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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vs 1968

반제국주의·뉴미디어 공통점 있지만 경제 상황·저항 주체 상이한 68혁명과 월가 시위… 자본주의 근본을 문제 삼고 지구촌 동시다발로 번지는 2011년 시위는 68혁명을 재현할까
등록 2011-10-18 17:46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10월15일 뉴욕과 런던, 파리 등 전세계 도시를 동시에 뒤덮은 시위의 풍경을 보면서 누군가는 43년 전 68혁명을 연상했을지 모른다. 일단 거리 풍경만 보면,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거리에는 대학생이 주류였다면, 2011년 10월 뉴욕 거리를 채운 군중(사진)의 직업군은 훨씬 다양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 지난 10월15일 뉴욕과 런던, 파리 등 전세계 도시를 동시에 뒤덮은 시위의 풍경을 보면서 누군가는 43년 전 68혁명을 연상했을지 모른다. 일단 거리 풍경만 보면,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거리에는 대학생이 주류였다면, 2011년 10월 뉴욕 거리를 채운 군중(사진)의 직업군은 훨씬 다양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68년 1월8일, 프랑스 체육청소년부 장관인 프랑수아 미소프는 파리 낭테르대학을 찾았다. 이 대학의 새 수영장 완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행사가 끝난 뒤 대학을 떠나려던 장관은 한 떼의 학생들과 마주 섰다. 학생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가운데 빨강머리의 한 학생이 걸어나와 장관에게 물었다. “담뱃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장관은 불을 건네줬다.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인 학생은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뿜더니 말을 이었다. “장관님, 청년 문제에 관한 당신의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600쪽짜리 보고서에 청년의 성 문제에 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더군요.” 장관은 학생들에게 스포츠를 장려해주려고 낭테르에 왔다고 답했다. 학생은 재차 힘주어 말했다. “왜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느냐고요?” 흥분한 장관이 말했다. “자네는 분명 성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 나로서는 제발 수영장에 뛰어들라고 충고할 수 있을 따름이네.”

다음날 는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수영장 사건’이라 이름 붙여진 그 유명한 일화는 제도권 교육에 대한 프랑스 대학생들의 오래된 불만을 건드렸다. 빨강머리의 22살 학생 다니엘 콘벤디트는 하루아침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프랑스 전역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의 구호는 사소했다. 이를테면 남학생이 여자 기숙사 출입금지 교칙을 없애라고 요구하는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거리에서 이슈는 번져나갔다. 대학 개혁, 사회 개혁까지 학생들은 요구하고 나섰다. 프랑스에 튄 불똥은 세계로 번졌다. 미국에서는 대규모 반전 시위로 이어졌고, 동유럽에서는 ‘프라하의 봄’이,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이 조직됐다. 세계를 뒤흔든 ‘68혁명’의 계기는 이렇게 사소했다.

중산층의 텔레비전, 젊은 층의 스마트폰

2011년, 세계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미국 금융가의 한 모퉁이를 점거한 시위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언론은 현재의 상황을 보며 43년 전 파리를 연상하고 있다. “(이번 운동은) 68혁명처럼 뚜렷한 지도자가 없고 요구사항도 다양하다”( 10월4일치 만물상), “‘68혁명’을 닮아가는 ‘1 대 99’ 반대 시위( 10월8일치 사설). 이런 데자뷔가 맞는 것일까. 맞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68과 월가의 시위는 여러모로 유사하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는 점이 같다. 각국의 시위대가 서로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미국의 시위대가 뉴욕 월가의 ‘리버티 프라자’(주코티 공원)를 점거한 것부터 올해 초 민주화 시위로 들끓었던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이들이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을 벌이는 것도 지난 5월 스페인에서 있었던 캠핑시위(Acampadas)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모습의 저항을 ‘벤치마킹’한 월가의 시위는 다시 주변 지역으로 파급되고 있다. 마치 시위가 세계 곳곳을 돌며 복제되는 듯한 양상이다.

1968년과 2011년의 저항이 모두 뉴미디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월가 시위에 대해 평하며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시위가 반대편 시위 참여자들을 독려하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세계화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발전하는 정보기술(IT)이 분노를 세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68년에 시위를 촉발한 매개는 텔레비전이었다. 미디어학자인 마셜 매클루언이 이미 1962년에 ‘지구촌’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바꿔놓은 세상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1960년대 자본주의의 호황기에 성장한 서구 중산층은 거실에 텔레비전을 한 대씩 들여놓기 시작했다. 68혁명을 조망한 서적 을 2004년에 내놓은 마크 쿨란스키는 “인공위성과 비디오테이프의 개발과 함께 텔레비전 시청이 일반화하면서… 인류는 지구 반대편에서 오늘 일어난 중요한 일을 사상 처음으로 즉시 목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흥미롭게도 “만약 68세대가 미래에 한 번 더 등장한다면, 그 운동은 인터넷을 이용할 것이다. …또 분명히 새로운 도구가 개발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SNS의 언저리에서 그의 상상력은 이미 얼씬거리고 있었다. 43년의 시차를 둔 두 시기의 저항이 모두 뉴미디어의 개발과 발을 맞추었다.

68혁명과 월가의 시위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시비를 걸고 나섰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월가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이 요구하는 핵심은 분배 불평등을 완화하라는 것이다. 특히 막대한 부를 운용하는 월가의 금융자본에 분노가 쏠리고 있다. 물론 시위의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시위는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고, 칠레의 시위 의제는 공교육 개혁이다. 지난여름 런던의 폭동은 시위라기보다 약탈에 가까웠다.

68혁명도 유사했다. 나라마다 요구 내용과 수준은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나 중국의 문화혁명도 68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된다. 그래도 68혁명을 이끈 가장 강력한 동력은 베트남전이었다. 68혁명 전문가인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독일 빌레펠트대 교수는 “1968년 다양한 나라의 저항운동이 각기 특수한 진행 경로를 밟은 것도 사실이지만, 주된 동원 요인은 어디서나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베트남전은 반자본주의와 반제국주의를 연결할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43년 전의 저항이 제3세계 침략을 감행하는 제국주의를 겨눴다면, 오늘날 주된 타깃은 금융자본 혹은 그 너머의 신자유주의였다.

낙관의 시대 vs 비관의 시대

물론 68혁명과 월가 시위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인다. 차이는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맥락에서 도드라진다.

먼저, 시대적 배경이 되는 자본주의의 경기 국면이 두 시기에 무척 달랐다. 1968년은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때였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이전이었다. 경기는 줄곧 호황이었고, 일자리는 넘쳤다. 자본주의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60년대를 일컬어 “완전고용과 소비자 사회 덕분에 기존 선진국 노동계급 대부분이 과거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빈자와 부자 사이의 격차도 크지 않았다. 1960년대에 소득 상위 1%의 몫은 국민소득 가운데 10%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2011년 자본주의의 얼굴은 어둡다. 세계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빈부 격차는 유례없이 커졌다. 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율은 40여 년 사이에 2배 이상 늘어 지난 2007년 23%까지 올랐다. 미국의 실업률은 10%를 육박하고 있다. 백승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1960년대가 낙관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비관의 시대”라고 일컬었다. 1960년대 혁명이 풍요 속에서 나왔다면, 2011년의 저항은 불평등에서 나왔다.

둘째, 시위를 이끄는 주체가 시기마다 달랐다. 1960년 거리를 뒤덮은 이들은 대학생이었다. 배경에는 대학생의 폭발적 증가가 한몫했다. 프랑스에서 대학생의 수는 1960년 20만 명에서 1968년에 58만7천 명으로 늘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대학생 수는 6만9천 명이었지만 1964년에는 29만4천 명이었다. 중산층 아이들이 대거 유입된 대학은 저항의 거점 구실을 했다. 이를테면 독일사회주의학생연합(SDS) 조직은 대학 안에서 학생들을 묶는 구심점이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서기는 했지만, 대부분 거리의 주인공은 학생들이었다.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사학)는 “학생들이 내건 요구는 이상적인 경향이 있어서, 오랜만에 호황과 평화를 동시에 누리던 노동자 계급이 공감하기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2011년 거리에서 대학생은 상대적으로 찾기 힘들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는 “1968년 당시에는 대학과 대학생 등이 움직였다면, 최근 시위에서는 대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새롭다. 시위의 주체가 실업자 등 사회적 ‘잉여’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잉여’ 집단에는 ‘얼굴’도 없다. 미국 월가 시위대 가운데서는 저항을 이끄는 조직적·이론적 지도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1968년에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언론 지상에 자주 오르내린 것과 대조적이다. ‘수영장 사건’의 주인공인 콘벤디트도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학생운동을 조직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 밖에도 독일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미국의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 등은 저항의 이론적 배경이 됐고, 밥 딜런 등 대중음악인은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뉴욕 리버티 프라자에서 시위자들이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학자나 예술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거꾸로 노엄 촘스키,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지성인들이 이들에 대한 지지 의견을 내고 있다. 그 속에서 저항하는 주체의 얼굴은 쉽사리 포착하기 힘들다.

문화혁명 vs 사회저항

셋째, 1968년의 혁명에는 문화적 색채가 강했다. 정치적 급진주의에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결합했다. 록과 마약, 섹슈얼리티는 혁명의 구호 속에 뒤섞였다. 앞선 1960년 미국 식품의약품국은 피임약인 에노비드의 판매를 승인했다. 1960년대 미국의 신좌파 이론가 중 한 명인 제리 루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중에 ‘대항문화’라고 불리게 된 불법 마약 경험과 음악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마약, 환각제, 히치하이킹, 재니스 조플린, 롤링스톤스 등등을 모르고는 1960년 정치적 정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앞선 1950~60년대의 순응주의 문화와 분명히 선을 긋는 것이었다. 홉스봄은 “록 음악 팬과 급진파 학생들이 만났던 1960년대 미국에서는, 술에 취하는 것과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 사이에 경계선이 종종 불명확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2011년 월가의 현장에서는 아직 문화적 기호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김누리 교수는 “68혁명은 문화혁명의 성격이 강했다면, 현재 시위는 사회적 요소가 강하다”고 말했다.

넷째, 요구의 수위가 크게 달랐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지도자인 루디 두취케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자신만만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전세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해방운동의 참으로 역사적인 대중적 기반입니다. 국제 혁명의 전복적·폭발적 성격은 오롯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68운동을 주도한 신좌파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주된 사회변혁의 주체로 삼는 구좌파와 달리, 젊은 지식인 및 제3세계 해방운동 세력을 사회변혁 주체로 내세웠다. 이들의 지향은 저항 수준을 넘어, 전복에 가까웠다. 길혀홀타이 교수는 “68운동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전 사회적인 대항 구상을 담은 최후의 사회운동”이라고 일컬었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당시 세계에서 충만했던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백승욱 교수는 “중국의 공산혁명, 제3세계 비동맹 운동 등을 배경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사회운동이 고조기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2011년 뉴욕을 점거한 시위대의 요구는 불분명하다. 영국의 진보운동가 오언 존스는 “가장 큰 문제는 정책 결정자도, 시위대도 지금의 위기 상황을 해결할 만한 대안적인 비전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9월9일 뉴욕 리버티 프라자를 찾은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우리 앞에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신자유주의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이념적 이정표도 사라졌다.

백승욱 교수는 전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2011년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비유했다. 20세기 초반 전쟁이라는 대량 학살을 겪으면서 인류는 문명에 대한 낙관을 잃었다. 유럽의 진보세력은 전쟁을 거치며 사분오열됐다. 이론은 전쟁을 설명하지 못했고, 인류의 절망도 설명하지 못했다. 전망의 부재 속에서 불만과 불안은 폭넓게 퍼져나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지만,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2011년은 전쟁이 막 끝난 1920년대와 유사하다. 불안과 불신이 자칫 파시즘으로 일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혼란은 불길한 요소도 담고 있다.

해나 아렌트의 말대로

2011년 10월, 불안의 몸짓들이 전세계로 퍼져나가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미래를 얘기하지는 못한다. 분명한 점은 스스로도 목적지를 알 수 없지만 다수의 시민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민유기 광운대 교수(서양사학)는 “주류 공간에서 배제됐던 자들이 이제 대거 거리로 나와 공공성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그 폭발력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세상을 바꾼 저항에 대해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1848년 혁명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해, 유럽의 왕정의 몰락을 이끈 시민혁명들을 가리킨다.

1968년 6월 혁명의 와중에 독일의 작가 해나 아렌트는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1848년에서 배웠듯, …21세기의 아이들은 1968년에서 배울 것입니다.” 이들이 남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결국 우리 동시대인의 몫으로 남았다.

참고 문헌 (에릭 홉스봄·까치), (크리스 하먼·책갈피), (잉그리드 길혀홀타이·창비)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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