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으려던 의사는 말을 보내고서야 왔지만, 아내에게 약 한 모금을 먹이는 게 전부였다. 차가 없어 산모를 어깨에 메고 병원으로 가는데 피가 철철 흘렀다. 결국 (길거리에 세워진) 차 뒤쪽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고도 1시간 동안 아기와 산모가 연결된 채 고통을 참아야 했다.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영국 일간 9월19일치에 소개된 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사연이다.
목표라는 게 사실 모두 달성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 최고 지도자들의 약속이라면,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라면 그 책임의 무게는 달라진다. 바로 2000년, 새 천년을 앞두고 전세계 189개국 정상이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과 질병, 성차별과 아동사망 등을 대폭 개선하기로 약속한 ‘새천년개발목표’(MDGs)다. 그 뒤 10년, 지난 9월20~22일 유엔총회를 앞두고 나온 유엔 보고서는 “추가적 노력 없이는 많은 나라에서 MDG를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8대 목표(표 참조) 가운데 특히 모성사망률과 5살 미만 유아사망률 줄이기가 크게 부진하다. 그나마 빈곤율이 1990~2005년에 19%가 줄어들어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은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 결과로 해석된다.
국제원조 목표치 채우려면 5년간 350억씩 늘려야
‘목표 미달’의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원조가 단기적으로는 생명을 구했지만,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를 향상시키지는 못했다”며 “수십 년간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수백만 명을 고려해보라. 발전이 아니라 의존이며, 깨뜨려야 하는 순환구조다”라고 말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개발도상국들이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자체적으로 이루지 못하면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며 “개발원조는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유엔총회 결과 문서도 “각 나라가 경제적·사회적 발전에 주된 책임을 지며, 국가정책과 국내 자원 및 개발 전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밝혔다.
맞는 소리다. 절반쯤만. 국제사회는 2005년 2월 ‘원조효과 제고를 위한 파리선언’에서 원조를 받는 수원국의 주인의식과 공여국·수원국 간 상호 책임성의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고위층 자녀가 군대 가는 것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들은 그동안 얼마나 약속을 지켰는지 따져보자.
유엔 보고서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하부기관인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국제원조가 2009년 사상 최다인 1200억달러를 기록했지만, 올해엔 목표치인 1457억달러에서 200억달러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2005년 스코틀랜드 글리니글스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는 공적개발원조(ODA)를 500억달러, 특히 아프리카 원조를 250억달러 늘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지원만도 올해 약속한 615억달러보다 160억달러가 모자란다.
2002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개발재원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가 약속하고 공식화한 ODA 규모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0.7%다. 하지만 현재 약속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스웨덴(1.12%), 노르웨이(1.06%), 룩셈부르크(1.01%), 덴마크(0.88%), 네덜란드(0.82%) 5개국뿐이다. 영국(0.52%), 프랑스(0.46%), 독일(0.35%), 미국(0.20%), 일본(0.18%) 등은 한참 못 미친다. 한국도 0.1%(대북원조 제외)에 머물러 있다. DAC 회원국 전체 평균은 0.31%밖에 안 된다. 현 상태로는 향후 5년간 해마다 350억달러씩 늘려야 2015년에 목표치인 3천억달러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이처럼 국제원조가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이유로는 미국발 경제위기가 흔히 꼽힌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MDG 관련 고문을 맡고 있는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그는 2007~2008년 경제위기 전에 MDG에 관해 G8 정부 관리들에게 물어봤을 때, 이미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라고 되물었다”며 “애초부터 계획 이행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카리브해 섬나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랠프 곤살브스 총리는 “우리의 많은 개발 파트너(선진국)들이 명백하고 측정 가능한 약속을 진부하고 공허한 미사여구로 바꿨다”고 비판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팸의 레이 오펜하이저 대변인은 “오바마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는 동안에도 30명의 여성이 숨지고 66명의 어린이가 말라리아로 숨졌을 것이다. 대통령들의 말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런 숫자들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영국 닉 클레그 부총리도 2013년까지 국민총소득의 0.7%라는 목표치를 달성할 테니 다른 나라도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선진국의 약속 이행을 독려했다. MDG가 구속력 없는 합의다 보니, 일부에서는 국제법상으로 책임을 지우자는 목소리도 있다. 국제 간 금융거래에 세금을 물려 국제원조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등이 반대하고 있다.
원조는 하되 무역에서는 경쟁 원리 적용?
사실, 문제는 현금 원조만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저개발국이 자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여건 조성은 외면하고 있다. 올리비에 드 슈터 유엔 특별조사위원은 “MDG가 돈과 에너지를 동원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빈곤 현상을 공격할 뿐 저개발과 기아의 더 깊은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애초 MDG는 저개발국에 도로 등 인프라를 지원하면 경제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1980년대 논리에서 벗어나, 교육이나 보건 등 성장 여건을 구축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갖춰주자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현재 저개발국 수출품의 81%(무기·원유 제외)만이 선진국 시장에서 비관세 혜택을 받고 있다. 이는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이 빈국 수출품의 97%를 세금이나 쿼터 없이 수출되도록 하자고 했던 목표에 크게 뒤처진다. 또 35개국에 860억달러에 이르는 부채 탕감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39개 저개발국 가운데 27개국은 채무 압박을 받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책기획팀 문상원 과장은 “선진국들이 “아프리카 원조를 늘리면서도 아프리카 농산물 수입은 규제하고 철저한 경쟁 원리를 적용하는 등 개도국 발전을 가로막는 정책을 펴고 있다”며 “정책의 일관성 없이 상호 모순적 정책을 펴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유엔총회에서도 각국 지도자들은 장밋빛 약속을 쏟아냈다. 대표적으로 각국 정부와 자선사업가의 기부로 400억달러를 조성한 뒤 여성과 아이들의 건강 증진에 투자해, 2015년까지 1600만 명의 생명을 구한다는 계획이다. 구호단체 액션에이드의 조안나 커 사무총장은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이슈에 공허한 약속을 계속하는 한 유엔 정상회의는 기대한 결과를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금, 국제사회는 번지르르한 약속보다 최소 0.7%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필요하다.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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