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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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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나치 테러의 악몽

이주민 살인 11건이 신나치 테러조직 소행으로 밝혀져 충격에 빠진 독일… 불안에 떠는 이주민들 사이로 멀어진 통합의 꿈
등록 2011-11-30 19:12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2009년 11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진보적 사회단체와 정당 소속 활동가와 시민들이 신나치즘에 반대하는 맞불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

» 지난 2009년 11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진보적 사회단체와 정당 소속 활동가와 시민들이 신나치즘에 반대하는 맞불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아이들과 전철을 타고 가던 중 독일 여자한테 이유 없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아이와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담배꽁초가 날아오는 겁니다.” 지난 7월 말 독일 한인 사이트 (www.berlinreport.com)에 올라온 사연이다. 동독 지역 중소 도시 마그데부르크에 사는 이 한국인 여성은 그날 독일 여성에게 폭행을 당해 입안이 찢어져 피가 나는 부상을 입었다. “두 아이가 우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독일 유력 주간지 에도 보도된 이 사건의 피해자는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독일에서 공식 통계상으로 극우 폭력의 빈도는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가끔 겪는 일이긴 하지만 외국인들은 길을 가다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을 듣기도 한다. 반인종주의 단체 ‘아마데우 안토니오 재단’에 따르면, 1990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극우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모두 182명이다. 독일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는 47명에 불과하다.

10년간 11명 살해한 극우테러조직

독일에 신나치 테러의 악몽이 돌아왔다. 지난 10년간 미결 사건이었던 살인사건 11건이 신나치 테러조직의 소행임이 최근 밝혀졌다. 일명 ‘국가사회주의지하’(NSU)라는 이 테러조직의 조직원 3명이 수면에 드러난 것이다. 이 신나치 테러조직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터키인 8명, 그리스인 1명, 독일 여경 1명을 살해했다. 범행 지역은 독일 전역에 퍼져 있다. 그전까지 독일 내 테러 관련 뉴스는 이슬람이나 극좌파에 대한 것이어서, 극우 테러조직의 존재 자체에 독일 사회가 경악하고 있다. 독일은 1990년 로스토크에서 망명자 보호소를 신나치들이 방화한 사건이 전세계의 매스컴을 타며 극우 폭력이 판치는 나라로 낙인찍힌 바 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 ‘나치’란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독일에 이번 사건은 치명적이다. 독일 유력 주간지 는 법치국가로서의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는 사건이라고 논평했다. 일주일 넘도록 매일 이 사건이 머리기사를 장식하며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방송에서도 극우 폭력에 대한 보도와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독일 정부는 극우 신나치주의자 5600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독일의 여름 동화’라 불릴 만큼 성공적이었던 2006년 독일 월드컵의 이미지는 도루묵이 되는 건가. 원죄처럼 붙어다니던 나치 독일의 이미지를 벗고, 자유롭고 관대한 이미지로 세계에 어필하던 참이었다. 독일 월드컵 당시 이미 3세대에 이른 터키 이주민들도 독일 국기를 몸에 두르고 환호했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독일은 자유, 민주, 통합의 모범이 되는 나라로 비쳤다. 동유럽 쪽에서 극우가 득세한다는 소식이 들려도, 노르웨이에서 엄청난 극우 살상 테러가 벌어져도 남의 나라 일이었다. 독일에도 극우당이 있지만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지지율이 낮고, 극우 테러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내무부 장관이 “독일에는 극우 테러 위험이 없다”고 단언한 게 불과 4개월 전이다.

신나치 테러조직에 의한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 지역은 마약 밀매와 성매매가 공공연히 일어나는 저소득층 이주민 밀집거주지역이다. 이 때문에 경찰들은 마피아의 소행이라는 전제를 깔고 수사했다. 2004년 쾰른의 뮐하임 지역에서 폭탄이 터지며 22명이 부상당했을 때도, 언론에서는 쿠르드족 테러조직인 PKK의 소행이거나 범죄집단 간 갈등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은 평범한 소상인들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 가족과 지인들이 극우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렸어도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보기관 돈이 극우정당 지원금으로?

사건의 실체가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경찰이 11월4일 옛 동독 지역 도시 아이제나흐 슈파르카세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사건 용의자를 추격하면서부터다. 용의자인 우베 문트로스(36)와 우베 뵌하르트(36)는 도주하다 자살한 채 발견됐다. 같은 날 사건 현장에서 약 180km 떨어진 도시 츠비카우의 한 주택이 불탔는데 이 주택이 은행강도들의 은신처로 드러났다. 폭파된 주택에서는 테러와 살인을 고백하는 장면을 담은 DVD, 연쇄살인 희생자들의 사진 등이 발견됐다. 만화영화 를 도용·편집해 만든 15분짜리 선전 영상도 발견됐다. 이들이 남긴 비디오 화면에 새겨진 글귀가 섬뜩하다. “국가사회주의지하의 강령은 말 대신 행동이다. 현재의 정치·언론·표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우리의 행동은 계속될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주택을 불태워 증거를 없애려 했던 공범 베아테 체페(36)가 자백해 드러났다.

이 사건은 독일 정계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독일 정보기관 연방안전기획부의 과실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3년, 연방안전기획부에서 극우그룹에 심어놓은 스파이 때문에 극우정당인 독일민족당(NPD)을 금지시키려는 정부의 시도가 무산된 바 있다. 독일민족당에서 간부를 지내며 ‘요주의’인물로 꼽혔던 이가 사실은 연방안전기획부의 스파이였던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엠니트’에 따르면, 독일인 43%가 연방안전기획부가 극우 테러조직의 존재를 알면서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간 은 11월21일치 사설에서 연방안전기획부의 과실을 지적하며 “연방안전기획부는 신나치들을 관리하려고 신나치 스파이에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그 지원금이 극우정당의 각 지방 당사가 설립되고 신나치들이 즐겨 듣는 음악 콘서트를 여는 데 쓰였다”고 한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독일의 치욕”이라고 개탄했고, 법무부 장관은 독일민족당 금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여야 정당들은 극우 테러 연쇄살인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있다. 법무부는 “희생자 가족들에게 국가가 손해배상하겠다”고 밝혔다.

“치밀한 네트워크 갖춘 듯”

하지만 독일에 사는 이주민들의 반응은 차갑다. 독일 이슬람협회는 이 사건을 두고 “이해할 수 없고 충격적”이라고 논평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터키 이민자 휘세인 외즈맨(35)은 “이번 사건을 보면 극우 범행이 치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냉정하게 계획된 끔찍한 범행이 수년간 밝혀지지 않다가 우연히 발견되다니 믿을 수 없다.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나”라고 불안해했다. 독일의 1천만 이주민 통합의 미래는 더 어두워졌다.

베를린(독일)=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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