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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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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려야 겨우 숨쉬는 땅

인도-파키스탄 영토분쟁지역 카슈미르 현장 르포

인도 정부 탄압에 맞서 생업과 미래를 걸고 폐업 시위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등록 2016-11-24 13:44 수정 2020-05-03 04:28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카슈미르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독립을 요구했다. 인도령 북부 카슈미르에서 인도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매일 오전 9시 이들은 마을 곳곳에 스며들어 주민들을 경계한다.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카슈미르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독립을 요구했다. 인도령 북부 카슈미르에서 인도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매일 오전 9시 이들은 마을 곳곳에 스며들어 주민들을 경계한다.

광주에서, 자카르타(인도네시아)에서 또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에서 민간인으로 살아온 지난 32년간 경험해본 적 없는 보안검색과 삼엄한 군 경비. 인도 서북부 접경지대 잠무카슈미르 주도 스리나가르의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이다.

인도 점령 카슈미르를 방문한 민간인은 누구나 모두 여덟 번의 짐 검색, 신원 확인과 함께 군인이 가슴과 허리께를 더듬는 불쾌한 몸 검색을 네 번 경험한다. 아기 기저귀와 약병, 카메라 렌즈까지 열어 보여줘야 인도 군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북부 카슈미르 출신 인도인 기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카슈미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거대한 감옥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거대한 감옥”</font></font>

전세계에서 가장 큰 무장지대인 카슈미르 분쟁의 역사적 기원은 1846년 힌두왕국의 지배로 거슬러 올라간다. 1차 앵글로-시크 전쟁(1845∼46)에서 시크 왕국이 패한 직후 마하라자 굴라브 싱(1792∼1857)이 세운 도그라 왕조가 현재의 잠무카슈미르주의 첫 힌두 집권세력이다. 인도 역사학자 시디크 와히드는 남아시아 지역 분쟁을 여성의 관점에서 기록한 책 (Garrisoned Minds, 2016)에서 “잠무카슈미르주 분쟁의 첫 번째 역사적 층위는 19세기 초 아프가니스탄 등 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부흥 물결을 견제하기 위해 지역을 통합해 하나의 주를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영국 식민정부는 제정 러시아, 중국 청왕조, 중앙 유라시아 세력과의 패권 경쟁 중 특히 러시아를 의식해 이슬람 부흥 물결이 일던 이 지역을 지배한 힌두왕조를 지원했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지역의 패권 경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유구한 역사와 연대가 단절됐다고 말한다. 지금의 타지키스탄,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파키스탄의 히말라야 고원과 아름다운 계곡을 자유롭게 오가던 5세기 카슈미르 역사가 중국-인도 국경선, 파키스탄-인도 전쟁 뒤 그어진 통제선(Line of Control)으로 모두 막혀 고립됐다는 것이다.

지난 10월24일부터 29일까지 엿새 동안 목격한 인도령 카슈미르 중부와 북부의 한낮 주요 거리는 시민보다 군인이 더 많은 ‘무장지대’였다가 밤이 되면 군인이 사라진 거리에 시민들이 북적이는 ‘민간인 지역’이 되었다.

스리나가르 국제공항부터 중심가인 모울라나아자드 거리까지 이동하는 11km 구간은 100~500m 간격으로 긴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 주택가 골목길도 마찬가지다. 텅 빈 버스정류장은 군인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한창 바쁠 낮 시간 주요 상점은 모두 셔터를 내렸다. 시내버스도 택시도 없다. 길가에 선 이들은 이동 수단이 없어 지나가는 자가용을 히치하이킹하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낮에는 가게문을 열지 않는다.” 스리나가르 중심 랄초크에서 만난 작은 슈퍼마켓 주인 압둘 마지드가 말했다. 셔터를 반만 연 채 가게 앞에 서서 군인들이 지키는 텅 빈 거리를 바라보던 마지드는 인도 군인과 인도 정부의 카슈미르인 탄압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잠무카슈미르주의 중심이자 여름 수도인 스리나가르 일대에서 카슈미르인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게문을 굳게 닫은 채 일제히 ‘폐업 시위’ 중이다. 스리나가르뿐만 아니라 남쪽 겨울 수도인 잠무 부근 정글과 동쪽 카르길, 북쪽 통제선 인근 쿠프와라 산골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지역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11월17일 현재까지 131일째다. 단 약국, 병원, 빵집, 노점은 예외다.

대신 일주일 중 사흘은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만 상점들이 문을 열고, 시내버스와 택시가 정상 운행한다. 군인들이 퇴근하고 거리에서 사라지는 시간이다. 입김이 서리던 2016년 10월 마지막주, 약 690만 명이 살고 있는 인도령 카슈미르 분지는 해가 진 뒤에야 활기와 북적임, 교통체증이 되살아났다. 이 폐업 시위에 동참할 수 없는 스리나가르 공무원교육원 행정학 교수 쿠르시드 울 이슬람 같은 공무원들은 출퇴근길 곳곳에 진을 친 군인들을 볼 때마다 더없이 무기력하고 씁쓸해졌다. “40년 넘게 겪어왔어도 한결같이 보기 싫지만 나 혼자 뭘 어쩌겠나.”

<font size="4"><font color="#008ABD">부르한 와니의 죽음 이후 </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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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나가르에서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중심지 무자파라드로 향하는 인도 1번 국도는 플라타너스, 사과나무, 호두나무가 우거진 가을 들판을 가로지른다. 인도군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라서 폭이 넓고 노면이 깨끗하다. 이 도로가 지나는 거의 모든 마을에 공공보안법(Public Security Act)과 군대특별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이 적용된다. 이를 근거로 시위 중 영장 없이 체포되거나 진압경찰 총을 맞고 ‘전사한’ 사람들의 사연이 있다.

길가에 닫힌 상점 셔터 위와 도로 위에 적힌 각종 구호가 이방인에게 ‘시위 중’인 카슈미르 분지 상황을 전해준다. ‘Azadi’(우르두어로 ‘자유’를 뜻함), ‘We want freedom’(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Go India go back’(인도는 돌아가라), ‘We are not Pakistan, we are not India’(우리는 파키스탄도 아니고 인도도 아니다)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Burhan town’(부르한 구역), ‘Our pride Burhan Wani’(우리의 자존심 부르한 와니)라는 문구도 종종 볼 수 있다.

카슈미르 역사상 가장 길고 조용한 이 시위는 무장독립군 히즈불 무자히딘 사령관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21)의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애도다. 부르한 와니는 은신주의를 고수하던 전통 무장독립군들과 달리 소셜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인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퍼뜨렸다. 히즈불 무자히딘에 젊은 전사가 급속히 늘어나며 ‘부르한 현상’이 일기도 했다. 그는 인도군의 추적·체포 대상 0순위였다. 부르한 와니는 7월8일 카슈미르 남부 아난트나그에서 인도군에게 사살당했다. 그의 장례식에 20만 명의 추도객이 모여들었다.

카슈미르중앙대학 셰이크쇼우캇 후세인(국제법) 교수는 “분리·독립주의 정치인이나 무장반란군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한 적이 없는 카슈미르 역사를 돌아볼 때 유례없는 일”이라며 이 긴 시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리나가르 외곽 나우감에 사는 소년 무카람 쿠르시드(13)는 7월 둘쨋주부터 넉 달째 학교에 가지 않았다. 부르한 와니가 죽고 사흘 뒤부터 학교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사촌형제들과 함께 선생님 집으로 가서 공부해야 한다.” 매일 학교에 안 가면 하루 종일 따분하겠다는 물음에 공부 스트레스는 여전하다고 했다. 쿠르시드의 또래 사촌 여동생은 과외 대신 집에서 자습을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침묵하는 자, 모두 점령 동조자야”</font></font>

“카슈미르 사람들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골이 났다. 식량이든 교육이든 뭐든 말이다. 혹독한 겨울, 인도의 탄압과 고립정책에 적응한 결과인데 델리 사람들은 일주일도 못 버틸 것이다.” 스리나가르 시내에 사는 세 딸의 아빠 알타프 아흐마드(45)가 말했다.

은행에서 일하는 그와 교사인 아내 나심(40)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뜨거운 눈차이(소금을 넣은 카슈미르식 밀크티)가 차가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열변을 쏟아냈다. 1989년 카슈미르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된 뒤부터 스리나가르에서 극장이 완전히 사라졌고, 친독립 성향 정치적 리더가 떠오르면 포섭, 가택연금 또는 살해하는 것이 인도가 카슈미르에 한 ‘짓’이라고 했다. 인도 정부가 1948년 유엔과 합의한 카슈미르 독립청원투표 약속을 깡그리 무시할 때부터 카슈미르인들은 자기 땅에서 난민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카슈미르인들은 일반인도 직업정치인처럼 큰 목소리와 빠른 말투로, 기승전결을 갖춰 정확한 단어를 선택해 논증하는 식으로 말했다. 최소 30분 동안 그들이 쏟아내는 열변을 경청해야 대화의 틈이 생긴다. 고향, 직업, 나이, 교육수준을 막론하고 하나같이 인도 점령 역사의 시초로 돌아가 2016년 오늘에 이르는 구술 일대기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잠무카슈미르 지역 영자일간지 (Rising Kashmir) 편집장 슈잣부카리의 말처럼 카슈미르에서 “지난 26년 세월을 설명하자면 최소 26시간이 걸릴 것”이다. 슈잣부카리가 강조한 내용은 △1947년 10월부터 시작된 인도 카슈미르 점령의 불법성 △60만 명에 이르는 카슈미르인 사망자와 실종자 △1989년 시작된 무장독립투쟁과 인도군의 인권유린 및 조직적 성폭행 △2008∼2010년 여름마다 반복된 집회와 시위 등이다.

2016년 추가된 내용은 부르한의 죽음과 이후 거리시위 중 진압경찰이 쏜 공기총에 의한 사상자 1만5500여 명, 실명 피해자 1천여 명, 구금자 9천여 명, 16주 동안 통행이 금지된 주요 이슬람 사원 3곳과 넉 달째 불통인 2G·3G·4G 통신 서비스,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다.

카슈미르 사람들은 이런 현실 앞에 침묵하는 국내외 개인과 조직, 언론, 국가는 모조리 인도의 카슈미르 ‘점령 동조자’로 분류한다. 이들이 지금 파키스탄과 중국을 고맙게 생각하고 기억하려는 이유는 인도 정부의 카슈미르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유일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카슈미르 문제 해결을 위해 파키스탄-인도 대화를 중재한다면 트럼프라도 지원할 것이다.” 카슈미르 지역 영자주간지 (Kashmir Life) 3년차 기자 리아즈 울 칼리크는 국제사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로 인한 고립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주민 열망 외면한 정치세력 </font></font>
인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청년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의 죽음 이후 카슈미르 주민들은 길고 조용한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문 닫은 가게(왼쪽)와 폐업 시위로 텅 빈 거리를 지키는 노점상.

인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청년 부르한 무자파르 와니의 죽음 이후 카슈미르 주민들은 길고 조용한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문 닫은 가게(왼쪽)와 폐업 시위로 텅 빈 거리를 지키는 노점상.

지역 정당과 의원들은 입을 모아 “무력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시민들의 열망에 반하는 입장을 고수하거나 반인도 정서에 기대어 정치적 지분을 챙기기에 바쁘다. 10월28일 스리나가르 당사에서 만난 집권여당 민중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청년조직위원장 와히드 우르레흐만 파라(28)는 “카슈미르 독립청원투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핵무장국이라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슈미르 독립청원투표는 카슈미르 주민들이 4세대를 이어온 내내 지속된 강력한 열망이다. 2016년 시위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다.

민중민주당은 ‘잠무&카슈미르에서 이슬람교와 인도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와의 세속적 공존을 위해’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과 연합을 구성했다. 2014년 주의회 선거에서 크게 승리하고 메흐부바 무프티 사이드 총재가 잠무카슈미르 주장관 자리를 차지했다. 당 스스로 이 연합을 ‘정치적 희생’이라고 표현하지만 카슈미르인들은 ‘배신’이라고 조롱한다.

자신을 ‘선출된 분리주의자’(elected separatist)로 소개한 무소속 셰이크 압둘 라시드 재선 의원은 10월25일 만남에서 “카슈미르 주권을 찾는 것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해방·독립 카슈미르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지역구가 있는 북부 카슈미르 지역에서 자행되는 인도군의 조직적 성폭행에 대해 묻자 “그 문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를 급히 매듭지었다.

10월24일 스리나가르 당사에서 만난 국민회의당(National Conference) 쇼우캇미르는 “국민회의당이 초안을 작성하고 발의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델리 정부와 협의한 끝에 통과된 잠무카슈미르 자치구 안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며 당의 지난 공치사에 열을 올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도부 없이 주민들이 이끄는 싸움</font></font>

국민회의당은 카슈미르 독립운동가 셰이크 압둘라가 1932년 창당한 잠무카슈미르무슬림총회의(All Jammu and Kashmir Muslim Conference)를 본령으로 하는 카슈미르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현재는 야당이지만 1947~53년, 1977~87년, 1996~2002년, 2008~2015년 집권했다. 셰이크 압둘라 가문이 대를 이어 당과 주정부 요직을 차지해왔다. 이 당이 60년 묵은 카슈미르 분쟁에 책임이 있는 정치적 기득권이라는 뜻이다.

매주 ‘폐업 시위 달력’을 발행해 카슈미르인들의 분리·독립 열망을 조직적으로 대변할 수 있게 지원하는 후르리야트(Hurriyat) 지도부도 정치적 묘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후르리야트는 ‘모든 정당들의 후르리야트 회의’(All Parties Hurriyat Conference)의 줄임말이다. 1993년 조직돼 카슈미르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지속해온 여러 단체의 연합체다. 6년째 가택연금 중인 후르리야트 리더 셰이드 알리 샤 길라니는 최근 델리에서 찾아온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상이 후르리야트 리더십에 주목하고 기대하는데 정작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난감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슈미르대학 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카슈미르 학생운동 대표 알라 파즐리는 “2016년 카슈미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도자나 배후 세력 없이 친독립 강경주의자가 되어 자발적으로 생업과 미래를 걸고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민주화운동의 현장으로 보면 맞다”고 리더 없는 투쟁 상황을 요약했다.

<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스리나가르(인도)=이슬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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