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살인은 안돼, 나이지리아에서도

나이지리아 군부독재와 결탁해 고문·살인 등 개입 의혹으로 미국 ‘해외 불법행위 피해자 구제법’ 소송당한 로열더치셸
등록 2012-10-13 14:30 수정 2020-05-03 04:26

미 합중국이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776년 7월4일이다. 젊은 공화국은 진취적이었다. 이를테면, 1789년 합중국 의회가 통과시킨 ‘해외 불법행위 피해자 구제법’(ATS)이 그렇다. “연합 하급법원(1심)은 합중국이 체결한 국제조약을 포함한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해 외국인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관할권을 지닌다.” 당시로선, 이례적인 행보였단다.

독립 이후 ATS에 따른 소송 많지 않아
입법 취지와 배경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은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게리 허프바우어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은 2003년 펴낸 관련 보고서에서 “ATS의 목적은 외국 정부에 (신생 독립국인) 미국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외교·상업 행위에서 국제적 관례를 준수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1789년부터 1980년까지, ATS에 따른 소송이 미 법원에서 제기된 건 단 두 차례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년 가까운 긴 동면에서 ATS를 깨운 사건은 1980년의 이른바 ‘필라르티가 대 페나-이라라’ 사건이다. 미 연방항소심 제2순회재판부가 다룬 이 사건의 원고는 미국 거주 파라과이인 2명이었다. 피고는? 군사독재 정권에서 원고들을 고문했던, 미국 거주 파라과이 경찰 간부였다. 1심 법원은 “외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가한 불법행위에 대한 재판 관할권은 미국 법원에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ATS가 국제법에 따른 두 외국인 간의 소송 관할권을 미 법원에 부여했으며, 국제법과 유엔인권선언이 불법행위로 규정한 고문에 대해서도 미 법원이 재판 관할권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는 게다. 이 사건은 ATS를 ‘인권수호의 보루’란 새 지평으로 이끈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미국에서도 영업 중인 다국적 정유업체 로열더치셸은 1990년대 나이지리아 남동부 오고니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개발 사업을 벌였다. 1994~95년 현지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격화했고,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 과정에서 현지 인권활동가 등 8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60여 개 마을에서 3만여 명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당시 시위 주도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인권활동가 가운데 바리넴 키오벨이란 인물이 있었다. 사건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그의 부인 에스더 키오벨은 2011년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ATS에 따라 로열더치셸을 미국 법원에 고소했다. 셸 쪽이 나이지리아 군부독재와 결탁해 고문·살인·강제이주 등 불법행위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게다. 이른바 ‘키오벨 대 로열더치셸’ 사건이다.
주류 언론에선 거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이 사건은 미 대법원이 심리를 속개한 지난 10월2일 우연찮은 기회에 빛을 보게 됐다. 이날 ‘살인 합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PALM) 등 미 인권단체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가 담긴 인터넷 사이트를 링크한 전자우편을 셸 임직원 7만1010명에게 보냈다. 전자우편 제목은 ‘살인은 나쁘다, 심지어 나이지리아에서도’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회사 직원 상당수가 답신을 보내왔다. “어떻게든 참여해 돕고 싶은데, 관련 정보 접근을 회사가 차단했다”는 게다. PALM 쪽은 성명을 내어 “선거자금 기부와 관련해선 개인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던 셸 경영진은, 살인사건과 관련해선 ‘기업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ATS에 따른 소송 당사자 자격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며 “대체 무엇이 두려워 직원들의 인터넷 검열까지 벌인 것이냐”고 질타했다.

간단한 사안, 만만찮은 파장
지난 200년 세월, 미국은 지구촌의 ‘인권 지킴이’ 노릇을 자처해왔다. 사안은 간단하다. 파장은 만만찮다. ‘합중국의 양심’이 걸렸기 때문이다. <afp>은 10월2일 “미 대법원이 이른 시일 안에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적어도 내년까지는) 심리가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눈여겨볼밖에.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fp>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