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은 흔히 ‘현대판 노예제도’로 불린다. 장시간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서도, ‘무급’이란 접두어를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접두어가 ‘유급’으로 바뀌면 처지가 조금 나아질까? ‘취업’이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지구촌 젊은이들이 ‘고난의 행군’으로 내몰리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한 대학생의 참담한 죽음은 그 극단적인 사례다.
인턴, 현대판 노예제도
모리츠 에르하르트(21)는 경영학을 전공하는 독일 대학생이다. 내년에 졸업을 앞두고 투자은행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그간 ‘스펙’을 열심히도 쌓아왔다. 에르하르트가 경력관리 전문 인터넷 사이트 ‘시슬로닷컴’에 올려놓은 자료를 잠시만 훑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독일 남서부 프라이부르크 출신인 에르하르트는 발렌다 지역의 사립 오토바이스하임경영대학에 재학 중이다. 고교 시절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을 할 정도로 성실했다. 스스로 ‘호기심이 많다’고 밝힌 그는 지난해 미 미시간대학교 경영학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미 쌓은 이력도 화려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회계·조세 분야 자문업체인 스위스의 ‘KPMG컨설팅’을 비롯해 모건스탠리와 도이체방크 기업금융 부문 등 3개 업체에서 인턴 생활을 했단다. 그런 그가 올 여름방학에 선택한 곳은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BAML) 런던 지점이었다.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런던 금융가에서 7주간의 인턴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에르하르트는 희망에 들떴을 터다. ‘처우’도 나쁘지 않았다. 은 “에르하르트의 급여 수준이 한 달 2700파운드(약 470만원)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성실한 청년은, 그야말로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턴 생활이 6주차로 접어들면서,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지난 8월15일, 사흘 연속으로 새벽 6시까지 일한 에르하르트는 택시를 잡아 타고, 런던 동부 베스널그린 지역에 자리한 클레어대일 기숙사로 향했다. 그곳 기숙사에만 런던 금융가에서 일하는 인턴 300명가량이 머무르고 있단다.
금융권 인턴들 사이에선 이른바 ‘마법 원형교차로’란 은어가 잘 알려져 있단다. 새벽에 퇴근한 인턴은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택시를 건물 밖에 대기시켜놓은 인턴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곤 다시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또 다른 ‘긴 하루’의 시작이다. 는 8월22일치에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금융권 인턴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샤워만 하고 곧바로 일터로
“길어야 7~10주 정도면 끝난다. 그 정도 기간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인턴 대부분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카페인 채워가며, 사무실을 뛰어다닌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잠재적 보상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급여 수준이 워낙에 높은, 좋은 일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점을 다들 잘 알고 있다.”
‘마법’도 소용없었다. 8월15일 새벽 퇴근한 에르하르트는 다시 출근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8시30분께 낮 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동료 인턴이 샤워부스에 쓰러져 있는 에르하르트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의 심장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은 경찰 관계자의 말을 따 “정확한 사망 원인은 부검을 해야 알 수 있지만, 현재로선 타살 의혹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일부에선 “에르하르트가 가벼운 간질 증세가 있었는데, 피로가 겹치면서 발작을 일으켜 숨진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 그가 간질을 앓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금융권 취업 준비생들이 즐겨 찾는 블로그 ‘월스트리트 오아시스’에 올라온 글을 종합하면, 에르하르트가 인턴 기간 내내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허덕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금융권 인턴 모두가 긴 시간 근무하지만, 특히 투자은행 부문의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새벽 3~4시에 퇴근하는 게 다반사란다. 에르하르트 역시 투자은행 부문에서 일했다. 숨지기 전 사흘 동안은 꼬박 하루 21시간씩 일에 매달렸다. 클레어대일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또 다른 인턴은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숨지기 전 2주 동안 에르하르트는 8차례나 꼬박 밤을 새워 일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일에 몰두하다가 결국 몸이 버텨내지 못한 것 같다.”
영국 의학전문 매체 은 지난해 7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 매체가 34개 선행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확보한 약 200만 명의 사례를 분석해보니, 밤샘 근무를 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견줘 심장마비·뇌졸중 위험이 무려 41%나 높게 나타났다는 게다. 이 매체는 “수면 부족과 밤샘 근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런 결과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BAML 쪽은 인턴 기간 동안 에르하르트가 하루 평균 근무한 시간을 묻는 등 영국 언론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이 회사 존 맥카이버 홍보담당 이사는 성명을 내어 이렇게 밝혔다. “에르하르트의 사망 소식에 깊은 충격과 슬픔을 느꼈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앞날이 기대되는 대단히 부지런한 젊은이였다. …부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사인을 둘러싸고 떠돌고 있는 소문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업체 쪽의 ‘평가’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에르하르트는 동료 인턴들 사이에서 ‘슈퍼스타’로 불렸다. 한 동료 인턴은 “모두들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 일을 했지만, 에르하르트보다 열심히 일하는 인턴은 없었다. 정말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는데다 성격까지 좋아서, 동료 인턴들 사이에서 인기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금융권 인턴의 처지는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터넷 매체 는 8월20일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에서 인턴 생활을 했다는 한 대학생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1주 120시간 노동은 예사
“일주일에 7일 일했다. 할 일이 많을 때는 새벽 5~6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그래도 오후 5시쯤 일이 끝난 날도 있긴 하지만, 주중에는 단 한 번도 밤 10시 이전에 퇴근해본 적이 없다. 10주의 인턴 기간 내내, 휴일은 단 이틀뿐이었다. …인턴을 뽑는 면접 자리에서 업체 쪽에서 물었다. ‘장시간 일할 준비가 돼 있느냐’고. 그게 일주일에 100~120시간을 뜻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애꿎은 죽음에도, 세상을 잘도 돌아간다. 는 8월22일치 1면 기사에서 “2년간의 공백 끝에 노무라증권·시티그룹·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럽에 진출한 투자은행들이 신규 자산운용 인력 채용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위기로 자산운용 인력이 줄줄이 해고됐음에도, 그간 유럽의 투자은행들은 전산요원 등 업무지원 인력을 제외하고는 신규 채용을 중단해왔다. ‘일자리’가 저기 보이기 시작한다. 인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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