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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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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와 연대하는 벨기에의 지성

자유대학 총장이 집회 동참 호소… 불법체류자들 협회 만들고 기자회견도
등록 2008-12-25 18:39 수정 2020-05-03 04:25

‘상파피에.’(Sans Papiers)
프랑스어로 ‘파피에’(papier)는 종이를 뜻한다. 하지만 복수형이 되면 ‘서류’ 또는 ‘신분증’을 뜻하게 된다. 앞선 단어 ‘상’(sans)은 전치사로 ‘~이 없는’이란 뜻이다. 그러니 두 단어를 합치면 ‘서류 또는 신분증이 없는’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상파피에’는 불법 체류자를 이르는 관용어다.
유럽에서 상파피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럽연합도 ‘미래 역점 사업’으로 환경·에너지와 함께 상파피에 문제를 꼽는다. 유럽 어디를 가나 상파피에로 보이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집시 출신일 수도 있고, 아랍인이거나 북아프리카 또는 라틴아메리카 출신일 수도 있다. 때로 흑인도 만날 수 있다. 벨기에에서도 이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이들은 ‘정치적 난민’과는 또 다르다.

“국경 NO, 국적 NO, 추방을 멈춰라!” 불법체류자인 상파피에들이 12월14일 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자유대학 교정에서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국경 NO, 국적 NO, 추방을 멈춰라!” 불법체류자인 상파피에들이 12월14일 벨기에 브뤼셀의 브뤼셀자유대학 교정에서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지난 2001년을 기준으로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이 파악한 자료를 보면, 유럽연합 24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한 이들은 모두 28만88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벨기에에서 신청한 이들만 2만4549명이었다. 대부분 이라크·파키스탄 등 국제적으로 관심을 끈 전화를 피해 피난을 온 사람들이다. 그나마 이들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면 합법적인 체류자가 될 수 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선 체류가 인정될 때까지 숙식 제공은 물론 약간의 생활비도 지원해준다. 하지만 상파피에는 그 성격상 아예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다. 처음에는 정식 체류 허가를 받은 ‘외국인’으로 들어왔다가, 체류 연장을 하지 못해 불법 체류 신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략 ‘정치적 난민’ 수보다 10배 이상은 되지 않을까 추정할 뿐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외국인들에게도 합법적인 체류자라면 건강보험 같은 각종 사회보장 혜택은 물론이고 생활비 보조까지 자국민과 똑같이 대우한다. “문명국가에서 인종차별은 가장 큰 모욕”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상파피에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취업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강보험 카드가 없기 때문에 병원에 갈 수도 없다.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해 은행 계좌도 열 수 없다. 적발되면 바로 추방이다. 상파피에가 주로 불법 노동 적발이 쉽지 않은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다소 이상한 것이 있다. 상파피에들이 전혀 숨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파피에협회’(UDEP)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상파피에협회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하기도 한다. 불법은 불법이되 ‘인정되는’ 불법인 셈이다. 이들은 왜 당당한가? 이들의 문제가 ‘생존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존권’은 곧 ‘인권’이며, 인권은 유럽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이자 약점이다. 아무리 상파피에라도 이들이 실정법을 어긴 증거만 없다면, 공권력도 이들을 함부로 잡아 가둘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거리로 나가 집회를 열고 함께 모여 생존권을 부르짖을 수 있다.

병원 치료 못받고 은행 거래도 불가능

지난 12월14일 오전 11시30분께, 날씨는 비교적 따뜻했다. 비도 오지 않았고 겨울 날씨답지 않게 가끔씩 파란 하늘도 볼 수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평소 같으면 문이 닫혔을 브뤼셀자유대학으로 간 것은 며칠 전 다음과 같은 전자우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민 당국은 (학교를 점거하고 있는) 상파피에들의 체류 허가를 내주는 것을 거부했고, 이는 그들을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공적으로 어떤 권한을 누리거나, 혹은 정상적으로 체류할 가능성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의 전통에 따라 그들을 지원해오고 있습니다. 상파피에들과 연대하기 위해, 여러분이 12월14일 오후 2시 안트베르프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 참여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이 거리행진은 정부가 상파피에들을 구제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며, 국제앰네스티 등도 함께할 것입니다. …14일 낮 12시에 학교 앞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함께 출발합시다. 브뤼셀자유대학 총장 필리프 반케, 행정이사회 의장 장필피르 반네르웨옘.”

상파피에들이 브뤼셀자유대학의 한 건물에서 농성을 벌인 것은 벌써 지난여름부터다. 추방 위기에 몰린 상파피에들이 학교가 소유하고 있던 외곽 건물을 점거하고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 그새 60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인 이도 있고, 일부는 시내의 한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도 벌였다. 그러나 지난 11월19일, 구청과 경찰이 ‘위생상 문제’를 이유로 이들을 해산시켰다. 먼저 건물의 전기를 끊었고, 경찰의 해산 작전이 이어졌다.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이때 해산된 인원만 줄잡아 400~500명. 하지만 갈 곳을 잃은 이들은 다시 학교 중심부의 체육관에 자리를 잡았다. 대학 당국은 지난 11월25일 학교 체육관을 점거한 채 시위 중인 상파피에 200여 명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또 대학교수 2명을 중재자로 선임해, 이들이 정부 쪽과 협상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구제해줄 법적 방법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교 앞에는 언뜻 봐도 200명은 족히 넘는 ‘예비 시위대’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주로 아랍인들이지만, 흑인과 라틴계도 눈에 띈다. 시위에 동조하기 위해 나온 학생들로 보이는 백인들도 뒤섞여 있다. 낮 12시 정각이 되자 전세버스가 속속 도착했다. 대오가 갑자기 흐트러진다. 너도나도 버스 쪽으로 달려간다. 후진하는 버스에 치이기라도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수라장이다. 그렇다. 저 버스에 타지 못하면, 그나마 행진하러 갈 여비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로코 출신의 네비(32)가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그와 잠깐 얘기를 나눴다.

“벨기에엔 언제 왔나?”

“8년 정도 됐다.”

“왜 왔나?”

“먹고살기 위해 왔지….”

“여기서 돈을 벌 수 있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상파피에니까.”

“그럼 생활은 어떻게?”

“재래시장에서 짐을 옮겨주는 일을 한다. 한번에 2~3유로 정도 받는다. 하루 수입이 10~20유로 정도다. 요즘은 겨울이라 시장에 나가도 일이 없다.”

“그렇게 8년을 버텼나?”

“난 아무것도 아니다. 16년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벨기에 정부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나?”

“정식으로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종이 쪼가리인 신분증이 사람 죽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곁에 서 있다. 가슴엔 네덜란드어로 ‘나는 신분증이 없어요’라고 적힌 팻말을 달고 있다. 옷과 모자에는 학생증·건강보험증·여권·명함 등 각종 신분증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았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것들은 한마디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인간을 합법·불법 체류자로 나눈다. 하찮은 종잇조각이 없어 쫓겨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기도 한다. 그걸 알리기 위해서다.” 친구인 듯한 젊은이의 손에는 이런 팻말이 들려 있었다. ‘정치가 사람을 죽인다.’

그날 저녁, 벨기에 텔레비전 뉴스에선 안트베르프에서 열린 상파피에 집회가 단신으로 소개됐다.

브뤼셀(벨기에)=글·사진 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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