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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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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인가 내전인가… 운명의 살라댕 교차로

붉은 셔츠, 방콕 중심가에 바리케이드… 타이 지배 엘리트에 대한 사상 최대의 저항
등록 2010-05-06 21:49 수정 2020-05-03 04:26
실롬가와 맞닿은 살라댕 교차로를 포함해 붉은 셔츠는 6개의 바리케이드를 세워놓았다. 죽창과 트럭 타이어로 세운 바리케이드에는 기름을 부어 공권력과 ‘안티 레드’ 시위대의 접근을 막고 있다.

실롬가와 맞닿은 살라댕 교차로를 포함해 붉은 셔츠는 6개의 바리케이드를 세워놓았다. 죽창과 트럭 타이어로 세운 바리케이드에는 기름을 부어 공권력과 ‘안티 레드’ 시위대의 접근을 막고 있다.

“승리할 때까지 절대로 집에 가지 않겠다.”

타이 북동부 지방, 암낫차른에서 온 농사꾼 술리안 웡수완(52)은 허리께 새총을 차고 죽창과 타이어로 뒤엉킨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있었다. 4월28일 자정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만난 그는 방콕 심장부를 점령하며 7주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반정부 시위대 ‘붉은 셔츠’의 사수대원이다. 3월12일 방콕으로 원정투쟁을 온 이래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7주 동안 아무 벌이 없이 모아놓은 돈 1만밧을 쓰기만 했다”는 그는 “그래도 벌이보다는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가 민주주의를 위해 더 중요하다”며 웃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32살의 건설노동자도 어둠 속에서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낮에는 노가다를 뛰고 밤이면 시위 현장을 찾아 사수대 노릇을 한다는 그는 붉은 셔츠가 자체 생산한 나무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자위용이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다시 나타났으니 이거로라도 막아야지.” 요즘 하루 3시간 이상을 못 자지만 그는 시위 현장으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모든 계급이 참여한 대중정치운동

이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선 바리케이드는 방콕 번화가, 실롬가 끝자락 살라댕 교차로에서 불과 30~4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붉은 셔츠가 점령한 이른바 ‘붉은 성’의 ‘남대문’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4월10일 민주탑 부근에서 발생한 유혈 진압 이래 붉은 셔츠는 상업지구인 라차프라송으로 시위 지역을 단일화했다. 그러고는 영토를 실롬 부근까지 넓혀왔다. 여전히 ‘비폭력 시위’를 입버릇처럼 달고 있지만 죽창과 트럭 타이어, 철조망 등으로 실롬을 비롯한 총 6군데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기름을 부어놓았다. 공권력과 반대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바리케이드 안에는 엄청난 양의 돌과 새총, 죽창 그리고 접근하는 군인을 ‘낚겠다’며 그물까지 준비해놓았다.

탐마삿대학 역사학자 타넷 아폰수반은 지난 4월22일 타이 외신기자 클럽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붉은 셔츠가 비폭력 시위를 고수한다고 해서 군부의 무력 진압을 피할 수 있을 거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나라에서 비폭력 투쟁이 먹힌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그는 붉은 셔츠 운동을 타이 역사상 유례없는 대중정치운동으로 평가하고 작금의 상황을 ‘프랑스혁명’과 비교하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에 견주는 건 좀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이 갈등이 반드시 계급전쟁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붉은 셔츠 진영에는 중산층과 지식인도 대거 참여하거나 지지한다. 사실상 모든 계급이 참여하고 있다.”

마히돌대학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르치는 진보적 정치학자 시롯테 클람파이분(38)은 약간 다르게 분석했지만 두 학자 모두 ‘친탁신 조직’에서 출발한 붉은 셔츠 운동이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해왔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정부의 무력 진압이 입박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매일 밤 붉은 성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이 구역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붉은 셔츠의 ‘중무장‘은 사실 4월19일 군인들이 실롬가를 부분 점령해 들어오면서 시작된 현상이다. 사망자 25명, 부상자 800여 명의 큰 인명 피해를 낸 4월10일의 유혈사태에도 불구하고 붉은 셔츠를 진압하는 데 실패한 군은 8일을 병영에서 지냈다. 그러다 방콕의 금융가인 실롬을 보호하겠다며 19일 탱크를 몰고 다시 거리로 돌아왔고, 아이러니하게도 군의 복귀는 ‘멀티컬러 셔츠’라 불리는 ‘실롬 주민’ 시위대를 불러왔다.

“저들을 죽여버려!” 군이 복귀한 다음날인 4월20일 밤, 실롬 거리는 그렇게 외치는 멀티컬러 시위대로 난장판을 이뤘다. 그들은 “우리는 왕과 왕비를 사랑한다”는 구호를 외쳐댔고, 1970~80년대 타이 공산당이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시절에 부른 반공산주의 노래 (‘가치가 떨어지는 인간들’이라는 뜻)을 열창했다. 한 여성 시위대는 붉은 셔츠를 입은 외국인이 지나가자 “니네 편으로 가라”며 거칠게 쫓아냈다. 22일에는 “교육받지 못한 인간들”(Uneducated)이라는 영문 피켓까지 등장했다. 이날 두 셔츠 진영은 암흑 속에서 2시간가량 투석전을 벌였다. 4월6일 붉은 셔츠의 행진에 환호가 넘쳐나던 거리 실롬은 붉은 셔츠의 모든 것에 대한 증오로 넘쳐났다.

4월9일 시위 현장에서 한 군인이 붉은 스카프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군인을 ‘수박 군인’이라 부른다.

4월9일 시위 현장에서 한 군인이 붉은 스카프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군인을 ‘수박 군인’이라 부른다.

정부-군부, 강경대응 놓고 삐걱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주주의민중연대’(PAD·‘노란 셔츠’ 진영)의 움직임까지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4월18일, 정부에 일주일 기한을 주며 붉은 셔츠를 진압하라고 요구했던 이 왕정주의자 시위대는 29일 오전, 붉은 셔츠 시위가 시작된 이래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칩거하고 있는 제11보병 사단 군부대 앞에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에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요구를 시작으로 “군대를 보내 붉은 시위 현장과 기물들을 파괴하고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라” 등과 같은 과격한 요구가 가득했다. 해를 거듭해온 방콕의 정치 분쟁은 지금 위험한 ‘민-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 분석가는 내전을 경고하고 있다.

한편, 아피싯 총리와 아누퐁 파오친다 군 참모총장, 현 사태를 위해 마련된 특별 기구인 비상사태해결센터(CRES) 산센 코칸너드 대변인의 일치되지 않은 성명이 불쑥거리는 가운데 불협화음 역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정부 대변인 빠니탄 와따나야꼰이 평화적 해결을 선호한다고 발표한 직후에는 CRES 대변인 산센 코캄너드 대령이 강경 진압을 천명했다. 상대적 온건파로 알려진 아누퐁 참모총장이 개인 대변인을 통해 “강경 진압은 누구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며 정치적 해결을 촉구한 직후에는 다시 정부의 강경 진압이 천명됐다. 실상 아누퐁 총장은 10일 유혈 진압이 실패한 직후부터 정치적 해결을 촉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출랄롱꼰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피치 퐁사왓(39) 박사는 타이 역사에서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다 신뢰를 잃어온 군이 “더는 정치의 그늘 아래 존재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불법 모금으로 정당법을 위반한 민주당의 해체건이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는 터라, 군은 민주당이 탐탁지 않아서 시간을 끌면서 무력 진압을 최대한 피하려는 것 같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여기에 진급을 둘러싼 타이 군 내부의 고질적인 분열도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군이 단일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요소로 분석된다. 실제로 10일 유혈 사태 당시 의문의 검은 복장 사나이들이 유혈 진압 막판에 군과 총격전을 벌인 것을 두고 군 내분이 그 현장에서 가시화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하여, 긴장이 고조되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 이런 군내 불만 세력이나 은퇴 군인들이 붉은 셔츠 시위 속으로 침투해 또다시 대혼돈의 총격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붉은 셔츠 지도부가 “폭력 사태의 재발을 막고 인명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며 기존의 ‘의회 즉각 해산안’에서 ‘30일 이내 해산’이라는 양보안을 내놓은 것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4월23일 붉은 셔츠 라차프라송 ‘본부’를 방문한 10여 명의 외교단 앞에서 지도부 중 가장 온건한 인물로 평가받는 베라 무시카퐁(63)이 발표한 이 양보안은 그러나 다음날 바로 거절당했다. 아피싯 총리는 “(붉은 셔츠의 양보안은) 외신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붉은 셔츠는 즉각 협상 불가를 선언하고 끝까지 싸우겠노라 또 다짐했다. 그들은 4월29일 방콕의 유럽연합 대사관을 방문해 정부의 임박한 무력 진압을 국제사회가 현장에서 모니터해줄 것을 ‘긴급’ 요청했다. 유럽연합의 ‘평화적 해결 촉구’ 성명이 바로 이어졌지만, PAD 골수 지지자인 카짓 피롬야 외무부 장관은 국제사회의 간섭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4월19일 실롬가 보호를 명목으로 붉은 셔츠와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

4월19일 실롬가 보호를 명목으로 붉은 셔츠와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

‘왕실 전복 음모론’까지 제기

더 나아가 민주당 정부는 ‘왕실 전복 음모론’까지 들고 나왔다. 붉은 셔츠 지도부를 포함한 반대파들이 음모론자 명단의 대부분이다. 이에 PAD는 왕실 전복 음모의 내막을 밝히는 CD를 배포하겠다며 맞장구쳤다. 이와 관련해 타이 불교를 깊이 연구해온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피터 잭슨 박사는 4월21일 열린 이 대학의 타이 사태 관련 포럼에서 붉은 셔츠 시위에서 왕실 이미지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점을 주목했다. “1973년, 92년 등 과거 시위에서는 늘 왕실이나 왕의 이미지가 시위 현장에 많이 등장했다. 붉은 셔츠 시위 현장에서는 그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여러 달 동안의 시위 과정에서 왕의 사진을 들고 오는 이가 한두 명 있었으나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붉은 셔츠 운동이 왕정 타도를 음모한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붉은 셔츠를 이끄는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의 여섯 가지 원칙 중 첫 번째가 바로 왕이 국가원수가 되는 입헌군주제 지지다. “나는 이걸 정치적 음모라 부르겠다. 다급한 민주당 정부가 지금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이 해체되기 전에 사태를 무력으로라도 진압해 주도권을 잡고 싶은 것이다.” 출랄롱꼰대학 피치 퐁사왓 박사의 말이다.

이렇게 다급한 정부와 9월 은퇴를 앞두고 유혈 진압의 명령자가 되고 싶지 않은 아누퐁 총장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압박하면 군은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푸른 군복을 입고 있으면서 속으론 붉은 셔츠를 지지하는 수박 군인이 많다지만, 그들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총구의 방향을 바꾸길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인 발상이다.” 군부보다는 정부가 더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마히돌대학 시롯테 교수의 말이다.

강경론의 목소리는 특히 수텝 트악수반 부총리와 산센 코칸너드 CRES 대변인의 입을 타고 나와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산센 대변인은 4월19일 도심으로 복귀한 군인들이 실탄을 지녔음을 더는 숨기지 않았고, 27일 “30m 이내 (군이) 위험 상황에 직면할 경우 실탄 사격이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그 자기방어용 실탄의 첫 희생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인이 되고 말았다. 28일 방콕 북부 돈므앙 공항 인근에서 붉은 셔츠 시위대와 군인들이 충돌 당시 발생한 이른바 ‘프렌들리 파이어’(아군의 오발로 아군이 숨지는 상황)로 나롱릿 사랏 일병이 사망했다.

타이 전역이 분쟁의 소용돌이

정부의 무력 진압 다짐이 거듭되고 예측불허의 충돌이 생겨나면서 붉은 성의 바리케이드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돈므앙 공항 부근 충돌 이후에는 바리케이드에 철조망까지 씌워졌다. 누구 하나 중재할 엄두도, 생각도 못하는 가운데 콘캔·농카이·우돈타니 지방 등지에서 붉은 셔츠 시위대가 지방에서 방콕으로 향하는 군과 경찰들의 차량을 막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가히 타이 전역이 정치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가고 있는 듯하다. 자력 갱생으로 조직력을 발전시켜온 타이 역사 최대의 대중정치운동 붉은 셔츠는 지금 오랜 세월 타이 사회를 주물러온 엘리트 기득권층의 양보 없이 달리는 기차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 소요가 민주주의를 향한 고통스런 한 걸음으로 이어질지, 여러 분석가의 우려대로 내전으로 빠져들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방콕은 지금 시한폭탄을 기다리는 분위기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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