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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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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새 ‘부릉 말레오’를 찾아서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커피 농사 350년간 한 번도 향기로운 적 없었네, 배를 얹은 집은 금방 떠날 듯 궁핍하여라

▣ 술라웨시·자카르타(인도네시아)=글·사진 서해성 소설가

부릉 말레오를 찾아서
-인도네시아 기행

길이 끊겼다. 다만 적도의 산정 높은 곳에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마빠나 산에서 한 노인이 그 새를 키우고 있다. 오래 전부터 그 새를 보면 행운을 얻는다들 했다. 사람들은 갈 곳도 마땅치 않으니 새를 보러가자고 했다. 그 새가 부릉 말레오다.

슬라웨시는 밤도 푸르다.

짙은 녹색 열대우림은 적도 중심을 관통하면서 깊고 멀리 뒤채이고 있었다. 젖은 길은 그 안으로 사람을 빨아들였다.

밤하늘은 별들 사이로 푸른 기운을 머금은 채 깨어 있었다. 마른 철에 큰비를 퍼부은 탓일 게다. 적도는 비에 잠겨 있었다. 우기가 아직 달포 남짓인데 도착 첫날 108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6명은 미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면 산이 사납게 울어댔다. 지구가 더워지면서 때없이 큰비가 내려 비탈에 사는 사람들은 물에 쓸려갈까 산이 덮칠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전기도 전화도 라디오도 없이 산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나이마저 분명치 않았다. 산족들은 그런 일에 무심했다. 셈에는 더욱 무심했다. 그저 언제 비가 오는지, 쪼개면 다시 열 개 열매가 나오는 빵이를 따려면 어느 능선을 타고 올라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그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무지가 쓰나미라는 이름으로 수마트라 북쪽 아체를 집어삼켰다.

이레만에 처음 볕이 나온 날, 책보 만한 마당마다 바닐라 콩을 말리느라 손길들이 바빴다. 널어놓은 바닐라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지만 색깔만은 밥솥에서 막 쪄낸 강낭콩처럼 매끈했다. 바닐라 열매는 중간상인들이 거두어 내다 팔면, 이윽고 뉴욕과 파리와 서울에서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캔디, 케이크 따위에 향으로 섞이게 된다. 향기와 퀴퀴한 냄새 사이에 상품화된 문명의 미각이 끼여 있었다.

바닐라 값이 하루아침에 스무 배나 떨어져 버렸다고 한숨을 내쉬면서 데사 바하기아 마을 사람은 동그랗게 생긴 빵 비아와 도넛을 내왔다. 화교 상인들이 무게를 많이 나가게 하기 위해 납을 섞어 판 게 화근이었다.

바닐린(바닐라 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키가 작고 장작개비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달랑 냄비 비슷한 솥과 단출한 가제도구 몇이 고작인 집을 구석구석 둘러봐도 삭은 곰팡이 냄새말고 향이란 맡아볼 수가 없었다. 향기를 만들어내는 건 바닐라가 아니라 그네들의 앙상한 노동이었다.

중부 슬라웨시 주도인 빨루에는 8할 가량이 무슬림인데 이 마을만은 대부분이 교회에 나간다고 했다. 집주인은 벌써부터 앓아온 위통으로 커피마저 마시지 못했다. 돈이 없어 병원은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세 해 전 머지 않은 뽀소에서 무슬림과 기독세력이 부딪힌 일을 이야기하며 사내는 몸서리를 쳤다. 위장은 그 무렵부터 이상한 기미를 보였다. 안주인이 작년 해 밑 문지방에 붙여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뜨거운 햇빛에 번쩍거렸다. 그는 누군가 일을 부추긴 거라고 중얼거렸다.

배를 싸안은 채 일어선 사내는 부릉 말레오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삶에서도 필시 마찬가지일 게다. 건기에 퍼부은 비 때문에 썩어가고 있는 망해버린 바닐라 냄새 틈바구니에 가난하게 엎디어 있는 사내의 집을 나서 야자나무 사이로 길을 서둘렀다.

비탈 논에서는 벼를 심는가 하면, 옆에서는 나락을 베고 탈곡이 한창이었다. 벼꽃이 환하게 핀 논도 있었다. 써레질도 같았고, 줄서서 모내기를 하는 품새도 하등 다르지 않았다. 이삭이 퍼지지 않도록 벼 끝을 잘라 모를 심는 것도 다 본 것들이었다. 흙은 찰지게 살아 있었다. 들이 좋고 흙이 좋고 물이 넘치는 데도 쌀을 다른 나라에서 사들여 먹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답답했다.

길을 가로질러 흰 소들이 느리게 산으로 가고 있었다. 방목한 암소는 때로 송아지를 데리고 내려오기도 한다. 도마뱀 까달이 길을 건널 듯하다가 문득 몸을 돌려 돌아간 뜨거운 오정, 결국 또라자로 가는 길도 끊겼다.

또라자족들은 배 모양 지붕을 얹은 집에 산다. 조상들이 먼 곳에서 물을 건너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네들은 북쪽 바닷가 산 위에 살고 있다. 따나 또라자(또라자 땅)로 기독신앙이 일찍 들어왔고 커피가 따라 들어왔다. 세계 4대 커피생산국가인 인도네시아 커피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가장 일찍 형성된 커피 플랜테이션 흔적을 보고자 했던 생각은 접어야 했다. 또라자의 발효 커피가 별난 혀와 코를 가진 사람들을 환장하게 한다는 말도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길을 동행해준 제르미아 타푸싸는 인근에 살고 있는 또라자 사람 마리아 빵갈로네 집으로 일행을 데리고 갔다. 배 모양을 한 나무 집은 곧 노를 저어 떠나갈 듯이 야자 숲 사이에 서 있었다. 기둥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살림을 하는 층이었고, 지붕에는 죽은 이들이 살고 있었다. 마리아네 세간살이랬자 나무 바람벽뿐이었다. 서쪽으로 낸 거실 구석에 낡은 재봉틀이 한 대 있었다. 그미는 지금도 얼마든지 또라자 말을 할 수 있다면서 강하게 웃었다. 옹이가 박힌 손은 한눈에 강건해 보였다. 또라자 사람들은 누구든 이 손으로 나무에 세상 모든 걸 새길 수 있다고 했다. 또라자 사람들은 조각가들이다.

그미는 산비탈인 까뿌빠덴의 상가랑이 면에서 먹고살기 위해 부모를 따라 평원으로 내려왔다. 80년대 초반이었다. 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리면 꼬박 14시간이 걸리는 거리지만 이따금 고향에 가곤 한다. 대개 장사를 치르러 가기 십상이다. 또라자 사람들의 장례풍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네들은 사람이 죽으면 나무에서 얻은 방부제로 시신을 씻고 바른 뒤, 선형가옥 2층에 모셔둔다. 두 해를 넘기지 못해 육탈이 다 진행되지만 냄새가 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또라자 사람들을 죽음과 함께 사는 이들이라고 흔히들 신비롭게 말해왔다.

-어쩌다가 죽은 지 십 년 뒤에 장사를 치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상을 치를 돈을 마련하느라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리아의 남편과 자식 여섯 중 셋이 나가 살고 있었다. 다들 먼 데서 일을 하는 터다. 돈도 없고 길이 멀어 일가붙이가 다 모이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장례는 그들과의 마지막 이별이다. 그 날까지는 죽은 자도 해골인 채로 죽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즈음은 이틀이나 사흘 안에 장사를 치르는 추세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리아는 나그네에게 자신이 새기고 물감을 칠해 벽에 걸어둔 선형가옥 나무액자를 떼어내 주었다. 마리아의 무릎에 앉아 이방인을 살피던 열 살 막내딸 예스딘이 맨발로 따라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동구에 큰 키 피마자가 나무인 양 무연히 서 있었다. 어째 그네들은 배를 타고 와 산꼭대기에 올라가 살게 되었을까. 바닷가에서 들로, 들에서 계곡으로 산으로 쫓겨갔을 모습이 선했다. 그리하여 곧 떠날 것처럼 산정에서 수 천년을 살아냈을 게다.

커피 농장을 찾아가는 길에 작파한 장터에 잠시 머물렀다. 나무 벽 위에 함석을 얹은 집들이 줄을 지어 햇볕 아래 낮게 앉아 있었다. 향리의 장터 그대로였다. 사람 사는 일이란 이처럼 다를 게 없는 법이다. 나락이 같고 장터가 닮아서일까. 잉어, 메기는 물론 꼬리지느러미 무늬만 조금 다를 뿐 붕어도 고향붕어 같았다.

커피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는 카카오가 자라고 있었다. 미끄러운 카카오농장 군데군데 잘려나간 나무둥치가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카카오를 한 해 50만 톤을 생산하는 세계 3위 국가다. 커피는 국제 장사꾼들 농간에 가격이 요동치는 데다 손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서 요 몇 년 새 수확량을 줄여가고 있다. 소비시장은 확대되고 있음에도 정작 농사꾼들은 형편없이 가난할 뿐이다. 커피 농사 350년 동안 그네들의 삶은 향기로운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버둥거려도 커피나무를 기어오르는 불개미 신세였다. 문명사회에서 커피가 향기로울수록 적도 농사꾼들의 근육 아래 슬픔도 짙어갔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흘리는 땀방울과 커피 양은 엄밀하게 일치한다. 이들의 땀은 검다. 가난과 분노가 한번도 씻겨나간 적이 없는 까닭이다. 여전히도 생두 가격으로 치면 커피는 운송과 볶는 과정, 유통과 판매를 거치는 동안 산지보다 대략 1백 배 가량 비싸게 팔려나간다. 커피 농사꾼은 물론 빨루에서 도시 물을 먹은 운전수 아궁 스토포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커피 한 잔에 6천,7천 원이라고 하자 좌중이 혀를 내둘렀다. 그네들 버는 돈으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우리라. 그 이윤은 고스란히 다국적 커피유통업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다.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 커피를 위해 이네들은 몇 백년 대를 물려가며 농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빨루 일대 플랜테이션이 줄어들면서 농약을 치지 않게 되어 커피 질이 더 좋아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른바 오가닉이었다. 이곳에서 커피나무는 남도 감나무처럼 집이나 밭 어귀에 우두커니 자라고 있었다. 늙은 커피나무에 열리는 생두는 대두 콩알처럼 둥글고 작았다.

종일 땀이 비 오듯 했다. 이곳 사람들이 인사말로 목욕했나요 라고 묻는 걸 족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늘 아래서 잠시 열을 식혔다가 세 걸음 남짓 걸으면 이내 땀방울이 옷으로 배어 나왔다.

커피농장, 아니 이제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사카시도를 따라 까일리 이자족이 사는 뽀보야 마을에 들어갔다. 그가 까일리였다. 슬라웨시에서 까일리 사람들을 찾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울마다 깰로루나무가 서 있으면 거기가 바로 까일리 동네다. 까일리는 다아, 따라, 레도, 라히, 이자 이렇게 다섯 종족이지만 깰로루나무만은 같다. 아카시아 이파리와 비슷한 깰로구 나뭇잎을 삶아먹고 무쳐 먹는다. 사내든 이가 빠진 노파든 정글도 띠오노를 허리에 차고 다닌다. 까일리는 슬라웨시에 가장 일찍부터 살아온 족속이다. 중부 슬라웨시 250만 가운데 거의 1백만 명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주류종족인 자바인에 형세를 비길 바가 못된다. 다른 소수종족과 마찬가지로 치 떨리게 가난할 따름이다.

까일리 이자는 도시외곽에서 빈민을 형성하면서 몸과 노동을 팔고 살아가고 있다. 마을이 등을 기대고 있는 비탈은 석회산 자락이라서 나무도 온전히 자라지 못하는 땅이었다.

다아는 산에 살고 따라는 바리기에 살고 레도는 빨루에 살고 라히는 바닷가에 살고 이자는 빨로루에 산다는 노랫말을 그네들은 주절거린다. 그래도 이자는 산족 다아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레도족 청년 줄함 바흐미드 안내로 가왈리세 산비탈을 한참을 오르자니 산 길 양켠으로 판잣집들이 오구구 서 있었다. 다아족은 통역 없이는 소통하기가 어려웠다. 인도네시아 말과 까일리 말을 함께 써야 했다. 이네들은 오래도록 깊은 산에서 살아왔다. 가왈리세 실리나 비탈로 옮긴 것은 80년대였다. 더 높은 산 서너 개를 넘어와 정착을 한 건 수하르토 정부의 유인정책에서 말미암았다. 말뚝을 박고 마루를 깔고 나무 벽을 세우고 함석을 해 얹은 살림은 냄비 하나가 전부였다. 옷도 옷장도 책도 TV도 없었다. 당연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집밖에도 벽, 집안에도 벽, 그뿐이었다. 실리나 마을 120가구 모두가 한결 같다. 마을에는 빨래터를 겸한 공동화장실 5개가 있다. 습하고 침침한데다 가림막도 없었다. 산에서만 살아온 다아족은 걸음이 빠르다지만 이곳에서는 염소걸음과 사람 걸음걸이가 같다. 모두가 느리다. 개들도 느려 터졌다. 예순 줄은 돼 보이는 37살 여인 니오는 얼굴 마주치는 것 자체를 마다하고 등을 구부정하게 돌린 채 가까스로 몇 마디를 했다.

적도의 습윤한 태양 아래 가난이 정적 속으로 녹고 흐르고 있었다. 살리나 마을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싸우고 있는 장닭 두 마리뿐이었다.

가파른 비탈을 넘어 산꼭대기까지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토마토, 카카오도 눈에 띄었다. 이네들은 거의 무너질 듯한 비탈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어디서든 삶이 비탈진 사람들은 비탈에 사는 법이다. 조금만 큰비가 내린다면 사태가 날 듯이 보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차라리 절망적으로 눈이 맑은 사람들은 부끄럼이 많았다. 나그네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스미듯 사라졌다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조용히 나타나곤 했다. 똑바로 사람을 쳐다보는 일조차 없었다. 그네 부모들은 먼 데 농장에 가서 일하거나 작은 공장에 나가고, 소녀들은 곧 처녀가 되어 식모 살거나 술집으로 나간다. 서울 달동네가 자본의 외곽에서 싼 노임을 제공하던 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게 이주를 유인한 진짜 이유일 터였다.

삐낭을 따먹어서 이가 검 벌겋게 변한 여인이 커다란 낭카 나무에 올라가 낡은 옷가지로 열매를 감싸고 있었다. 크고 잘 익은 건 한 개에 2천 루삐아쯤 나간다. 바람이 불자 낭카나무는 몸뚱이 없는 자식들을 품에 안은 듯한 모습으로 괴괴하게 흔들렸다.

오, 내 고향

내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

내 손자가 생길 때까지

내가 어릴 적부터 벌써 알고들 있었지

풍성한 수확(넘쳐나는 곳).

줄함이 느린 곡조로 까일리 레도족 노래 팔룽 아따꾸(내 고향)를 들려주었다. 노래 부르는 얼굴이 깊게 슬펐다. 그 얼굴을 안고 오래도록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길 위에서 그가 긴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켰다. 산중턱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깰로루 나무가 서 있고 산 중턱에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다면 세상 어디든 다아족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그에게 부릉 말레오를 묻는 건 어리석다. 줄함은 새처럼 빠른 몸짓으로 멀어져갔다.

길이 사라지면 나그네에게 남는 것은 앙상한 지도뿐이다. 젖은 지도에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숭가이 빨루 물길 끝에 로레 린두 국립공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물굽이 저편 축축하고 가파른 산록에 새는 둥지를 틀고 있다. 지상에 4백 마리 남짓이고 오직 마빠나 산에만 산다.

누런 몸을 거칠게 흔들며 가쁘게 흘러가고 있는 숭가이 빨루를 거슬러 가는 동안 대지는 끌탕이었다. 질탕인 터라 이따금 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때마다 높은 습도와 열기 탓에 거의 물 속을 걷는 듯했다.

불어난 물가에서 무슬림 발인식과 만났다. 고작 서른 살 먹은 어머니 디안은 심장이 아파 아이 셋을 둔 채 죽었다. 삼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차일 아래 모여 앉아 있었다. 네덜란드 시절 식민지 건물에 들어 있는 유치원에서는 꺼루둥(히잡)을 쓴 조무래기들이 몰려나왔다. 열 자를 파 내려가도 바위가 나오질 않은 우물로 구정물이 스며들어 사람들은 멀리 물을 길러 다녔다. 마을사람들은 네덜란드 시절 판 우물이 가장 오래되었고 튼튼하다고 했다. 향리 어른들이 걸핏하면 일제가 낸 다리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듣는 듯했다. 식민지 유산이란 국경을 넘어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을 따라난 도로 또한 네덜란드가 냈고, 수로는 일제가 지배할 때 공사를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일제 활주로와 염전도 있었다. 그들이 맨 먼저 점령한 곳은 마무즈 항구였다. 말라카 해협이 막히면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마무즈는 최적이다. 지금 한국도 물동량 95%가 말라카를 경유하고 있다.

바닷길이든 철길이든 도로든 모든 길은 빨대다. 식민지 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식민지 이전 어느 혼인 잔칫날 부릉 말레오는 마을로 날아들었다. 그 날로 길조가 되었다. 이곳에서 식민지 이전이라고 하면 대개 옛날이라는 뜻이다. 말레오는 무척 까다로워서 자칫하면 달아나거나 죽어버린다. 기룸한 알이 어미 새 몸집 반 나마한데 땅에 묻어 지열로 두 달만에 부화를 한다. 정작 새끼 새는 아주 작다.

혼사 날 뒤부터 사람들은 말레오를 모셔 영물로 여기고 살아왔다.

끊어진 길을 몇 번 돌아서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갈래진 두 물길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판자로 지은 관리소는 비어 있었다. 대낮에 소리도 없이 날아드는 검고 작은 모기떼는 쉬지 않고 팔뚝과 다리를 파고들었다. 한참을 머물도록 인기척이 없었다. 사나운 물소리이 산기슭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릉 말레오는커녕 공원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리가 쓸려가 양쪽 비탈에 겨우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물을 건너 산으로 갈 길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 물길 옆으로 한 사내가 가랑잎처럼 걸어왔다. 떠내려가듯 넘어질 듯 나타난 사내 턱 밑에는 갈대 같은 수염이 성긋성긋 돋아나 있었다. 까닭 없이 노인을 붙잡았다. 그가 돌아가면서 나그네들의 땀을 닦아내 주었다. 일흔 다섯인 그가 부릉 말레오를 지키는 알리카미시 노인이었다. 집안에서 대를 물려 새를 길러온 그는 막 말레오에게 다녀오는 참이라고 했다. 똘리똘리와 루욱에서도 보호하고 있지만 자신이 가장 오래 말레오와 살아왔다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산길을 타고 돌아가자면 한 나절은 족히 걸려야 새를 볼 수 있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야자 잎을 덮은 움집은 작은 쪽마루, 거기에는 낯선 이가 찾아 와도 잠을 깨지 않는 게으른 고양이 한 마리, 한 평 남짓한 방에는 거친 돗자리가 깔려 있고, 바깥이 내다보이는 틈이 벌어진 나무 벽에는 나쇼날 라디오 한 대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등에 고운 점이 박힌 바퀴벌레도 몇 마리 있었다. 앞밭에는 노랗게 익은 카카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노인이 바람벽에 붙어 있는 부릉 말레오 포스터를 떼어내 주었다. 숲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알리까미시 노인이 한 해 동안 쓰는 문명이라곤 라디오용 건전지 4개가 고작이었다. 너무 작고 가벼워 보이는 노인은 정작 자신이 곧 새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산 아래를 지나 기름이 열리는 나무 자트로파 들을 지나왔다. 휘발유를 대신하는 연료를 뽑아내는 자트로파와 팜 농장을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바이오 에너지의 약점을 무시로 찾아내고 있지만 다 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옥수수 감자 고구마 카사바는 전분을 발효시켜 에탄올을 얻는다.

고구마와 흡사한 카사바는 쪄서 먹어도 제법 깊은 맛이 난다. 한국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팔고 있는 튀김 상당량은 이곳에서 가져간 고구마를 재료로 삼고 있다.

부릉 말레오를 보지 못한 채 슬라웨시를 떠나는 날 빨루 시장이 활주로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손에는 인터넷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나그네들을 집으로까지 불러들여 한국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군에서 운영하는 메르파티 항공사 탑승권에는 출발시간이 찍혀 있지 않았다. 슬라웨시로 오는 길에 게이트 앞에 선 직원이 빨루빨루빨루빨루 라고 네 번을 거듭 외치는 게 오래 전 시외버스 차부에서 보던 광경과 흡사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는 상당수의 기간산업은 군이 직접 경영하고 있다. 서른 개가 넘는 항공사가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하르토는 국가를 군벌에게 팔아버렸던 것이다. 그게 32년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실질적 토대였다. 98년 독재가 무너진 뒤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관료로 기업인으로 고스란히 남아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절차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이뤄지기는 했지만 중앙정부의 수탈은 더 세분화하여 지방정부의 영주적 갈취로 바뀌었다. 한국기업가들이 그들과 소통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식민지 지배와 독재 잔재를 쓸어내지 못한 건 이 나라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반둥의 날씨가 더욱 서늘했을 터이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습기를 느낄 수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기대와 달리 역사적인 아시아아프리카(AA)동맹이 시작된 반둥회의가 열렸던 현장은 찾는 이가 드물었다. 하루 50명 안팎 정도가 들린다고 했다. 회의는 1895년 식민지 시절 지은 건물 안 극장식 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 건물 설계자 반둥공대 슈마허 교수는 수카르노의 스승이었다. 반둥 출신 스카르노는 이미 30년대에 아세안 피압박민족을 상징 동물에 빗대 필리핀의 호랑이,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인도네시아의 반뗑(소)가 힘을 합하면 식민지 정복자들과 맞설 수 있다고 외쳤다. 이제 그 음성은 숱한 아시아 혁명가들의 사진과 이름 사이에서 디지털로 복제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부릉 말레오인 적이 있었다. 불의 시대에 읽던 불의 책들이 깃발을 들고 밀려왔다. 불밭을 지나오는 동안 화인처럼 그네들의 이름과 발언은 발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수카르노가 밀어내고자 했던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시아에서 인도에서 아주 떠났는가. 그들이 남기고 간 커피, 담배, 사탕수수, 고무농사의 진짜 주인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1727년에 자카르타 순다끌라빠에 세운 동인도회사 건물은 긴 운하 끝에 자라잡고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 나라에서 하던 대로 자카르타에 물길을 팠다. 그 건물은 이제 카페 VOC(동인도회사의 네덜란드어 머릿글자)를 단 채 식민지 간판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수 백년 동안 커피와 코코넛과 고무와 담배와 말루크제도의 향료들이 쌓였다. 건물은 가로로 거의 150미터는 되어 보였다. 마당에는 등잔을 달고 달리던 철제 마차가 놓여 있었다.

건물을 돌아드니 낡은 도개교가 운하 위에 힘겹게 걸쳐져 있었다. 고흐의 그림 ‘랭로이의 움직이는 다리’에서 보던 것과 너무도 흡사한 쌍엽 나무다리였다. 고흐는 일본 우끼요에 판화를 베끼고, 인물화를 그릴 때 배경으로도 반영했다. 유명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에도, 파리의 수집가 탕기 영감을 그린 초상에도 우끼요에는 등장하고 있다. 그의 그림 자산 상당부분은 아시아에서 말미암고 있는 셈이다.

쌍엽 도개교 나무상판은 썩어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중씰한 사내 하나가 빨간 테이프를 붙여놓고는 푼돈을 받고 다리에 올라서게 해주었다. 그건 영도다리에서 느끼는 것과는 퍽 달랐다. 고흐의 그림으로 익힌 것을 통해 다시 이 풍경을 투사하는 까닭이다. 식민지를 겪은 백성만이 느낄 수 있는 진한 우수가 썩은 운하를 타고 땀방울과 함께 흘러내렸다.

다리 양켠에는 손수레를 끌고 나온 장사꾼들로 부산스러웠다. 새점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들었을 뿐 부릉 말레오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말레오는 실은 세상에 없는 새인 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도시에서는 길이 끊어지지 않는 대신 사람 사이로 길을 내기 어렵다.

자카르타 시내는 짙은 매연이 자오록해서 시계가 짧았다. 대학이 몰려 있는 세라얀과 또망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 위로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그 해 5월 총알은 고가도로에서 캠퍼스 안으로 날아들었다. 학생들은 교문 근처에 몰려 있었다. 97년 IMF 사태로 인도네시아 민중생활이 견뎌내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달으면서 학생들은 수하르토 정권 퇴진 등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첫 번째 총알은 뜨리삭띠 대학 경영학과 학생 헨드리아완시의 목에 와 박혔다. 두 번째 총알은 뒤쪽에서 몸통 깊숙이 날아왔다. 그는 이미 고무탄환을 여러 발 맞은 상태였다.

“내 아들은 20년 3개월 19일을 살았다. 외아들이었다.”

헨드리아완시 어머니 카르시아는 트리삭티 학생 모두가 마미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머니라고 한다고 일러주자 카르시아는 눈물을 흘렸다. 처음 한국 사람을 만난다고 했다. 고통에 국경이 없어야 하듯 눈물도 국경이 없는 법이다.

△트리삭티 대학 열사추모탑(왼쪽)·카르시아와 대학2학년 예니와 딜라

98년 5월 12일 오후 4시 20분 헨드리아완시를 시작으로 아랍 아버지에 순다 출신 어머니를 둔 에랑 물리아 레스만치가 쓰러졌다. 법대 2학년에 다니고 있는 딜라와 예니는 가장 잘생긴 선배라고 추어주었다. 곧 이어 반둥에서 온 하피딘 로얀, 자와 출신 헤리 하르탄토가 차례로 총알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그들이 쓰러진 자리마다 세운 이름 새긴 동판에 꽃을 놓아주었다.

총소리와 함께 모든 지폐에서 사하르토 사진이 사라졌다. 독재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군벌과 부패관료들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카르시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는 시위대가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얼마 전 철제 담장을 더 높였다.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에서 숱해 들던 말을 만리 밖에서 똑같이 들었다. 그렇다. 고통과 분노와 신념에 경계란 한낱 무상한 것일 뿐이다.

뜨리삭띠의 마미는 총장의 배려로 학교 매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천천히 담장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거기 금속으로 된 기둥 네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네 명 청년 열사를 추모하는 탑이었다. 네 개의 탑 중심부에는 총탄이 뚫고 지나간 자리가 마치 방금 일이 일어난 듯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탄환이 들어간 자리와 나온 자리가 생생했다.

오래도록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낼 수도 있을 성싶었다. 혹 부릉 말레오가 부화한 자리가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때 탑 머리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침침한 적도의 저녁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 짓이 한동안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까일리는 까일리

다아는 산에 살고

따라는 바리기에 살고

레도는 빨루에 살고

라히는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산다네

이자는 빨로로에 살지

온 곳도 다르고 말이 달라도

까일리는 한 형제

다섯이 하나

까일리 다아, 까일리 따라, 까일리 레도, 까일리 라히, 까일리 이자

까일리는 까일리

어디 살든 깰로루나무 집 앞에 심고

다급하면 섬기고

배고프면 깰로루 이파리 염소처럼 뜯어먹으면서 살지

까일리는 까일리

다아는 산에 살고

이자는 빨로로에 살지

끌라빠나무 11그루 건네주고 각시 맞고

11루삐아 쥐어주고 신부 맞고

산비탈에서 축구를 하는 까일리는 까일리

전기 없어 TV도 없는 까일리 마을에 밤이 오면

끌라빠나무마다 불이 돋아

감옥 간 아들 오는 길 비추는

따리는 바리기에 살고

레도는 빨루에 살고

라히는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로 산다네

온 곳도 다르고 말이 달라도

깰로루나무는 하나

까일리도 하나

깰로루에 새 순 돋아나면

식모살이 간 딸년 배불러서 돌아오겠지

까일리는 까일리

왼쪽 허벅지에 두꺼운 칼 띠오노 찬 채

자맥질로 적도를 넘나들고

부릉 말레오와 함께 산을 차고 오르는

한 식경에 빨루 장터까지 와서 물건 팔고 맨발로 돌아간다네

까일리는 까일리

바틱 천 한 장이면

옷이 되고 이불이 되고 하늘이 되고 수의가 되는

거룩한 가난뱅이들

까일리는 까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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