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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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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명 사망…다른 말 필요없이 ‘학살’

쿠데타 6주 만에 친무르시 시위대 유혈진압한 군부… 비상사태 선포하며 무바라크 정권 시절로 성큼
등록 2013-08-21 11:50 수정 2020-05-03 04:27

지난 8월14일 이른 아침, 해가 뜨고 채 2시간도 되지 않아서다. 시계는 아침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동부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라바 알아다위야 사원 부근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위용 스피커에선 연신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알라후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시다.’
비슷한 시각, 도시 반대편 나일강 서안의 고대도시 기자에 자리한 카이로대학교 앞 알나흐다 광장에서도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라바 사원과 나흐다 광장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한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지난 7월3일을 전후로 벌써 6주째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이 반군부 연좌농성의 거점으로 삼아온 곳이다.

한 달 남짓 만에 벌써 세 번째

군부가 임명한 아들리 만수르 임시대통령 정부가 친무르시 시위대에 ‘자진 해산하지 않으면 무력 진압할 수밖에 없다”고 을러대기 시작한 것도 벌써 보름이다. 중무장한 군과 경찰이 장갑차와 불도저까지 동원해 포위한 두 곳 광장에선, 막 아침기도를 마친 시위대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햇살로 달궈지기 시작하는 광장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경고 방송’조차 없었다. 맨 앞에 섰던 군용 불도저가 갑자기 육중한 몸뚱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랍 위성방송 등이 전한 현장 화면을 보면, 잿빛 블록으로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는 맥없이 무너졌다. 불도저는 망설임 없이 농성용 천막을 덮쳤다. 돌진하는 중장비에 맞서 시위대는 막대기며 돌멩이 따위를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탕탕’, 이윽고 총성이 울렸다.
한번 시작된 총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장갑차 위에 올라탄 병사들은 도망치는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규모가 조금 작았던 나흐다 광장의 농성장은 ‘작전 개시’ 2시간 남짓 만인 아침 8시45분께 ‘상황 종료’됐다. 라바 광장에선, 저항이 좀더 길게 이어졌다.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빼앗긴 이들이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땅뙈기다. 그것마저 폭력으로 앗아간 게다. 핏빛으로 변한 거리는 그렇게 중무장한 군인들에 점령당했다.
처음엔 50여 명이라고 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는 군경도 많다고 했다. 사망자와 부상자 통계는 갈수록 늘어만 갔다. 이집트 보건부가 8월16일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면, 두 광장의 시위 진압과 온 나라를 휩쓴 항의시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모두 578명까지 치솟았다. 부상자도 최소한 3500명에 이른단다. 이쯤되면 달리 말할 길이 없다. 학살이다. 임시정부 외교담당 부통령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이날 사임서를 제출했다.
군부의 학살극은 처음이 아니다. 무르시 대통령 축출 이후 한 달 남짓 만에 벌써 세 번째다. 지난 7월8일에도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공화국수비대 본부 건물 앞에서 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질을 해대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7월27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7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일부 외신은 “희생자들의 주검을 보면, (도망을 치다가) 등에 총상을 입은 이가 많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는 전혀 다른 보도를 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등에 총을 맞고 숨진 이는 단 1명이다. 나머지는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고 전했다. 조준 사격을 했던 게다.

30년 유지됐던 비상사태 다시 등장

시위대를 무참히 짓밟은 다음 수순은 뭘까? 만수르 임시대통령은 8월14일 오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날부터 한 달 동안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아침 6시까지 전면 통행금지령도 내려졌다. 해당 지역은 카이로·알렉산드리아·기자·수에즈·이스마일리아 등 모두 14개 주다.
비상사태가 선포되면, 군과 경찰의 권한은 그야말로 막강해진다. 누구든 붙잡아다 얼마든지 가둬둘 수 있다. 집회·결사의 자유는 제한할 수 있고, 언론 검열도 가능해진다. 무바라크의 독재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다. 이집트 내무부는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543명의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를 불법 시위와 무기 소지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 초기이던 1958년 ‘이집트아랍공화국 법령 제162호’로 제정된 국가비상사태법의 최대 수혜자는 ‘은퇴한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1981년 10월 전임자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선포됐던 비상사태는 2011년 2월 시민혁명으로 무바라크가 축출될 때까지 30년 세월 동안 유지됐다.
무바라크 축출 이후에도 비상사태는 이어졌다. 이집트에서 국가비상사태가 해제된 것은 혁명 뒤 1년4개월여가 흐른 지난해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다. 혁명 뒤에도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던 최고군사위원회(SCAF)는 비상사태 해제를 발표하면서 “비상사태가 해제되더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가를 보위해야 하는 군 본연의 임무를 계속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게다.
앞서 만수르 대통령은 8월13일 이집트 27개 주 가운데 18개 주 주지사를 새로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주지사 가운데 11명은 군 장성 출신, 2명은 경찰 고위 간부 출신이다. 이로써 현직 주지사까지 포함하면, 27명의 주지사 가운데 19명이 군경 출신으로 채워지게 됐다. 무바라크 정권 역시 군경 고위 인사들에게 지방정부를 맡기는 방식으로 충성 경쟁을 부추겼었다. 만수르 임시대통령은 새 주지사 임명 사실을 발표하면서, ‘치안질서 유지와 엄격한 법 집행’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나일강 서쪽 소하그 주지사로 임명된 무함마드 오스만 아테크는 2011년 혁명 당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위대에게 권총을 겨누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카이로 주지사에 임명된 가말 무스파타 사예드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 집권여당의 고위직을 지냈다. 이 밖에도 무바라크 정권을 적극 옹호하며 무르시 정권에 극렬 반발했던 판사 출신 2명도 주지사로 임명됐다.

‘시시는 무바라크다’

무바라크 정권에 이어 무르시 퇴진 투쟁에 적극 나섰던 인권운동가 알라 압드 엘 파타는 주지사 임명 소식이 전해진 직후 트위터에 “시시는 무바라크다”란 글귀를 올렸다. 무르시 정권 붕괴의 기폭제 노릇을 했던 ‘타마로드’(반란) 운동을 이끌었던 활동가 하산 샤힌은 과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앞선 두 정권에 맞서 싸운 이유는 똑같다”며 “혁명 이전에 이미 무능력하거나 부패한 것으로 확인된 인물들에게 지방정부를 맡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무르시 대통령도 쿠데타로 축출되기 불과 보름 남짓 앞선 지난 6월16일 17개 주 주지사를 새로 임명했었다. 이 가운데 11명이 무슬림형제단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 조치는 ‘무르시 정권이 이집트를 형제단화하려 한다’는 대중적 우려에 불을 지폈고,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는 기폭제 노릇을 했다. 이번엔 어떨까?
지난 8월4일 카이로형사법원은 최고지도자 무함마드 바디에 등 무슬림형제단 지도부 6명에 대한 재판 일정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들은 무르시 정권 막바지였던 지난 6월28일 카이로의 형제단 본부 건물 앞에서 벌어진 유혈충돌 과정에서 숨진 시위대 8명에 대한 살인교사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첫 공판은 8월25일로 예정돼 있다.
카이로형사법원은 8월17일 무바라크 전 대통령과 그의 두 아들 알라·가말 등 4명에 대한 재심을 속개한다. 애초 무바라크는 지난해 6월 첫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재판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법원이 지난 1월 재심을 허용한 바 있다. 무라바크는 2011년 1월 ‘카이로의 봄’ 당시 800여 명의 시위대 학살을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무바라크 정권과 무르시 정권, 둘 사이의 차이는 뚜렷해 보인다. 쿠데타와 학살극에 이어 비상사태까지 선포된 터다. 지금 이집트 군부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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