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지역 자치주 운동으로 흔들리는 모랄레스 정부… 중산층마저 등 돌리며 내전 소문까지
▣ 코파카바나·타리하·수크레(볼리비아)=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페루에서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에 도착했다. 수도 라파스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맨 처음 들려왔다. 그 여파로 모든 운송 수단이 멈춰섰단다. 1년 반 만에 다시 찾은 볼리비아는 한층 격한 사회적 대립으로 들끓고 있었다.
지난 5월4일 볼리비아의 ‘경제적 수도’라 할 동부 산타크루스에서 자치주 실행 여부에 대한 주 단위 투표가 치러졌다. 85%의 찬성으로 자치주 실시안이 통과됐다. 이어 베니·푼도주 등지에서도 잇따라 투표가 치러져 압도적 표차로 자치안이 통과됐다. 코파카바나 시청에서 만난, 에보 모랄레스 정부 탄생의 주역인 ‘사회주의운동당’(MAS) 간부는 “현재 모랄레스 정부는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충돌이냐 무시냐
2006년 1월 코카 농부 출신인 모랄레스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볼리비아 국민의 엄청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인으로는 중산층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취임 뒤 남미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천연가스와 정유산업을 국유화하는 한편 건국 이후 소외돼 온 원주민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그의 정책은 ‘변화’를 열망하며 모랄레스 정권 탄생에 적극 가담했던 중산층의 ‘소외감’을 자극했다. 토지개혁을 포함한 광범위한 개혁 정책은 천연가스 등 자원과 상업용 농토가 밀집한 동부지역 부유층의 ‘도발’을 부추겼다. 집권 2년7개월째를 맞은 현재 모랄레스 정부의 여전한 지지층은 ‘캄페시노’(빈농) 외에는 없어 보인다.
보수층의 반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지난해부터 산타크루스를 비롯한 동부 각 지역의 ‘자치주 운동’이다. 이미 볼리비아 9개 주 가운데 7개 주가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상태다. 라파스와 오루로주만 모랄레스 정부가 통제하고 있다. 모랄레스 대통령이 오는 8월10일 자신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을 신임하는 투표 수가 과반수에 미달하면 자진해서 사임하겠다는 게다. 하지만 이미 ‘루비콘강’을 넘어버린 동부 자치주들이 국민투표에 응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남은 것은 물리적 대립과 충돌, 아니면 아예 서로를 무시해버리고 제 갈 길을 가는 두 가지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당인 사회주의운동당 쪽의 시각은 단호했다. 원주민 출신 여성으로, 모랄레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사벨 오르테가 상원의원은 “현재 동부 지역에서 진행되는 자치주 운동은 단지 모랄레스 대통령을 흔들려는 전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는 다시 노예 상태로 돌아간다”고 절박하게 말했다. 같은 당 율랄리오 산체스(47) 하원의원도 “자치주 운동은 헌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불법적인 운동”이라며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부 지역은 자치주 운동을 통해 볼리비아에서 떨어져나가려 한다”고 열을 올렸다.
라파스와 산타크루스 간에 가열된 정치적 대립은 무엇보다 토지개혁 문제라고 볼리비아의 중견 언론인 카를로스 산디스(56)는 진단했다. 집권 사회주의운동당이 개정한 헌법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의 한계를 1만ha로 제한하고 있다. 옛 헌법 아래선 토지 소유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산타크루스를 중심으로 한 동부 지역의 대지주들은 엄청난 면적의 토지를 소유하면서 각종 이익을 누려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지주들의 반발은 예견돼왔지만, 지역 대중들까지 대거 반정부 투쟁에 가세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산타크루스주 자치 투표에서 85% 이상의 절대적 찬성률이 나온 것은 모랄레스 정부로선 충격이었을 게다. 집권당의 절대적 지지층인 캄페시노들도 동부 지역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6월20일 볼리비아 북쪽 라파스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타리하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주민투표를 위해 귀향길에 나선 타리하 주민들로 인해 다른 운송 수단은 매진된 상태였고 남은 선택은 버스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부 지역의 ‘포토시’에서 광부들이 파업을 하면서 길을 막아버려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
타리하 주민투표, 자치주의 출정식
볼리비아 남쪽에 위치한 타리하주의 인구는 40만명에 불과하지만 천연가스 매장량은 볼리비아 전체의 85%에 이른다. 생산량도 볼리비아 전체의 13%를 차지하는 등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내로 들어서자 붉고 흰 색깔로 만들어진 깃발을 꽂은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시가지를 질주하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긴장감보다는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Si’(예)라는 큼직한 문구들이 내걸려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22일, 타리하 주민투표는 평온한 가운데 치러졌다. 타리하 주지사는 아침부터 성당의 미사에 참석해 마치 출정식을 거행하는 듯한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투표 일정을 시작했다. 낮 12시가 가까워지자 각 주에서 온 지사들이 함께 산루이스고등학교에 설치된 투표장을 방문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은 ‘오토노미아’(자치주)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며 ‘찬성’ 구호를 외쳤다. 투표는 해보나 마나였다. 80% 이상 압도적 다수가 자치주에 찬성표를 던졌다. 소도시나 시골 마을에서 신발적인 캄페시노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지긴 했지만, 규모가 워낙 작아 투표 행사의 흐름을 저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타리하에서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 만인 6월29일, 추키사카주에서 주지사 선거가 치러졌다. ‘잉카의 심장부’로 불리는 추키사카주 주도이자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인 수크레는 선거 분위기가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1년 반 전에 방문했을 때 정부 각 부처에서 나온 공보직원들이 중앙광장에 홍보관을 설치해놓고, 시민들에게 모랄레스 정부의 개혁정책을 설명하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3명이 후보로 나섰지만 수크레 시민 대부분은 반정부 후보로 출마한 원주민 출신 사비나 쿠예야르(46·여)에게 쏠려 있었다.
8월10일 국민투표에만 매달려
지난해 초부터 수크레는 수도를 이곳으로 이전해오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고, 대부분의 시민이 수도 이전 운동을 위한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면서 정부와의 긴장이 고조됐다. 시위가 격화됐던 지난해 11월24일과 25일에는 3명의 시민들이 군인들의 발포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들이 사망한 뒤에 보였던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는 시민들을 한층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정부는 학생 2명과 변호사 1명 등 사망자의 가족들에게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고, 책임자 처벌도 뒤따르지 않았다.
6월29일 선거일 아침 8시, 유닌국립학교 교정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오후가 되면서 도시가 서서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사비나 주지사’(SAVINA PERFECTURA)라고 적힌 깃발과 함께 중앙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같은 깃발을 꽂은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시내를 질주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사비나는 약 58%의 득표율을 올렸고, 여당 왈터르 발다(55) 후보는 38%가량을 얻는 데 그쳤다.
추키사카 주지사 선거 패배로 모랄레스 정부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그럴수록 모랄레스 정부는 8월10일 국민투표에만 매달리게 된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앵거스라이드가 지난 6월9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잇따른 역공에도 모랄레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여전히 56% 선을 유지하고 있다.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야권은 ‘국민투표는 정치적인 충돌만 격화시킬 뿐’이라고 강조한다. ‘자칫하면 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떠돌고 있다. 이미 라파스의 캄페시노들 사이에서는 산타크루스에서 무기를 사재기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파국을 피할 해법은 없는가? 모랄레스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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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오르테가 상원의원은 코카 농부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집권에 결정적 힘을 보탠 인물로 평가된다. 모랄레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원주민 출신인 그는 미주대륙 원주민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원주민 정치인으로 꼽힌다. 오르테가 의원은 자치주 운동에 대해 “지주들이 토지를 잃지 않기 위해 벌이는 짓”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산타크루스 등 주요 지역이 자치주로 떨어져나갔다.
=지금 진행되는 주민투표는 모랄레스 대통령을 낙마시키려는 책동이다. 민중은 모랄레스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주민투표가 비합법적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자치주 운동을 하는 이유도 원주민을 고립시키고 땅과 천연자원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미 자치를 하고 있는데 왜 다시 자치주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현재 원주민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뭔가.
=당연히 토지 소유권 문제다. 엄청난 양의 토지를 단 몇 가문이 독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때문에 모랄레스를 지지하고 도울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게 되면 우리가 그나마 가진 토지까지 잃게 될 것이다.
동부 지역 지도자들이 자치주 운동에 적극 나선 이유는 뭐라고 보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치주 운동을 이용하고 있다. 또 자기들이 소유하는 토지를 지금껏 그래왔듯 마음대로 이용하기를 원해서다. 토지를 마음대로 팔고 사고 자신들의 이익대로 처분하기를 원하는 게다. 자치주를 원하는 이유도 대대로 소유해온 토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토지 문제로 여기저기서 유혈충돌까지 빚어졌는데.
=우리는 평화적인 해결을 원하며 또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지는 생산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농민에게 돌려줘 경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난 4월에 엄청난 면적의 유휴 토지가 발견돼 이를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미국 시민권자인 토지 소유주가 토지개혁 공사 일꾼들을 향해 발포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엄청난 면적의 토지와 노예까지 소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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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를 휩쓸고 있는 자치주 운동의 핵심 인물은 신경과 전문의 출신의 카를로스 답도움 박사다. 현재 루벤 코스타스 산타크루스 주지사의 정책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25년여 전부터 볼리비아에서 지역분권 운동을 벌여왔다. 그는 현 난국을 풀 해법으로 “대통령과 자치주 주지사들의 동반 사퇴 뒤 새롭게 선거를 치르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역 분권을 말하는 이유가 뭔가.
=지역 분권은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서 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산타크루스에서는 최초로 주민의 자발적 투표에 의해 주자치가 승인됐고, 곧 이어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관리를 거부하고 주민들 스스로 관리를 선출했다. 그리고 주민들에 의해 승인된 법률을 제정했다. 자치주 확대를 통해 중앙집중식 통치제도에서 탈피하게 되면 볼리비아의 민주화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자치주 운동은 모랄레스 정부 압박용이란 해석도 있다.
=정부 당국은 자치주 운동을 극우파의 책동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사실은 2006년 라파스 시민들의 다수가 지역분권에 찬성하는 투표를 한 예도 있고, 모랄레스 대통령도 지역분권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집권 이후 돌연 태도를 바꿔 자치주 운동을 반정부 투쟁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번 상원에서 지역분권에 대한 심의와 법안 통과가 예정됐지만, 물리적인 방해로 이뤄지지 못했다. 정부가 얼마나 권위주의적 중앙 집중에 집착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데.
=모랄레스 정권이 열린 자세로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자칫 내전 상황까지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오는 8월10일 재신임 투표를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8월10일로 제안된 국민투표는 아무런 해법도 제공하지 못한다. 헌법적 근거도 없는 투표다. 세계 최초로 소수가 다수를 향해 제안하는 국민투표로, 아마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게다. 자치주들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해법은 대화를 통해 전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대통령과 모든 자치주 주지사들이 동반 사임한 뒤 새로운 선거를 치르는 게 해법이 될 수 있다. 물리적 충돌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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