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그리스인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연금생활자는 삭감된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봉급생활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봉급은 삭감되고 보너스나 수당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긴축정책안에는 가파른 간접세 인상까지 포함돼 물가가 고공으로 치닫고 있어 서민 생활은 재정위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고 중산층 몰락이 가속화하고 있다.
세금도 내기 어려운 연금생활자
아테네 시내에 사는 요르고스 디미트로폴로스(34)는 선대부터 상가 건물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임대 수익으로 생활해왔다. 지난해 그리스가 재정위기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구조조정안을 받아들인 뒤 상거래나 법질서는 곧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이전에는 연평균 10만유로(약 1억5천만원)의 상가세를 거둬들여 안정된 생활을 해왔고 앞날의 투자도 계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정위기가 닥친 뒤로는 세입자들이 점포세를 납부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경제위기라는 이유를 들어 점포세의 납부를 차일피일 미루며 내지 않는 것이 예삿일이다. 위기가 시작된 지난해에는 점포세를 절반인 5만유로밖에 거두지 못했다. 반면 세금은 4만8천유로였고 세금을 납부한 뒤 남은 돈은 단 2천유로였다.
올해 들어서는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7월 중순까지 거둬들인 점포세는 3천유로가 전부다. 생활이야 모아놓은 돈으로 해나갈 수 있지만 세금이 큰 부담이다. 세무서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처벌받을 것이라며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세무서에 사정을 봐달라고 수차례 진정했지만 답변은 같았다. “세금을 납부한 뒤 천천히 점포세를 거둬도 된다”는 것이다. 당장 4만8천유로를 납부하라는 세금고지서를 들고서 그는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 점포세를 내지 않는 상점 주인들에게 나가달라고 했지만 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긴축정책은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3년 전 교수직을 은퇴한 수학자 바코풀루스(72) 교수는 은퇴 뒤 받아온 연금이 반으로 줄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3년 전에 2천유로를 연금으로 받았으나 지금은 1천유로로 생활하고 있다. 혼자서 생활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세금이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에 대한 세금을 납부하는 데 연금의 대부분이 나갈 판국이어서 생활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자동차세나 인상된 휘발유값도 부담이다.
그러나 그처럼 교수 출신의 연금생활자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현재 그리스에서는 연금생활자들의 연금이 대부분 이전의 3분의 1이나 반으로 삭감됐다. 평회사원이나 교사, 하위직 공무원으로 퇴직하면서 받는 낮은 수준의 연금이 절반으로 삭감된 경우는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아테네 중심가인 신타그마 광장에서 날마다 시위를 벌인 대열 중에 연금생활자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민은 정부가 연금을 다시 삭감하면 내전 상태에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7월 중순이 넘어가는 그리스는 이전 같으면 휴가를 즐기려는 그리스인이나 유럽인들로 섬으로 향하는 페리선박이 발을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북적댔겠지만 올해는 경제위기의 현실을 보여주듯 한산하기만 하다.
간접세 인상으로 서민 불만 폭발
재정위기에 대응한 그리스 정부의 긴축정책은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피부에 와닿는다. 아테네 공항에서 중심가까지 가는 셔틀버스 요금은 지난해까지 거의 6년 동안 3유로20센트를 유지해왔지만 올 들어 5유로로 인상됐다. 지난해까지만도 1유로이던 지하철 요금은 1유로40센트로 인상됐다. 휘발유값도 1ℓ에 1유로80센트로 거의 70% 인상됐다. 공공요금이나 생필품의 가파른 인상은 긴축정책의 결과로 간접세 인상을 통한 더 많은 세수 확보를 목표로 한다. 시민들은 부유층은 건드리지 않고 간접세 인상을 통해 모든 부담을 서민에게만 전가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지난 6월 수만 명의 시민이 정치인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꼽으라면 극우단체의 테러 행위를 들 수 있다. 내전과 군부독재를 겪은 그리스는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우파 세력은 소수로 전락했다. 현재 그리스의 집권 여당은 사회당이고 공산당과 좌파 정당이 의회에서 상당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극우파가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물론 극우단체는 1980년대부터 존재해왔지만 정당 진출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대중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지난해 시작된 재정위기는 극우파의 대중적 기반을 확장했다. 지난해부터 ‘크리시 아브기’(황금의 새벽)라는 극우단체는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아테네 중심가에 위치한 옴모니아 광장의 서북부 일대에서 주로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를 대상으로 테러를 일삼기 시작했다. 젊은 실업자들이 주축인 단체로 이제는 공공연히 우익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색깔을 띤 당을 지향하고 있다.
“언제 이전으로 돌아갈지…”
이전에도 유색 이민자들에 대한 테러가 간헐적으로 있어왔지만 지난 5월은 아테네에서 최초로 인종차별적 테러가 공공연하게 벌어진 달이다. 지난 5월10일, 옴모니아 광장 인근을 지나던 한 그리스 청년을 유색 이민자 3명이 처참하게 살해하고 카메라를 빼앗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그리스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틀이 지난 5월12일, ‘크리시 아브기’에 속한 청년 수백 명은 옴모니아 광장 일대의 이민자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심지어 이들은 일부 이민자의 안방에까지 쳐들어가 폭행했다. 이들의 잔인한 폭행으로 방글라데시인 1명이 숨지고 20명이 넘는 외국인이 병원했다.
수도인 아테네 중심가에서 그것도 대낮에 인종차별적 테러가 벌어졌지만 경찰은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의회에서는 “경찰이 극우단체를 보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많은 외국인 이민자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걸 꺼릴 정도로 공포에 짓눌려 살고 있다.
재정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안이 2년째 시행되고 있는 그리스에서는 2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치른 뒤 다른 나라로 대거 경제적 이민을 떠났던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30%를 육박하는 청년 실업률로 인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그리스 동남부 칼림노스섬으로 가는 페리선상에서 만난 26살의 젊은이는 유조선에서 기계를 수리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6개월 동안 배 밑창에서 기계를 만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그의 삶을 바꿔놨다. 고향인 칼림노스섬에서 가족과 함께 관광업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았으나 재정위기로 관광객이 줄어들어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언제 가족과 다시 이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지 그의 말에는 젊은이답지 않게 힘이 빠져 있었다.
아테네(그리스)=하영식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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