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권이 이양된 남쪽 바스라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 북쪽 쿠르디스탄은 터키 공습받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떠난 이들이 돌아오고 있다. 끝없는 유혈사태로 목숨마저 위태로운 고향을 떠나 이국 땅 언저리를 떠돌던 이라크 난민들이 제 땅으로 향하고 있다. 등 외신들은 이라크 당국자의 말을 따 “하루 평균 1천여 명 정도가 국경을 넘어 이라크로 돌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상황이 나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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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만료, 낯선 땅에 버틸 수 없어서…
구호단체 ‘월드비전’은 지난 12월13일 보도자료를 내어 성급한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단체는 “이라크 정부는 치안 상황이 나아지면서 난민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난민들이 귀환길에 오르는 것은 다른 대안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유엔난민기구(UNHCR)가 최근 시리아에 머물고 있는 이라크 난민들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조사 대상자 대부분은 “비자가 만료됐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거나, 지닌 돈이 떨어져 더 이상 낯선 땅에서 버틸 수 없어 귀환을 결정했다”고 답했다.
돌아온 난민들이 맞닥뜨릴 환경은 떠나기 전보다 더욱 열악하다. 아랍 위성방송 는 12월18일 “이라크 정부가 저소득층에 대한 식량 등 생필품 배급량을 지금보다 절반 줄이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모하메드 하눈 이라크 통상장관 비서실장은 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입 가격이 폭등한데다 예산이 부족해 밀가루·콩·설탕·쌀·기름·분유·세제 등 10개 생필품에 대한 공급량을 절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게 됐다”고 전했다.
이라크의 생필품 배급정책은 지난 1991년 사담 후세인 정권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유엔이 경제봉쇄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현재 정부의 생필품 배급에 의지해 사는 빈민층은 줄잡아 1천만 명에 이른다. 최근 옥스팸 등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국제 구호단체들은 이라크 2600만 인구 가운데 적어도 800만 명은 응급구호가 필요한 절대 빈곤층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라크 정부는 내년 6월까지 생필품 배급 대상자를 500만 명으로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놨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의 현실이다.
“안정적 치안유지가 바탕이 됐다.” 12월16일 이라크 남부에 주둔 중인 영국군 당국은 바스라주 일대의 치안유지권을 이라크 보병 제14사단으로 넘겼다. 남부 최대도시인 바스라시 외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영국군이 시내로 진주한 것은 지난 2003년 4월6일이다. 지역의 치안을 이라크인들이 떠맡기까지 꼬박 4년8개월하고도 11일이 걸렸다. 그사이 영국군 174명이 목숨을 잃었고, 숨진 이라크 주민은 수천 명을 헤아린다.
앞서 지난 9월3일 바스라시의 치안권을 이라크 당국에 넘긴 영국군은 침공 당시의 10분의 1에 불과한 4500명의 병력만 남긴 상태다. 이들 병력은 앞으로 바스라 외곽의 소규모 공군기지에 머물며 이라크 치안병력 훈련에 집중하게 된다. 영국은 내년 봄까지 이라크 주둔 병력을 2500명 선으로 추가 감축할 예정이다. 바스라 주둔 영국군 마이크 시어러 소령은 12월16일 과 한 인터뷰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해왔으며, 이제 이라크군이 바스라 치안을 떠맡을 준비가 끝났다”고 강조했다. 그런가?
‘거리의 법’이 만들어낸 살풍경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시어러 소령의 주장과 판이하다. 〈BBC방송〉이 바스라 치안권 이양식 하루 전날인 지난 12월15일 내놓은 현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 대상의 86%는 “영국군 주둔이 바스라 정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긍정적”이라는 답변은 단 2%에 그쳤다. 거리에서 영국군의 모습이 사라지는 12월16일 이후엔 상황이 달라질까? 아랍 권위지 은 최신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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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남부지역에서 외국군이 치안권을 이라크 쪽에 넘긴 이후 되레 유혈 폭력사태가 기승을 부리는 게 상례였다. 물론 바스라에선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580km 지점에 위치한 바스라는 이라크의 유일한 항구도시다. 이라크 전체 원유 생산량의 70%가 이곳에서 생산되고, 생산량의 80%가 수출된다. 이란과의 국경무역도 활발하다. 이 때문에 세력다툼을 하는 각 정파도 서로 협력해 치안을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바스라에선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현재 바스라 일대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쟁투를 벌이고 있는 세력은 크게 셋이다. 모하메드 부스베 알 와엘리 주지사가 이끄는 파딜라당과 압둘 아지즈 알하킴이 이끄는 이라크 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SCIRI), 그리고 시아파 강경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를 추종하는 세력이다. 파딜라당과 사드르 진영은 누리 알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다와당에 반대하고 있고, 최고평의회 쪽은 연립내각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들 세력은 철저히 자기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다. 파딜라당은 남부석유회사를 장악하고 있고, 최고평의회는 정부의 공식 치안세력 구실을 하고 있다. 거리의 ‘질서’를 장악한 것은 사르드 진영이다.
“바스라 일대에만 무려 28개의 민병대 조직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경찰병력보다 무장이 잘돼 있다.” 일곱 차례나 암살 위기에 직면했던 잘릴 칼라프 바스라 경찰국장은 최근 영국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고, “민병대 중 일부는 이란을 통해 지속적으로 무기를 들여오고 있다”고 전했다. 민병대가 ‘집행’하고 있는 ‘거리의 법’이 만들어낸 살풍경은 “지난 6개월 동안 모두 48명의 여성이 ‘품행’이 방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살해됐다”는 얘기로 족하다. 취약한 군경조직과 날로 거세지는 민병대의 위세, 그리고 ‘율법’을 앞세우고 각종 위원회를 꾸려 ‘권선징악’에 나서는 강경파의 발호. 바스라의 현 상황을 두고 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직후 상황과 흡사하다”고 전했다.
남쪽의 불안은 북쪽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상대적 안정감을 유지해온 북부 쿠르디스탄에서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 12월16일 터키군은 전폭기 수십 대와 박격포를 동원해 도후크 지역에서 쿠르드노동당(PKK)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다. 는 현지 경찰당국자의 말을 따 “3시간여 동안 이라크 국경 100km 안쪽까지 파고든 이날 공세로 이라크 여성 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미군의 ‘정보 협조’ 아래 공습?
터키 군당국은 “이번 공습은 미군의 ‘정보 협조’ 아래 이뤄졌다”고 거듭 밝혔지만, 미국 쪽은 “공습을 허락한 일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공습 직후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자치정부 대통령은 성명을 내어 “터키군의 공습은 명백한 주권침해”라며 “이라크 영공방어권은 미국이 쥐고 있는 만큼, 미국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2003년 침공이 시작되기 전부터 ‘친미’의 외길을 걸어온 쿠르드 민심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쿠르디스탄의 정세가 급격히 요동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오랜 논란 끝에 미 의회가 이라크 주둔 비용을 포함한 예산안을 통과시킨 12월19일 는 흥미로운 기사를 내보냈다. 지난달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사령부(MNF-I)가 외부 용역을 통해 5개 주요 지역에서 19차례 실시한 표적심층좌담(FGD) 결과다. 신문은 “이라크의 모든 종파와 종족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이라크 유혈사태의 ‘뿌리’이며, ‘점령군’ 철수가 국가적 화해의 열쇠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정파·종족으로 갈가리 찢긴 이라크인들이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선 인식을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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