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을 하려면 환자를 마취해야 한다. 마취약이 없으면 수술을 할 수 없다. 이란의 병원들이 줄줄이 수술실 문을 닫고 있는 이유다.
“마취에 앞서 사용하는 근육이완제와 이소플루란 등 마취제를 구할 길이 없다. 마취약품의 공급 부족이 이어진다면, 조만간 수술실 문을 닫아걸 수밖에 없다.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하면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영국 일간지 은 지난 3월18일치에서 이란 테헤란대학교 의과대학 관계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무함마드 메흐디 키야마트 이란 마취학회 회장은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마취제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마다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이제는 생산이 중단된 마취제까지 사들일 정도”라고 말했다.
암환자·에이즈감염인들도 비상
마취제뿐이 아니다. 이란 보건부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해마다 이란에선 약 8만5천 명이 새로 암 진단을 받는다. 이들은 통상 약물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하는데, 약품이 부족해 초기 치료가 늦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단다. 각각 8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혈우병 환자와 선천성 악성빈혈 환자 역시 지혈제와 데페록사민 등 철분 제제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단다. 2만3천여 명으로 알려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이즈 감염인들이 처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건가?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에 대한 유엔 차원의 경제제재는 2006년 12월 통과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1737호를 통해 시작됐다. 이어 제1747호(2007년)·제1803호(2008년)·제1835호(2008년)·제1929호(2010년) 등 결의가 이어질 때마다 제재 수위는 더욱 높아졌다. 이와는 따로 미국은 2005년 6월 조지 부시 대통령의 행정명령 제13382호를 통해 이란 경제를 옥죄기 시작했고, 유럽연합(EU)도 2007년 4월부터 독자적인 제재에 들어갔다.
경제제재는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첫째, 외국 업체와 금융거래를 하기 어려워졌다. 둘째, 달러·유로화 등 국가 간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경화’를 구하기 더욱 어려워지면서 이란의 리알화 가치가 급락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 윌슨센터는 지난 3월 초 내놓은 ‘이란의 경제제재와 의약품 공급 부족 사태’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의약품과 식량 등) 인도적 물품 수입에 대한 제재 유예 조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화 부족으로 의약품 수입 자체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란 쪽에선 (인도) 루피화나 (한국) 원화, (중국) 위안화 등으로는 얼마든지 지불이 가능하다고 강조하지만, 국제거래는 기본적으로 달러화나 유로화로만 이뤄진다. 2012년에만 이란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수입한 의약품이 전년에 견줘 20% 이상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다행히 충분한 경화를 확보하더라도, 금융거래 제한에 따른 어려움을 피해갈 순 없다. 이란 최대 의약품 공급업체인 ‘다루 파크쉬’의 나세르 나그디 대표는 과 한 인터뷰에서 “외국 약품회사와 수입계약을 체결하더라도 대금을 지불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 상태”라며 “계좌에 수입대금을 입금하더라도 송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출업체 쪽에선 의약품을 선적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대엔 이라크가 된서리
상황이 이렇다보니 터키 국경을 통해 당나귀로 운반되는 밀수 의약품이 갈수록 늘고 있다.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란 수도 테헤란의 나세르코스로 거리에는 이렇게 유입된 밀수 의약품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돼 있을 정도란다. 값은, 이미 정상가의 2배 이상 뛴 상태다.
경제제재가 인도적 위기로 이어진 ‘전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한 직후부터 13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혹한 경제제재로 고통받은 이라크가 대표적이다. 1999년 유니세프가 내놓은 이라크 어린이·임산부 사망률 관련 보고서는, 장기간 이어진 경제제재로 보건·의료제도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990년 제재가 시작된 이후 이라크에선 예방접종을 통해 막을 수 있는 각종 질병이 100%가량 폭증했다. 제재 여파로 식량 부족 사태가 이어지면서 1996년에 이르면, 5살 미만 어린이 가운데 11%가 영양실조에 허덕였다. 출산 도중에 숨지는 산모는 10만 명당 294명까지 늘었고, 전체 신생아의 24.7%가 미숙아로 태어났다. 전체 어린이 사망 원인의 70%가량이 호흡기 감염 등인데 약품만 있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었다.
잠재 매장량으로 따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제2위의 원유 보유국인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 무렵 1천달러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유니세프는 보고서에서 “이라크가 1990년부터 1998년까지 사회부문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다면, 약 50만 명의 어린이가 5살 생일을 넘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는 2003년 3월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해제됐다.
지난 2월6일 ‘이란 위협 감소와 시리아 인권 향상을 위한 법률’(2012년)이 발효됨에 따라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지난 2월6일 이란에 대한 추가 제재 조치에 나섰다. 이에 따라 이란 중앙은행의 국제 금융거래 제한이 더욱 강화됐고, 외국 금융기관에 예치된 이란의 원유 수출대금에 대한 접근도 차단됐다. 일부에선 “이란 정부가 제재를 피하기 위해 의약품 부족 사태를 부풀리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란이 의약품 부족 사태를 겪고 있는 것은 (의도적으로 의약품 수급을 어렵게 만든) 이란 정부의 책임”이란 게다.
“인도적 물품 공급 늘려 신뢰 구축부터”
“이란 핵 문제를 풀려면 단계별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비핵화를 위한) 이란의 행동이 나올 때마다, 그에 맞춰 제재 수위도 낮출 필요가 있다.” 미 외교안보 전문단체 ‘애틀랜틱위원회’는 이란과 이른바 ‘P5+1’(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독일)의 제5차 핵협상을 하루 앞둔 4월4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 단체는 이어 “협상의 진척을 위해선 식량·의약품 등 인도적 물품 공급 확대를 통한 신뢰 구축 과정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아흐메드 샤히드 이란 인권담당 특별보고관은 지난 2월28일 유엔 인권이사회에 출석해 비슷한 주장을 내놨다. 샤히드 보고관은 “포괄적인 경제제재는 자칫 인도적인 재난으로 번져갈 수 있다”며 “(핵 프로그램 중단이란) 제재의 목적에 걸맞게,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인 문제와 관련된 물품에 대해선 과감하게 제재를 풀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워싱턴 여객기 추락 10시간 만에…소방당국 “생존자 0명 추정”
문형배 “블로그 원문 읽어보시죠”…국힘 색깔론 정면반박
추락 미국 여객기, 수온 1.7도 얼음강으로…“15분 내 의식 잃어”
국힘, 헌재 권위 훼손해 ‘탄핵심판 불복’ 노골화…민주 “반국가적”
미군 블랙호크 마지막 교신…충돌 전 “여객기 보입니다”
1월 31일 한겨레 그림판
장병을 짐짝처럼 싣는 대한민국 군대…“바꾸자” 청원 5만명
미국 여객기-헬기 충돌…67명 추락한 강 ‘수온 1.7도’ 구조 어려움
50년 전에 인간이 갔던 달, 왜 다시 못 가나
“미국 워싱턴 여객기 추락 현장에서 주검 30구 이상 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