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케냐 출신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 교육받고 대선에 도전하기까지</font>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난 1월8일 0시(현지시각)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 딕스빌 노치. 〈CNN방송〉 화면에 비친 ‘2008년 미 대선 첫 번째 예비선거(프라이머리)’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입간판이 깜찍하다. 전통적으로 예비선거일 자정을 기해 투표를 시작하는 전통에 따라 이날 투표권을 행사한 이 마을 유권자는 모두 17명. 공화당 지지자가 7명이고, 민주당 지지자가 10명이었다.
17개의 표를 여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계 결과는 곧바로 투표소 곁에 세워진 게시판에 매직펜으로 쓰였다. 먼저 공화당. ‘루디 줄리아니 후보 1표, 마이크 허커비 후보 0표, 존 매케인 후보 4표, 론 폴 후보 0표, 미트 롬니 후보 2표, 프레드 톰슨 후보 0표.’ 이어 민주당이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 0표, 존 에드워즈 후보 2표, 데니스 쿠치니치 후보 0표, 버락 오바마 후보 7표, 빌 리처드슨 후보 1표.’
아메리카 드림과 뉴딜의 결합
딕스빌 노치의 개표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예비선거 전날까지 나온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공화당 매케인 후보의 선전과 함께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클린턴 후보를 두 자릿수 차이로 따돌릴 것이란 전망 일색이었다. 선거운동 막판에 나온 ‘힐러리의 눈물’은 가십거리에 불과했고, 아이오와 당원대회(코커스)를 휩쓴 ‘오바마 열풍’이 뉴햄프셔의 찬 기운에도 되레 열기를 더한 것처럼 보였다. ‘신화’는 시작되는가?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1961년 8월4일 미 하와이 호놀룰루의 퀸즈메디컬센터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이름을 물려준 아버지는 아프리카 케냐 서부 빅토리아 호숫가에 자리한 응얀자의 시골 마을 출신이다. 무슬림인 오바마의 할아버지는 영국인 지주의 집에서 요리사 생활을 했고, 부친은 어려서부터 염소를 몰며 가사를 도왔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땅을 밟았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어머니 앤 던햄은 미 캔자스주 위치토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노동자 출신인 오바마의 외할아버지는 2차 대전에 참전한 뒤 ‘제대군인 장학금’으로 대학에 진학해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외가가 하와이에 정착한 것은 연방정부의 주택보조금 정책 덕분이었단다. ‘뉴딜’이 만들어낸 중산층의 전형이다.
하와이대 마노아 캠퍼스에서 만나 사랑을 키운 오바마의 부모는 그가 2살 때 별거에 들어갔고, 결국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부친은 하버드대로 자리를 옮겨 박사학위를 받은 뒤 케냐로 돌아갔고, 어머니는 역시 하와이로 유학온 인도네시아 출신 롤로 수에토로와 재혼했다. 오바마 일가는 1967년 자카르타로 이주했고, 그는 그곳에서 현지인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양부 수에토로 역시 무슬림이었다. 지난해 초 그가 바람을 일으키자 극우 성향의 는 “오바마가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아랍어로 학교)에 다녔다”고 호들갑을 떤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중간 이름 ‘후세인’이 주는 묘한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면서 제법 논란이 커졌지만, 〈CNN방송〉의 현지 취재 결과 평범한 초등학교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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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급부상
10살 되던 해인 1971년 호놀룰루로 돌아온 그는 외조부모 곁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같은 해 그의 부친이 잠시 하와이를 찾아 오바마와 해후했다. 이 무렵 그의 친구들은 오바마를 ‘깡마른 체구에 괴상한 이름을 가진 아이’라고 불렀단다. 오바마는 지난 1995년에 펴낸 회고록 에서 “아버지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점, 즉 아버지는 석탄처럼 시커멓고 어머니는 우유처럼 허옇다는 점이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자리를 잡았다”며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청소년 시절 한때 술과 대마초, 코카인을 탐닉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1979년 고등학교를 마친 오바마는 애초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탈칼리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2년간 생활한 오바마는 동부 명문인 뉴욕의 컬럼비아대로 옮겨가 정치학과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83년 졸업과 함께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지만, 학생 정치단체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에 실린 한 시민단체의 구인 광고를 본 그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훌쩍 시카고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공적 인생’의 서막이었다.
시카고 외곽 로즐랜드 등지에서 공공주택 관련 활동을 하던 그는 1988년 하버드대 법대에 입학한다. 법대 시절에도 그의 ‘역동성’은 유감없이 발휘돼 그는 의 회장에 선출된다. 104년 만에 나온 첫 흑인 회장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1991년 법대를 졸업한 그는 시카고로 돌아가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는 한편, 유권자 등록운동 등 시민·정치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활발한 지역활동을 기반으로 오바마는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그의 정치적 부상은 뜻밖의 기회에 찾아왔다. 2004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자로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존 케리가 오바마를 지명한 게다. ‘대담한 희망’이란 주제로 연단에 선 그는 “국민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국민들은 정부가 정책 우선순위를 조금만 바꿔도 미국의 모든 어린이에게 동등한 기회의 창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을 뼛속 깊이 자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설이 이어지면서 전당대회장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그는 “우리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낼 때, 적어도 왜 그곳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며 “무엇보다 병력이나 평화를 지킬 힘이 부족할 때, 그리고 세계인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때는 결코 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초당적 협력’과 ‘국가적 단합’을 역설했다.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줄곧 그가 강조했던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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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미국을 붉은색(공화당)과 파란색(민주당)으로 양분하곤 한다. 그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 민주당 지지자 중에도 신을 경배하는 이들이 있고, …공화당 지지자들의 주변에도 동성애자 친구가 있다. 미국을 사랑하는 이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고, 찬성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 모두 미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열광과 환호 속에 연설을 마쳤을 때, 무명의 일개 주 상원의원이던 그는 전국적 인지도를 갖춘 유력 정치인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오바마의 열성 지지자를 뜻하는 ‘오바마니아’란 말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전당대회 연설의 ‘후광효과’는 대단했다. 어렵사리 민주당 후보 지명전을 통과한 그는 2004년 11월 본선에서 일리노이주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70%)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연방정치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초선임에도 의정활동과 입법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언론에 자주 이름을 올렸고, 2년여 만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대선에 나선 후보 가운데 우연히 흑인
그리고 지난해 2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의회 의사당 건물 앞에서 그는 2008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1858년 6월16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지명된 뒤, 노예제 폐지 문제로 갈라선 미국 사회를 겨냥해 단합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남긴 곳이다.
“정말 흥분되고, 감동적이며, 행복하다. 미국은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케냐 출신 아버지를 둔 흑인으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 학교를 다니고, 미국으로 돌아와 교육을 마친 사람이 미 합중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고 말이다.”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하루 앞둔 1월7일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은 〈PBS방송〉의 토크쇼 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오바마 후보에게 ‘충분히 흑인답지 않다’거나 ‘너무 흑인스럽다’는 얘기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오바마 후보는 흑인인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선에 나선 후보 가운데 우연히 흑인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첫 흑인’이란 꼬리표를 달고 합참의장과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두루 거친 그는 당적(그는 공화당원이다)을 초월해 오바마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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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이상 앞서 나갔던 오바마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3%포인트 차이로 뒤졌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변명거리를 찾기 바빴다. 하지만 뉴햄프셔에서의 패배에도 오바마 열풍이 주춤했다는 증거는 없다. 힐러리 후보가 이라크 침공을 찬성했다는 ‘원죄’가 있는 반면 오바마 후보는 침공 이전부터 줄곧 “분명한 근거와 국제적 지지 없이 이라크 침공에 나서는 건 이미 화염에 휩싸인 중동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며, 아랍 세계에서 알카에다의 신병 모집만 도와줄 뿐”이라고 비판했던 터다.
그에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해 12월17일치 에 쓴 칼럼에서, 오바마가 의료개혁과 관련해 “보험사와 제약업체 등 거대 기업과 충분한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을 질타했다. 그는 “오바마 후보가 말하는 단합의 주체에 거대 보험사와 제약회사가 포함되는 걸 그의 지지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며 “(거대 기업과의) 대화가 무위에 그쳤을 때 오바마 후보는 대체 뭘 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대화가 무위에 그칠 때 뭘 할 수 있나”
외교정책에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그는 이스라엘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한 적들에 맞서 이스라엘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말로 유대인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 또 지난 1월5일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열린 후보 합동토론회에선 “미국에 현저한 위협이 되는 알카에다 소탕을 위해선, 정확한 정보만 있다면 파키스탄 정부의 동의가 없더라도 파키스탄 서부 국경지대에 미군을 투입해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답했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통행’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첫 여성 대통령’만큼이나 ‘첫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 쉬울 리 없다. 힐러리·오바마 두 사람 모두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20여 개 주에서 경선이 치러지는 오는 2월5일 ‘쓰나미 화요일’을 지켜볼 일이다. 아이오와에 이어 뉴햄프셔에서도 3위를 기록한 에드워즈 후보의 말처럼 “이제 50개 주 가운데 2개 주에서 결판이 났을 뿐”이다.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오바마 열풍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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