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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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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황혼, 크림에 깃들다

크림 사태는 미국·서방 일극 체제의 쇠퇴 징후
“러시아 제재” 공언하지만 에너지·금융 의존도 커 실효 의문 
등록 2014-03-29 17:07 수정 2020-05-03 04:27

교두보 크림반도 흑해 위에 맹장처럼 매달린 크림반도가 유라시아대륙의 가장 오래된 지리적 요충지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서양에서 지중해 에게해로 이어지는 물길이 내륙 가장 깊숙이 도달하는 곳이 여기이며, 만주 백두산에서 대싱안링산맥과 몽골고원을 거쳐 알타이산을 지나는 아시아 유목민의 말발굽이 한달음에 도달하는 곳이 여기다. 헤로도토스 시절부터 이곳은 스키타이인들의 발길과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가 섞여 있었고, 비단길과 함께 유라시아대륙 양쪽을 연결해주는 ‘초원길’의 시작 지점이었다. 14세기 유럽을 완전히 초토화한 ‘흑사병’ 또한 중국에서 시작돼 이곳을 거쳐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들어간 것일 확률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지중해에서 들어온 ‘해양 세력’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했고, 또 반대로 내륙에 자리잡은 ‘대륙 세력’이 지중해와 서아시아로 밀고 들어오는 교두보가 되기도 했다. 13~14세기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이곳을 놓고 암투를 벌였으며, 16~17세기에는 칭기즈칸의 후손이 이곳에 세운 크림 칸국이 내륙의 슬라브인들을 노예로 잡아 오스만제국에 팔아넘기는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강성해진 러시아가 이곳을 병합한 뒤에는 러시아 함대의 몇 안 되는 ‘얼지 않는 항구’가 되었고, 이를 출구로 삼아 러시아가 지중해 연안에까지 세력을 펼칠 것을 두려워한 다른 나라들의 집중적인 타격 지점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크림전쟁이 그 결과였다. 이렇게 대륙과 해양의 접점으로 ‘교두보’라는 점에서 한반도와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지배계급의 망원경, 지정학 19세기 말까지 세계 정치는 유럽 국가들끼리의 ‘세력 균형’ 정치였다. 유럽 내부 국가들끼리 힘의 계산에 따라 아프리카와 남미에 영토 경계선이 생기기도, 또 식민지들이 주인을 바꾸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되자 이제 세계 강대국들의 무대는 완전히 온 지구가 된다. 이에 강대국 지배 세력들은 지구와 세계지도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망원경, 즉 사고의 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필요를 맞춰준 것이 당시 독일과 영국 등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 즉 ‘지정학’이었다. 영국의 해퍼드 매킨더 교수가 제시한 ‘심장부 지역 이론’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의 ‘섬나라’ 해양 세력으로서는 세계를 지배하려면 반드시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해야만 한다. 유라시아대륙의 지리적 구조를 볼 때, 그 중심인 중앙아시아의 ‘심장부’(Heartland) 지역을 장악한 세력은 주변의 해안 지역 어디로든 한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유리함을 가지게 되며, 따라서 유라시아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심장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인 동유럽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후에 ‘테두리 지역(Rimland) 이론’과 결합된다. 인구밀도와 물자 생산 문화의 발전과 유통 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 밀집 지역은 모두 대양과 접한 테두리 지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위협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 나온 대응 전략은, 아시아와 유럽의 테두리 지역을 철저히 미국의 영향 아래 두어 심장부 지역을 먹은 공산주의 세력이 뻗어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 전략의 기초가 된 저 유명한 조지 케넌의 ‘봉쇄’(Containment)이다.

완충국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처럼 ‘가깝고도 먼 나라’가 또 있을까. 두 나라 모두 중세기 동유럽의 강력한 도시국가 공동체인 ‘키예프 루시’(Kievan Rus’)를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달리 러시아혁명 직후에야 국가를 세우게 되고 그나마 곧바로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고 만다.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을 극도로 망쳐놓는 일들이 생겨난다. 세계적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1930년대 스탈린의 농업 집산화 과정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고, 스탈린 정권은 이에 식량 배급 거부로 대응했던바(적어도 우크라이나 쪽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1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인위적인 기근’으로 굶어죽고 말았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와 공산당에 대한 악감정은 극에 달했기에 히틀러 군대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이들을 ‘해방군’으로 맞기까지 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4년 새로이 공산당의 총수가 된 흐루쇼프는 이러한 감정의 골을 메운다는 이유로 엉뚱한 조치를 취한다. 1654년 크림반도의 영토 병합 300주년을 맞아 이를 우크라이나에 ‘선물’해 그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당시 그가 만취한 상태였다는 둥 그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서 그랬다는 둥 소문이 무성했지만, 어차피 ‘소련이 망하지 않는 한’ 크림반도가 어디 땅이 되든 별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실제 ‘소련이 망하는’ 일이 벌어졌고, 우크라이나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완충국가가 돼버린다. 우선 우크라이나가 자체 인구 4600만 명의 작지 않은 나라이고 러시아의 뒤를 이어 유럽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인데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자연적 경계 없이 평지로 연결돼 있어 러시아로 보자면 반드시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되도록 보장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흑해의 함대 중심지로 흐루쇼프의 오버액션 때문에 졸지에 남의 땅이 돼버린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부터 빌려써야 하는 처지이니 이는 더욱 절박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갈수록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2004년 이른바 ‘오렌지 혁명’ 이후 친러시아 세력은 계속 궁지에 몰리고 있으며,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은 하나같이 친서방, 친북태평양조약기구(NATO) 노선을 표방해온 것이다. 2014년 2월, 다시 한번 친러 세력의 수장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시위대에 의해 축출됐다. 러시아로서는 이제 행동할 때가 온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겁박하는 군사행동과 동시에 ‘억울하게’ 빼앗긴 크림반도를 되찾아야 할 때다.

‘평화 배당금’의 귀결 군사국가 소련은 결국 미국의 경제력에 패배했다.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이 밀어붙인 이른바 ‘제2 냉전’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1990년대의 세계는 미국과 서방의 ‘일극 체제’로 전환된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화’를 만들어낸 자본의 흐름도 함께 쥐고 있었다. 중국은 아직 성장 중이었고, 러시아는 자본주의로의 전환 과정을 겪으며 지극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미국과 유럽은 이제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지정학과 군사적 갈등은 19세기 이야기일 뿐, 지구촌은 지구화된 경제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안정된 21세기로 들어섰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었다. 국제적 갈등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미국과 서방의 압도적 군사력이 존재하는 한 이를 뒷배경으로 한 여러 조약과 국제적 레짐의 형성을 통해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으로 들어섰다는 게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생각이다. 따라서 전쟁과 지정학적 경쟁에 쓸 자원과 노력을 경제에 쏟아 모두가 번영을 누리는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의 시대가 왔다는 거였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서 이러한 낙관주의는 크게 흔들렸다. 먼저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 스스로가 적극적인 전쟁국가로 다시 변모해 이곳저곳에서 전쟁을 벌였고, 다자주의를 근간으로 한 여러 질서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비록 압도적인 군사력은 여전히 미국에 있지만, 그 힘이 모든 나라가 합의할 수 있는 평화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거라는 믿음은 근본부터 흔들렸다. 게다가 미국과 서방의 경제적 우위 또한 2008년의 경제위기를 통해 위태롭게 되었다. 자본과 세계 시장의 흐름 및 역동성은 미국과 유럽에만 일방적인 이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신흥 시장국들은 착실하게 혹은 정신없이 성장해왔고, 미국과 유럽은 ‘지구적 불균형’에 휘말려 대외적으로 또 대내적으로 심각한 재정 및 금융 위기에 아직도 붙들려 있는 상태다. 대신 러시아의 푸틴 체제는 몇 번의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국내적으로도 공고하게 구축되고 있다.

러시아의 조치에 맞서 미국과 유럽은 호기롭게 경제제재를 선언했지만, 이것이 과연 힘을 발휘할지는 많은 이들이 의심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란이나 북한처럼 경제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선 지금 유럽연합(EU)이 러시아와 행하는 무역은 그 규모도 엄청나거니와, 그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은 가장 결정적 자원이라 할 석유와 가스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것에 바쳐지고 있다. 벌써부터 무역제재에서 석유는 제외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독일을 위시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를 대체할 만한 활로를 빠른 시간 안에 찾아낼 수 있을지는 심히 의문이며, 결국 제재 조치 효과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천연자원뿐만이 아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죽 쑤고 있는 영국의 런던 금융가는 러시아의 ‘올리가키’들이 불법 자금 세탁 등의 목적으로 가져오는 엄청난 자금의 흐름에 결정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영국 정부는 이런 무역제재 조치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것을 굳건한 내부 방침으로 정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지정학의 복수인가 한때 많은 이들이 ‘세계는 평평하며’, 지정학의 시대는 끝났으며, 대신 ‘황금 구속복’의 시대가 온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서방의 정치가와 학자, 언론이 그토록 경악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캐플런 같은 이는 이번 러시아의 병합 조치를 ‘지정학의 복수’라고 본다. 비록 서방 쪽도 러시아 쪽도 군사적 충돌은 없을 거라고 말하고는 있으나, 이번 사태를 두고 2001년과 2008년이라는 두 시점과 연속선을 그어본다면, ‘평화 배당금’을 가능케 했던 미국과 서방의 압도적 우위가 소멸된 미래 세계가 그 연속선의 소실점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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