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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새로운 문제, 국제 유괴

어린이 33명을 태운 버스 적발돼… 다국적 불법 입양조직의 손쉬운 목표물이 되어가
등록 2010-02-10 11:30 수정 2020-05-03 04:25

아이티 관련 뉴스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긴, 언제까지 그곳만 바라보고 있을까? 기자들도, 구조요원들도, 급파됐던 각국의 외교관들도 하나둘 일상으로 돌아갔다. 산을 옮겨줄 듯했던 지구촌의 호들갑이 떠난 빈자리에, 외로이 그들이 남아 있다. 버티고 있다. 언제나처럼.
은 2월3일치에서 ‘다가오는 우기’를 걱정했다. “최소 70만 명이 넘는 포르토프랭스의 이재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비를 막아줄 텐트다. 헝겊을 아무렇게나 끌어모아 쳐놓은 텐트가 비에 젖으면 무너질 게 뻔하다.” 사연은 눈물겹지만, 아이티에서 우기는 대체로 4월 말에서 5월 초께 시작된단다. 아직은 시간이 있는 게다. 짚어볼 대목이 있다.

‘아이티, 끝 모를 고난의 행군.’ 지난 1월30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시내에서 ‘약탈’ 혐의로 붙잡힌 소년이 경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이른바 ‘약탈자’ 대부분은 무너진 상점의 잔해를 치우고 쓸 만한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들이다. REUTERS/CARLOS BARRIA

‘아이티, 끝 모를 고난의 행군.’ 지난 1월30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시내에서 ‘약탈’ 혐의로 붙잡힌 소년이 경찰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이른바 ‘약탈자’ 대부분은 무너진 상점의 잔해를 치우고 쓸 만한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들이다. REUTERS/CARLOS BARRIA

호들갑 뒤 외로운 빈자리

“대지진으로 경황이 없는 아이티에서 어린이들을 납치해 외국으로 빼돌린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다. 매우 걱정스럽다.” 지진 발생 13일째 만인 지난 1월25일 켄트 페이지 유니세프 대변인은 〈AFP통신〉 등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월29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 접경 지역에서 아이티 경찰 당국은 ‘수상한’ 버스 1대를 세웠다. 차 안에는 미국인 남성과 여성 각 5명씩 어른 10명과 아이티 어린이 33명이 타고 있었다.

생후 석 달 된 영아부터 제법 청소년 티가 나는 12살까지, 아이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미국인 어른들은 “지진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도미니카로 데리고 간다”고 말했단다. 경찰은 아이들의 신상 관련 서류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미국인 어른들은 아무런 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이들을 ‘인도’한 아이티인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현지 경찰 당국은 일단 버스의 방향을 포르토프랭스 쪽으로 돌렸다.

버스에 타고 있던 미국인들은 누구일까? 〈CNN방송〉은 1월30일 이들이 “미 아이다호주 머리디언에 자리한 센트럴밸리 침례교회 신자들”이며, “이른바 ‘새 생명 어린이 피난처’란 단체까지 꾸리고 아이티 어린이 지원사업에 나선 이들”이라고 전했다. 아이다호주 현지 은 더 자세한 내용을 전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8명이 아이다호 출신이고, 2명은 텍사스, 1명은 캔자스주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포르토프랭스까지 간 이유는, 지진으로 고아가 된 아이티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주고 싶어서였단다. 여성 5명은 모두 센트럴밸리 침례교회 교인들이다. 이번 여행을 조직하고, 또 대변인을 자처하는 인물도 같은 교회에 다니는 로라 실스비(40)란 여성인데, 가족의 말로는 실스비가 ‘퍼스널 쇼핑’이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한단다. 그는 2년여 전부터 센트럴밸리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성 5명은 모두 아이다호의 트윈폴스 지역 출신으로 알려졌다. 일행 중 폴 톰슨(45)은 이스트사이드 침례교회 목사이며, 현직 소방관이라는 드루 컬버스(34)란 인물도 주말이면 청소년 선교활동을 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전해졌다. 나머지 텍사스와 캔자스주에서 온 3명도 센트럴밸리 교회에 다니는 이들의 친인척이라는 게 의 전언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그들이 왜 포르토프랭스로 갔느냐일 게다.

‘선한 의도’도 의심스러운 상황

“지진으로 온통 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우린 그저 옳은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주고 싶었다. 신이 이끄신, 우리의 소명이다.”

포르토프랭스의 유치장에 갇힌 실스비는 2월1일 등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신의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문제의 미국인들은 아이티 어린이 100명을 모아 도미니카공화국 해안가에 자리한 호텔에 임시 거처를 마련할 작정이었단다. 이후 적당한 땅을 마련해 고아원을 설립·운영하는 게 이들의 최종 목적이었다. 실비스는 “아이들이 관련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서류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며 “우린 그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주고 싶다는 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이티에선 아이들이 자주 ‘실종’된다. 극도로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은 다국적 불법 입양조직의 손쉬운 목표물이다. 더러는 자녀를 더 나은 삶을 위해, 더러는 돈 몇 푼에 부모가 직접 아이를 넘기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아이티 정부는 최근 불법 입양을 범죄로 규정하고 단속을 강화해왔다. 부모 등 보호자의 명시적 동의와 출생증명 등 관련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나라 밖으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유괴’에 해당한다. ‘선한 미국인’ 일행이 데리고 간 33명의 아이들 대부분도 고아가 아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지진의 참상을 경험한데다, 갑자기 부모와 떨어졌기 때문이다. 탈수 증세를 보인 아이도 있었고, 다들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티 당국의 요청으로 33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구호단체 ‘SOS 어린이 마을’ 관계자는 2월2일 〈CNN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 중 3분의 2가량은 고아가 아니라,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애초 문제의 미국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하는 대목도 있다. 아이다호주 지역 일간지 은 2월4일치에서 “실스비는 8건의 민사소송에 휘말려 있으며, 임금 체불로 14건의 고발장이 접수된 상태”라며 “지난해 11월 ‘새 생명 어린이 피난처’를 창립할 때 사무실로 사용한 35만8천달러짜리 저택도 한 달여 뒤 은행에 압류됐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2월4일 아이티 당국이 미국인 10명 전원을 유괴 등의 혐의로 기소했을 때, 실스비는 “신께서 우리의 선의를 알고 계시기에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또다시 아이티의 운명은 남의 손에

많게는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변에서만 100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났다. 상업용 건물 2만 채가 무너졌고, 주택 22만5천여 채가 붕괴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인프라도 깡그리 사라졌다. ‘재건’이란 말보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편이 맞는 표현이다. 긴급구호 단계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 주변국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아이티 지원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의 재건·복구를 지원했던 ‘마셜플랜’의 아이티판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변국의 발 빠른 움직임과는 달리 르네 프레발 대통령을 비롯한 아이티 정부는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하지만,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티 재건은 남의 손에 맡겨진 채다. 아이티의 운명을 또다시 남이 정하고 있다. 장 조엘 조제프 아이티 상원의원은 2월2일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맞다.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개 끌 듯 끌지 마라.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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