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이니 사망 18주년, 핵 산업 찬양하며 지식인 탄압하는 이란의 오늘
▣ 테헤란(이란)=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penseur21@hotmail.com
지난 6월3일 밤, 이란 전역에서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끈 지도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사망 18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야제가 열렸다. 테헤란 남부 교외에 위치한 ‘이맘 호메이니 신전’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추모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일반 추모객들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추모 행사장 안에는 또 다른 수천 명이 경건하면서도 소란스럽게 모여 있다. 쿠란을 읽고 있는 차도르 차림의 여인들은 주위의 소음이 올라갈수록 입술을 더욱 바쁘게 움직여갔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준군사 조직으로 통하는 바시즈 대원들이 시끌벅적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아메리카에 죽음을!”
바시즈는 혁명 직후 이슬람 정신으로 무장하고 호메이니에게 충성을 맹세한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말하자면 ‘호메이니 홍위병’이다. 혁명 뒤 숨쉴 틈 없이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군의 지상 공격로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던져 지뢰밭을 제거했던 자살공격부대가 바로 바시즈다. “이란의 저항운동과 낙관적 미래는 바시즈의 높은 패기에서 나온다.”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최근 바시즈 학생들을 초대해 이렇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따금 대학가 시위 진압에도 나서고 여성들의 ‘불량 히잡’도 단속하는 그들이 지금 강렬한 반미 구호를 외치며 결전 의지마저 뿜어내고 있다.
공식 예배가 이어졌다. 1천여 명의 여성들이 곳곳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호메이니와 그의 뒤를 이은 하메네이의 사진을 들고 있던 한 여성은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설움에 겨운 울음을 토해냈다. 휠체어에 탄 아버지와 함께 온 소년도 누구보다 열심히 가슴을 치며 기도를 올렸다.
혁명수호위원회, 이슬람 혁명 수비대…
“다운 위드 아메리카!” “아메리카에 죽음을!” “우리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약속 시간을 1시간20분이나 넘겨 나타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연단에 오르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핵 산업은 이슬람 혁명 뒤 이란이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물이며 우리의 과학자들은….” 대통령의 쩌렁쩌렁한 연설에 청중은 다시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우리의 핵 산업을 누구도 좌절시키지 못하리라. 우리는 패배를 모른다. 후퇴도 모른다.”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 반미 구호가 거센 파도가 돼 행사장 바깥까지 메아리쳤다. 친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운 호메이니의 혁명 정신은 혁명 뒤 28년, 그의 사망 뒤 18년이 지난 오늘 ‘위대한 성과물’인 핵 산업과 함께 뜨겁게 부활하고 있었다. ‘신정일치 부흥집회’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행사였다.
“혁명은 모든 걸 바꿔놨다. 우리 유대인들에 대한 호칭도 ‘이란에 사는 유대인’(Jewish in Iran)에서 ‘이란 유대인’(Iran Jewish)으로 바뀌었다.” 이란 유대인 공동체 회장인 시아낙 모르사덱(45·의사)의 말이다. 그는 “이런 호칭 변화는 혁명 뒤 우리가 이란 사회에 더 잘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이맘 호메이니는 종교적 소수자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고 덧붙였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극한 대립에 비춰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바꿔놓은 혁명이지만 ‘진보’와 ‘평등’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혁명은 이미 근대화를 경험한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와 진보적 지식인들에겐 호된 회초리가 돼갔다. “혁명 뒤 정부는 모든 대학의 문을 4년간 걸어잠갔고, 우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구속과 고문, 살해가 자행됐다. 이란의 젊은 인재들이 대거 망명길에 오른 때가 이 무렵이다.” 혁명 직후 어수선하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를 만든 죄로 타흐미네 밀라니(47) 감독은 2001년 사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세계 영화인 수천 명의 서명과 개혁파로 통하는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이 그를 살렸다.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가 하타미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최고지도자’와 더불어 선거 출마 후보들의 자격을 일일이 심사해 출마 여부를 결정해주는 ‘혁명수호위원회’, 정규군과 별도로 강력한 조직력과 전투력을 갖고 있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그리고 ‘사법부’. 밀라니를 사면한 최고지도자를 빼면 모두 그의 처벌에 호의적이었던 이 기구들이 이슬람 혁명의 산물이다.
“대통령은 바뀌어도 시스템은 그대로다. 이란은 그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다.” 보수적 일간지 의 페레이돈 타헤르푸르(45) 편집주간이 강조한 ‘시스템’이란 건 바로 이 혁명기구들이 움직이는 체계를 두고 한 말이다. 1997년 이래 8년여 집권했던 하타미 정부의 개혁이 그다지 큰 성과를 보지 못한 건 이 시스템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다.
그 혁명기구들이 1980년대 초반 진행한 이란판 ‘문화대혁명’도 최근 여성들에 대한 ‘복장불량’ 단속와 대학 상주 기관원들의 감시 강화, 10년 전 학생들로부터 쫓겨난 대학 총장의 재임용과 일부 개혁파 교수들의 축출 등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양상이다. 때마침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5월6일 ‘문화혁명 고등평의회’ 의원 22명을 새로 임명하고 혁명 정신을 다졌다. 이란 핵 협상 대표인 알리 라리자니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대량 학살된 지식인들이 공동묘지로
“카바란 공동묘지에 가면 호메이니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을 게다.” 한 언론사의 기자 파테마 인사(40·가명)의 조심스런 제안에 카바란으로 달렸다. 수도 테헤란에서 동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외곽 지역인 그곳에는 같은 이름의 공동묘지가 하나 있고, 본래 소수 종파 신도들의 무덤이었던 카바란 묘지에는 1988년 감옥 대학살로 숨진 이들도 잠들어 있다. 1980년대 초 ‘문화혁명’ 기간에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처형됐지만, 1988년 학살은 그 규모가 훨씬 컸다. 수감 중이던 반정부 무장세력 ‘무자헤딘 에 칼크’(MEK)의 처형에 종교적 소수자, 개혁·진보적 운동가 등을 마구잡이로 포함시켜 자행한 대량 학살이었다. 그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된 카바란 공동묘지는 오늘 푸른 잡초도 아닌 시든 꽃송이와 빈병, 쓰레기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희생자 수 추정치가 “대략 1400명에서 3만 명 사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말해주듯, 완벽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또 철저히 숨겨졌던 터부의 역사다. 당시 정보부 소속으로 이 학살에 깊이 연루됐던 인물인 무스타파 푸르 무하마디는 심지어 2005년 12월 아마디네자드에 의해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됐다. 그는 인권단체들로부터 ‘암살 장관’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부패한 친미 왕조에 지쳐 있던 우리는 지향과 신분을 떠나 호메이니를 지지했다. 당시는 제국주의(미국)에 대한 저항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숙했다. 우리는 기본권을 다 잃었다.”
이란 작가협회 회원인 모센하키미(47)는 혁명이 불러온 음울한 ‘미래상’을 거침없이 털어놓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더 잃을 게 없다”고 말하는 그는, “1953년 민주적 선거로 집권해 친미 쿠데타로 무너진 모하마드 모사데크 정권과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어진 ‘이슬람 정권’은 미국에 적대적이라는 입장은 같은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매우 다르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비판적 지식인인 경제학자 파리보르즈 라이스다나(50)는 “물라(이슬람 성직자) 정권에 대해서 뭐든 비판을 하면 무조건 친미로 몰린다”며 껄껄 웃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 역시 지난해 8월 독일 시사주간지 과 한 인터뷰에서 같은 내용을 지적을 한 바 있다. 서구 정권이 이란 정부를 ‘괴롭힐수록’ 자신과 같은 개혁파들이 ‘반역자’로 몰린 공산이 크다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5월30일 이란 정보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제학술회의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스파이 활동에 연루돼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학계 쪽으로도 ‘문화혁명’의 기운이 퍼지고 있는 게다. “각종 회의에 참석해 국제적인 학술활동을 벌이는 척하면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외국인도 진솔하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함에도….” 군사정권 시절 한국의 정보기관이 툭하면 들이민 ‘간첩단 사건’ 발표회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란 정보부의 엄포다.
미국 덕에 입지 키우는 이란 강경파
“우리 운동을 무조건 ‘친서방’적이라고 이해하면 큰 오산이다. 우린 그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길이 따로 있다.” 여성운동가 나심 사라반디(21)의 다부진 말 역시 미국과 서방이 이란 개혁에 얼마나 민감한 변수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미국은 195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크 정부를 친미 쿠데타로 무너뜨린 이후 핵 문제에 대한 압박으로 강경파의 입지를 키워주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이란 민주화의 최대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이란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마약에 빠져드는 건…, 그러니까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린 이 나라를 벗어날 수 없다. 이건 마치 사방에 울타리가 쳐진 것과 같은 형국이다.” 사회학자 아프사네 타바솔리(38)는 경제 제재와 이란 고립화를 부추겨온 국제사회가 이란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완곡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이란을 고립시키며 자원과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가져온 국제사회를 향해 지난해 12월 테헤란 대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던진 목소리는 귀기울여볼 대목이 아닐까 싶다. “국제사회가 핵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이 이란의 인권과 민주주의는 끝없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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