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트 할리스칸은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 브랑엘슈트라세에서 28년간 운영하던 채소가게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가 세 들어 있는 건물을 매입한 부동산 회사가 최근 이 건물을 고급 주택으로 개조해 팔 계획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근처에 있던 작은 채소가게가 3군데나 문을 닫았다. 길거리에 큰 고급 식당이 생기는 대신, 동네에 활기를 주는 작은 가게들이 없어지면 곤란하죠.” 동네 주민 산드라 크라이슬러의 말이다. 할리스칸 채소가게의 단골 주민들이 모여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종로구 삼청동에도 베를린 도심에도
독일 대도시들이 임대료 폭등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009년 이후 6년 새 베를린의 주택 임대료는 46% 올랐다. 세계적 부동산 회사인 ‘존스랑라살’(JLL·Jones Lang LaSalle)에 따르면 베를린의 평균 집세는 2005년 5.5유로(1m²)에서 2014년 9유로로 1.6배 올랐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베를린 중심가의 가난한 세입자들은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고급 주택들이 채운다. 가난한 대학생과 예술가가 모여 살면서 대안문화를 형성하고 나면, 자본이 몰려들어 이들을 몰아내는 식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마포구 상수동 등에서도 나타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수년간 베를린 도심에 살던 터줏대감들이 외곽으로 쫓겨났다. 프렌츠라우어베르크, 미테 지역은 이미 고급 카페, 갤러리, 유기농 상점이 점령했다. 빈곤층 거주지역이자 우범지대로 악명 높던 노이쾰른 지역도 지난 6년 사이 임대료가 2배 폭등해 고급 주택이 점점 늘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끝자락에 와 있다.
유럽 경제위기로 인한 저금리 정책이 이를 부채질했다. 은행에 맡겨둔 자산의 가치 하락을 걱정한 유럽 투자자들이 독일 대도시의 부동산으로 몰려든 탓이다. 독일 역사에 없던 이례적인 부동산 열풍 현상이 일어난 배경이다. 통일 직후에도 베를린 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약간 꿈틀대다가 말았다.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임대주택이 충분히 공급되고, 대도시와 지방이 골고루 발달해 있어 특정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이 드물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특정 산업이나 금융이 발달한 도시가 아니어서 베를린 시민들은 오히려 가난한 편에 속했다. 실업수당을 받는 시민도 다른 도시보다 많다. 그런데 부동산 열풍이 불면서 베를린이 갑자기 관광도시가 됐다. 가난한 세입자가 떠난 자리엔 고급 펜션 등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 못하는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독일 정부와 의회가 나섰다. 지난 6월1일부터 베를린에서는 ‘집세 상승 제한법’이 시행됐다. 신규 임대차 계약 때 집주인이 집세를 지역 평균보다 10%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2013년 연방 총선거 때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기민련과 사민당이 대연정 협상에서 합의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기존 세입자의 거주 기간 동안 과도한 임대료 인상을 금지하는 법안이 있었는데, 이를 신규 계약에도 적용한 것이다. 이제 건물 주인들은 주택 리모델링과 신규 입주를 빌미로 임대료를 마구 올릴 수 없게 됐다.
민간에 임대주택 매각이 폭등의 원인그러나 할리스칸의 채소가게는 이 법안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건물 전면 수리나 새로 지은 주택 임대료에 대한 규제는 제외돼 있기 때문이다. ‘집세 상승 제한법’이 시행돼 부동산 시장의 과열 현상은 당분간 주춤해질 전망이다. 그러나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 임대료는 분명히 다시 오를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같은 임대료 규제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세입자들이 모여서 스스로 방어에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베를린 지역 세입자연합 단체인 ‘코티운트코’(Kotti und Co)가 대표적이다. 크로이츠베르크 코트부스토어 지역은 최근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단기간에 폭등한 곳 중 하나다. 원래 터키 이주민이 주로 거주하던 이곳에는 사회임대주택인 아파트가 많았다. 그런데 2000년대 초부터 베를린 시가 부채 탕감을 목적으로 사회임대주택을 매각하면서 말썽이 생겼다. 민간 기업이나 개인의 손에 넘어간 사회임대주택 임대료가 폭등한 것이다. 도심지에는 고급 주택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세입자들은 임대료를 내지 못해 강제퇴거를 당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은 2011년 ‘코티운트코’를 결성했다.
코트부스토어 지하철역 앞에는 ‘작은 집’이 하나 있다. 코티운트코 회원들이 모여서 임대료 인상을 막을 대책을 세우는 곳이다. 세입자들은 매일 돌아가며 집을 지키고, 서로 정보를 나눈다. 지난 4년 동안 공청회, 거리시위, 캠페인 등을 벌였다. 지난해 5월부터는 코티운트코를 포함해 베를린 지역의 세입자연합 단체 20여 곳이 힘을 합쳐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라는 연대 모임을 만든 뒤 주민투표를 청원했다. 지난 4월 초부터 사회임대주택 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입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여 4만8541명의 서명을 끌어내기도 했다. 주민투표 발의를 하는 데 필요한 2만 명의 서명을 훌쩍 넘어선 폭발적인 호응이었다. 현재 시민단체가 제안한 입법안이 시의회에서 통과하면 주민투표가 진행된다. 하지만 시의회가 이를 거부하면, 입법안을 주민투표에 부칠 것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을 내년부터 다시 진행할 수 있다.
베를린(독일)=글·사진 한주연‘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 활동가 슈테판 융커
주민투표 발의 서명운동을 벌인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에서 활동하는 시민활동가인 슈테판 융커(26)를 만나 베를린 주거운동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그는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 모임에서 기획과 언론 담당 업무를 맡고 있다.
세입자 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가 있나.
영국 런던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는데, 1년 만에 임대료가 훌쩍 뛰었더라. 깜짝 놀랐다. 6년 전 베를린에 왔을 때는 월 270유로를 내고 학생들과 공동아파트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350유로로 임대료가 올라 있었다. 노이쾰른 지역도 완전히 동네가 변했다.
세입자 주민투표 운동이 큰 호응을 얻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만큼 현재 베를린의 저소득층 주택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베를린시 정부가 사회임대주택을 민간에 매각하면서 시민의 신뢰를 잃었다. 많은 세입자가 비싼 임대료 때문에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토로하고 우리에게 ‘도와줄 일이 없느냐’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혀오고 있다.
‘베를린 세입자 주민투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운동의 방향은 무엇인가.
원칙은 사회임대주택 관련 정책을 베를린시 정부가 혼자 결정할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서 ‘세입자 주민투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저소득층은 물론 평균소득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이 베를린에서 주거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베를린에는 저렴한 임대주택이 12만 채 정도 부족하다. 새로운 세입자 법안을 통해 중기적으로 주택 5만 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베를린시 소속 주택공사 설립 관련 법을 제정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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