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칼 싱 다망(21), 그를 만난 건 네팔 동부의 시골 도시 다막이었다.
우리 일행이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바로 건너편 5층 건물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며칠째 그 앞을 오가던 유엔난민기구(UNHCR) 차량과 카메라를 든 무리들이 낯설지 않았나 보다. “혹시 난민 취재하러 오셨나요? 사실은 저도 부탄 난민이에요.”
추억의 고향이 아들에겐 태어난 곳일 뿐
소개대로, 그는 네팔에 사는 부탄 난민이다. 부탄 정부에 내몰려, 부모 손을 잡고 ‘벨당기 캠프1’로 온 게 벌써 17년 전이다.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두 칸짜리 오두막에서 그의 열두 식구가 산다. 2주에 1번씩 유엔난민기구가 식구 머리 수대로 쌀과 콩, 식용유 등 일곱 가지 식량을 배급하지만, 늘 부족하기만 하다. ‘Stop! HIV’ 따위의 문구가 새겨진 구호 의류를 받아 입고 사는 처지에 젊은 청춘은 늘 우울하다.
“먹을 게 부족하고, 새 옷도 필요해서” 그는 일주일에 6번, 다막에서 날품을 판다. 캠프에서 6km 자전거를 달려, 아침 9시부터 꼬박 8시간을 일하고 받는 돈은 고작 120루피(약 3천원)다. 네팔 현지인이었다면 200루피는 너끈히 받았겠지만, 억울해도 별수 없다. 네팔 정부는 부탄 난민들에게 거주할 권리는 줬지만, 일할 권리까지 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8남매 중 둘째인 그는 유일하게 ‘플러스2 과정’(11~12학년)까지 배웠다. 하지만 학교를 나온 그나 학교 문턱도 안 간 그의 형이나 일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당장 쓸 곳이 없는 배움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고 그는 푸념했다.
국제 사회는 부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부터 이들을 미국과 캐나다 등 7개 나라로 보내는 ‘재정착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혹시 재정착 얘길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부탄으로 돌아갈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만, 요새 전 떠나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살 순 없잖아요.” 부모에게 부탄은 두고 온 집과 추억이 있는 곳이지만, 그에게 부탄은 그저 태어난 곳일 뿐이다. 부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난민촌 학교에서 배운 부탄말(종카)은 이미 까먹은 지 오래고, 가난한 그 나라에 간다고 딱히 살길이 열릴 것 같지도 않다. “이왕이면 잘사는 나라에 가서 큰돈을 벌어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꿈이 뭐예요?” 어려운 질문도 아니련만 그는 한참 동안 눈만 끔뻑였다. “다른 나라에 가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요?”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이곳만 아니면 어디서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운을 뗀 그는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답을 정리했다. 정작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으로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였다. 살림에 보탤 돈을 제하고 남은 부스러기 돈으로 일주일에 몇 분, 사이버 카페에서 컴퓨터를 만져본 게 고작이니 그럴 만도 했다. 헤어질 무렵 되레 그가 물었다. “외국에 가면 어떤 일을 해야 좋을까요?”
벨당기2 캠프에서 만난 구만 싱 라이(26)의 처지도 다르진 않았다. 유창한 영어로 취재진들의 통역을 맡았던 그는 난민촌에서 멀지 않은 메디치대학에서 경영학까지 배운 재원이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난민촌 생활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에 4만5천루피의 빚까지 내 대학을 마쳤지만, 도무지 돌아갈 가망은 없어 뵌다. 불법으로 영어를 가르쳐본 게 이제껏 가져본 직업의 전부다. 가끔씩 찾아오는 취재진을 위해 통역을 할 때나 스스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뿐이다.
모호한 미래,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요”얼마 전 부모를 설득한 그는 미국 재정착을 신청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 가서 뭘 할 수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공부도 더 하고… 음, 그냥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사무실에서 하는 일도 회사에 따라, 부서에 따라 가지각색일 텐데…”라는 말에, “장기적 계획은 없지만, 미래 없는 이곳에서 평생 사느니 좋든 나쁘든 새 생활을 시작해보고 싶다”며 웃는다.
난민촌 청년들이 말하는 ‘꿈’은 아칼이나 구만의 것처럼 모호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처럼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어요”라거나, “이소연 언니처럼 우주 유영을 해보고 싶어요”라는 말은 기대하기 어렵다. 난민촌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역할 모델이래봤자 난민촌 학교의 선생님이나 의료봉사를 나온 의사들, 자원봉사자들뿐인 까닭이다.
17살 이하 아이들만 7개 캠프 전체 인원의 40% 남짓을 차지한다. 아이들은 캠프 안에서 고등학교 과정(10학년)을 끝낸 뒤 마을로 나가 플러스2 과정(11~12학년) 이상을 공부하지만, 마찬가지로 배운 걸 활용할 기회를 찾지 못한다. 난민촌 젊은이들에겐, 자전거를 타며 허망한 가슴을 달래거나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버려진 시간이 널린 난민촌에서 ‘배움’은 때때로 정신을 갉아먹는 덫이 된다. “내 신세는 왜 이럴까?”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질문이 길어질수록 견디기 힘든 게 이곳 생활이란다. 구만의 친구는 벌써 8년 전에 정신줄을 놓았다고 했다. “하는 일 없이 갇혀서 살다시피 하니 숨이 막히죠. 이 생활이 더 길어지면 나도 미치고 말 거예요.” 구만이 얘기했다.
젊은 여성들의 처지는 더 고단하다. 그나마 교육받을 기회도 적은 탓이다. “난민촌 10대 여성들 대다수는 캠프 안 학교에서 실시되는 초등교육 이상은 받지 못한다”고 부탄난민여성포럼의 한 회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에 못 가는 여자아이들은 부모를 도와 난민촌 안의 작은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일부터 실 잣기, 아이 키우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 그뿐 아니다. 열악한 난민촌 환경에서 여성들은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난민촌 안에서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결혼을 빨리 하는 것뿐”이라며 여성포럼 관계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문일까. 인드라 프라드 다칼(22)은 원하는 건 오직 “자유”뿐이라고 말했다. 억만금을 주면 무엇을 사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넓은 집을 짓고, 땅을 사서 농작물을 가꾸고, 남은 돈으론 먹을 걸 사겠다”는 이웃집 먼 마야 수바(58)의 현실적인 답변과 비교됐다.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모두들 자유를 꼽을걸요. 우린 (캠프 밖에 나가)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배운 걸 쓰기 위해 마음껏 돌아다닐 자유도 없어요.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남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죠.”
꿈꿀 자유를 찾아난민촌이나 국민소득 290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네팔의 시골 마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건, 얼마나 가벼운 생각이었을까. 자유가 없는 난민들은 마을을 에두른 너른 이모작 논을 가져보는 꿈을 꿀 자유도 없다. 길가에서 단잠을 청하는 힌두의 소들이라고 다를까. 기자의 머릿속 자유가 추상이었다면, 인드라가 말한 자유는 생존 그 자체였다.
다막(네팔)=글·사진 이정애 기자 한겨레 국제부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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