경제를 유지했다. 소련은 국제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쿠바산 사탕수수를 수입했고, 국제 시세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에 원유를 수출했다. 소비에트 붕괴 직후 쿠바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처럼 쿠바에서도 1990년대를 ‘특별 시기’로 부른다.

위도가 높은 북한에선 당시 굶주림이 만연했다. 위도가 낮은 쿠바에선 그렇지 않았다. 단지 기후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쿠바에서도 ‘식량 위기’가 닥쳤지만, 당국이 유연하게 대처해 어려움을 넘겼다. 방식은 두 가지였다.

소련의 원유 공급에 힘입어 당시 쿠바 농업은 고도로 기계화된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원유 공급 중단은 농업 생산에 치명적 타격이 됐다. 그나마 농촌에선 굶주림이 없었지만, 도시에선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 무렵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민이 농촌으로 갈 수 없다면, 농촌을 도시로 가져오자.” 이제는 전설이 된 ‘쿠바 도시유기농(오르가노포니코)’의 시작이었다.

도시의 골목마다 작물이 자라났다. 채식 위주의 식단일망정 먹을거리 걱정은 사라졌다.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하고도 남게 됐을 때, 두 번째 개혁 조치가 이어졌다. 북한의 ‘장마당’처럼 쿠바에서도 동네마다 농산물 판매를 위한 소규모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을 사고팔며, 적은 금액이나마 ‘이윤’이 생겼다. 작지만, 크고 분명한 변화였다. 한번 뿌려진 변화의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2008년부터 연평균 2.4% 성장

‘특별 시기’의 한복판이던 1994년 디아스카넬은 비야클라라주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됐다. 그는 기사가 딸린 승용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지역을 돌며 주민을 만났다. 강력한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으로 부족함을 채웠다. 격정적 달변가인 피델과 달리 조용히 실무를 챙겼던 라울과 닮은꼴이다. 디아스카넬을 2009년 교육부 장관에 발탁한 것도 라울이었다. 이어 2013년엔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으로 지명됐다. 카스트로 형제의 뒤를 이을 ‘후계자’임을 공식화한 셈이다.

국가평의회 의장에 오른 직후부터 라울 카스트로는 ‘시장개혁’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침체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회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정부 공식 목표치인 4.4%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가 집권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쿠바 경제는 연평균 2.4% 성장률을 유지했다. 특히 2010년 개혁 조처 이후 식당부터 미용실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중심으로 자영업자가 수십만 명까지 늘었다.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는 노력도 배가됐다. 이번 개헌으로 자영업자와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법적 보호가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새 헌법 초안을 만들기 위한 개헌위원회는 라울이 직접 이끌었다. 디아스카넬은 위원으로 참여했다. 라울은 2021년까지 공산당 제1서기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공산당 제1서기와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시에 맡지 않는 것도 디아스카넬이 처음이다. 위원회가 제출한 개헌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올해 안에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새 헌법안에도 중앙계획경제와 국영기업이 쿠바 경제의 버팀목이란 점이 명시됐다. 쿠바 공산당도 유일한 합법 정당의 지위를 유지할 게다. 그럼에도, 쿠바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인 2016년 3월20일 쿠바를 방문했다. 1928년 존 캘빈 쿨리지 대통령 이후 88년 만에 아바나를 방문한 첫 미국 현직 대통령이다. 미국과 쿠바는 라울 집권 이후 관계 정상화 협상을 본격화했다. 교황 프란치스코까지 나서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점차 미국인의 쿠바 여행 제한이 느슨해졌고, 쿠바계 이민자의 본국 송금 제한도 조금씩 풀렸다.

미국은 2015년 4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제외했다. 제재 해제가 이어졌다. 그해 7월1일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와 외교관계를 전면 복원한다고 발표했다. 1959년 혁명 이후 56년을 이어온 ‘쿠바 봉쇄정책’이 끝났음을 뜻한다. 질긴 악연이 그리 쉽게 끝날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정책이 급격히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16일 쿠바에 대한 조건 없는 제재 해제 정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수교 이후에도, 쿠바-미국 관계 정상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쿠바의 개혁·개방도 그렇다.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주축이 돼 라틴아메리카 좌파 진영의 연대체로 꾸려진 ‘상파울루 포럼’의 제24차 연례회의가 지난 7월15일 아바나에서 열렸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등 3명의 현직 국가수반을 비롯한 650여 명의 각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7월17일 폐막식이 열린 아바나 국제회의센터에 라울 카스트로가 입장하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환영하며 “비바 피델”(피델 만세)을 외쳤다. 는 카스트로 형제의 혁명 동지인 호세 라몬 마차도 벤투라 공산당 제2서기장의 폐막사를 따 이렇게 전했다. “패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시적 후퇴가 있을 뿐이다. 불의가 있는 곳에서, 혁명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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