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고도 2670m의 차메의 비탈진 곳에 세워진 지프형 차량 화물칸에 올라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네팔인. 이들은 지진 발생 뒤 멀리는 고도 4020m의 야크카르카로부터 밤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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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5일 네팔 히말라야 지역 마낭 마을에 아침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2년 전 수도 카트만두에서 교류했던 스님을 만나려고 카키사원을 찾았다. 3600m 고지대에 자리한 천년 고찰은 고즈넉했다. 스님과 환담을 나누는데 사찰이 요동쳤다. “지진이네.” 스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일본에서 몇 번 지진을 경험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스님, 나가셔야겠는데요!” 비상문으로 향하자 젊은 라마승들이 이미 황급하게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찰 건너편에서 보이는 안나푸르나에는 눈사태가 안개처럼 일고 있었다. 건조지역에선 돌들이 굴러 뿌연 먼지가 가득했다.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여진 걱정으로 뒤척이다가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길을 나섰다. 하산 도중 휴대전화기를 켜니 한국 외교부에서 메시지가 왔다. “여진에 주의하십시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메시지를 보내 60~70개가 도착했다.
지진 소식은 지인들에게서도 속속 들어왔다. “카트만두와 포카라 사이에서 진도 7.9 규모로 첫 지진 발생. 이후 여진이 2시간30분간 계속 일어났음.” “카트만두 서부 고르카 지역이 피해가 제일 심함. 카트만두 시내 건물이 무너져 사람들이 갇혀 있음. 1600명 사망자 발생, 부상자는 수천 명.” ‘고르카? 고르카!’
<noscript>모든 게 무너진 곳, 그곳은 나의 고향입니다① 1. 하룻밤 묵고 갈 숙소의 방을 얻을 수 있는지 온갖 근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432. 사진 뒤편으로는 거대한 산사태 지역이다. 이로 인해 지프차도 더 이상 운행이 불가능하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623. 방전된 휴대전화의 전원을 연결한 채 지진 소식을 검색하고 있다. 이날 한방에서 8~9명이 쪽잠을 잤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434. 피해가 심해 주거공간이 없는 산악마을 주민들이 빗속에 짐을 챙겨 아랫마을로 이동하고 있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62</noscript>
며칠 전 전통 소주를 놓고 대작했던 네팔인은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 고르카에 꼭 방문해달라고 말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직선거리로 100km 정도이지만 산을 돌아가면 통상 4~5일이 걸린다. 지도로만 봐도 험난한 지형이다. 그러나 카트만두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분명 가깝다. 그래, 지진의 진앙지 고르카로 가자. 고르카는 1768년 24개의 독립 왕국을 최초로 통일한 프리트비 나라얀 샤 왕이 태어난 곳이다. 나라를 통일했던 왕국의 수도라지만 작은 산골마을이다.
4월27일 아침 7시 차메 마을. 천막이 쳐져 있는 공터 주변으로 네팔인 30여 명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모여 있다. 고르카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향 마을이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멈추고 밤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지프차 운전사는 평소 500루피인 교통비를 비상사태라며 2500루피(약 3만원)로 올리겠다고 했다. 낙석을 피해 험한 길을 달리는 것치고는 저렴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달 급여가 5천∼8천루피인 이들에겐 엄청난 폭리다. 항의가 빗발쳤고 2시간 만에 차가 출발했다.
이른 아침부터 대기하느라 변변하게 먹지도 못한 상태라 허기가 느껴졌다. 카메라 가방 속에 든 초콜릿 생각이 간절하지만 차를 세우기도 혼자 먹기도 난감해서 꾹꾹 참고 있는데, 구멍가게 앞에서 잠시 차를 세운다. 얼른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 뒷좌석의 여자에게 아무거나 사라고 했다. 내가 사는 것보다 두세 배 더 많이 네팔 라면을 사왔다. 함께 나눠먹고 허기를 달랬다.
오전 10시30분 지프차 4대에 나눠 출발한 일행은 오후 6시에야 베시사하르에서 여장을 풀었다①. 모두 휴대전화에 매달려 지진과 고향 소식을 검색한다③. 네팔 정부는 4월28일부터 사흘간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지만, 베시사하르에선 음악이 울려퍼졌다. 살아 있다는 표현이고 슬픔을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방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새벽 4시 여진이 왔다. 비명 소리에 놀라 중요 장비만 챙겨 문을 열다가 손톱이 잘려나갔다. 여진은 1~2분 만에 잠잠해졌지만 다들 잠을 청하지 못하고 먼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아침 6시 고르카행 버스에 올랐다. 가로질러 가면 가까운 거리지만 높은 산이 가로막아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굼레를 지나 카트만두 방향으로 달리던 버스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타이어 교체를 기다리는 모습이 다들 초조해 보였다.
전날 과자를 나눠먹었던 친구들이 오이를 사서 반으로 잘라 준다. 그러고 보니 다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타이어를 교체한 뒤 지누우리로 향했다. 먼지 낀 창밖으로 지진의 진앙지임을 확인시켜주듯 무너진 건물과 벽에 금이 간 건물들이 하나둘 보였다. 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②. 남자들이 내려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길을 걸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트랙터를 탔지만 길은 험했다. 주검을 운구하는 행렬과 마주쳤다. 부상자를 업고 아랫동네로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④. 일행은 동요했고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noscript>모든 게 무너진 곳, 그곳은 나의 고향입니다②5. 지진 발생 4일째 아침. 체념한 표정이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5306. 무너진 집터 옆에 나뒹굴고 있는 단란한 모습의 기념사진.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437. 하루 종일 식사도 못하고 강행군해 발루와에 도착한 뒤 허름한 식당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허기를 달래고 있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62</noscript>우려했던 비가 내렸다. 먼 산을 보니 검은 구름이 자욱했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배낭이 비에 젖었고 몇몇이 비닐을 뒤집어썼다.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더 이상 갈 수 없어 민가 천막에서 비를 피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린 지 1시간. 족히 20kg이 넘는 대나무 바구니를 등에 진 여자들이 기어이 출발한다. 이제부터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다. 산사태 지역을 뛰어서 통과했다.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40~50분을 걸어 도착한 발루와 마을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배낭을 내리자마자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가랑비 속에서 부서진 집을 손질하고 쓸 만한 물건을 건지는 사람들이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왔다⑤⑥. 성한 건물이라고는 약국뿐이었다. 철근 다리가 있는데 교각이 무너져 건너갈 수 없었다. 일행 몇몇과 차오면(채소와 면을 기름에 볶은 요리)을 먹는데 한 사람이 내게 충고했다⑦. “내일 돌아가는 게 좋겠다. 지금 아주 위험하다.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한숨이 나왔다.
진심 어린 걱정은 이어졌다. 그들도 길이 이렇게 끊긴 줄 몰랐다고 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란다. 이곳 780m 고지에서 2천m가 넘는 산을 올라갔다가 하산해서 다시 2500m 고지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린다. 고산에서 나고 자라 폐활량이 크고 온갖 추위에 단련된 이들이 하루 종일 걸어도 도저히 갈 수 없는 먼 거리다. 비까지 내리니 더욱 그렇다. 암담했다. 내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자 허무함이 몰려왔다.
그때 산타가 나타났다. “내일 서너 시간만 더 갔다가 돌아가면 어떨까? 우리 마을까지는 내가 안내하겠다.” 산타 바두르 구릉(32)은 자신의 고향인 포카리까지 가자고 권유했다. 고마웠다. 그래, 여기까지 아무도 오지 않은 길을 온 것만으로 만족하자. 처음부터 일행의 고향과 가족을 보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렇게 정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noscript>모든 게 무너진 곳, 그곳은 나의 고향입니다③1.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해 할 말을 잃고 만 산타 바두르 구릉. 그의 가족이 먼발치에서 아무 말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522. 마치 폭격을 당한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다. 네팔 정부는 재건 비용으로 100억달러(약 10조8천억원)가 소요될 것이라고 밝혔다.originaldate 1/1/0001 6:00:00 AMwidth 1000height 628</noscript>
날이 밝자 하나 둘 길을 떠났다. 걸음이 느린 여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건장한 남자가 맨 마지막에 빗속에서 손을 흔들며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가슴이 먹먹했다. “행운을 빈다, 행복하길!”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일행이 모두 떠나고 산타와 나만 남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산타가 맥주 한 병을 다 마시더니 출발하자고 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불안해졌다. 자기 집이 걱정되는가보다. 나도 서둘렀다.
갈라지고 비탈진 벼랑길을 걸었다. 앞장선 산타는 돌이 구르지 않게 조심했다. 뒷사람을 배려하는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길을 따라 두어 시간을 더 오르자 산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향 마을이 저만치서 보인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헉헉거리며 나는 바짝 뒤쫓았다. 그가 고향의 부모와 처자식을 만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서 만난 여인이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마을 상황을 설명했다. 작은 몸집의 산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This is my house). 그가 등산 스틱에 턱을 괴고 말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무너지다 만 담장에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뒤쪽에는 그의 가족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①.
마낭에서 포카리 마을까지의 여정
포카리 마을은 지진의 진앙과 가까워 피해가 컸다. 100가구 500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 6명이 죽고 15명이 다쳤다. 고르카 지역 전체로 따지면, 주민 약 28만 명 중 사망자가 400여 명, 부상자가 1만여 명으로 추산됐다. 이 지역 산골마을 대부분은 도로가 끊겨 접근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작은 마을의 피해 상황은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는 비교적 탄력 있는 목조 건물인 사찰에서 지진을 느꼈기에 그리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진앙지 부근의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지진 규모의 강력함과 11km의 얕은 진원이 1차적 원인이었고, 지진에 취약한 건물이 피해를 증폭시켰다. 산악지대에서는 철골구조나 시멘트로 집을 짓기 어렵다. 도로가 있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악지대의 주택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쪼개어 납작하게 만들고 진흙으로 쌓는 게 일반적이다. 돌집들은 지진으로 우르륵 어이없이 무너져내렸다. 게다가 산악지대에선 구호와 구조물품도 헬기에 의존해야 한다.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상황이다②.
4월30일 떠나는 날, 산타가 그의 아내와 함께 뒤따랐다. 돌아가라고 하는데도 발루와 마을에서 구입할 것이 있다고 우겨댔다. 대형 산사태가 났던 그 철근 다리 앞에 도달했다. 이별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타를 부둥켜안았다. 가난한 사람의 온기가 전해졌다.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6년을 타지에서 일해 번 돈(330만원)으로 지은 두 채의 집, 지은 지 25일 만에 무너진 그의 집을, 내 카메라를 팔아서라도 다시 튼튼하게 지어주리라.
글·사진 신동필 사진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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