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존 올웬의 ‘고향의 봄’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20세기 말 가장 오랫동안 최악의 유혈사태를 빚은 수단에 평화가 찾아오다

아프리카 난민캠프 르포 ② 우간다

▣ 호이마(우간다)=글·사진 정인환 기자inhwan@hani.co.kr

여행이라도 떠나는 기분이었을까? 그는 “귀환을 위해 장만했다”는 무늬가 화려한 청색 윗옷과 날렵하게 생긴 샌들을 신고 나타났다. 반나마 무너진 채인 비좁은 그의 집 안은 쌓아놓은 짐가방으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초원 저편으로 앨버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창괄리 정착촌 끝자락 롼와야야의 언덕에서 5월18일 오후 존 올웬과 마주 앉았다.

영국 분리정책과 탐욕이 일으킨 내전

올웬은 1988년 수단 남부 이스트 에콰토리아주 마구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다는 그는 채 5살이 되기 전인 1993년부터 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했단다. 그 팍팍했을 삶을 굳이 캐묻지 않아도 좋았다. 지난 5월16일로 예정됐던 귀환을 앞두고 살던 집까지 허물었다는 그는, 귀환이 연기되면서 맏형 카마와 피터(37) 가족을 위해 지난 4월부터 제 손으로 지었다는 새 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부인과 자식까지 딸린 그의 형은 아직 ‘귀환’을 결정하지 못했단다.

어린 올웬을 난민으로 내몬 수단 내전의 뿌리는 영국 식민지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으로 무슬림 지역인 수단 북부와 비무슬림이 절대 다수인 남부를 철저히 분리해 통치하던 영국은 1946년 북부를 중심으로 통합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아랍어는 남부에서도 공용어가 됐고, 북부 출신들이 남부에서 공직을 맡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수단의 권력은 북부를 중심으로 재편됐고, 영어로 교육받은 남부 출신들이 이런 변화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내전 발생의 원인에 ‘탐욕’이 빠질 수 없다. 수단 남부는 사하라 사막에 인접한 북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내륙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강우량도 많고, 호수 등 수자원도 풍부하다. 땅도 기름져 농사일에 적합하다. 게다가 수단 전체 수출액의 70%를 차지하는 원유 자원도 남부에 밀집해 있다. 북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남부 장악 욕심과 남부의 자치권 확대 움직임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게다.

1956년 1월 수단이 독립했을 때 수도 하르툼을 중심으로 한 북부 엘리트가 신생 독립국의 전권을 장악했고, 남부의 불만이 극도에 이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독립에 앞서 남부 에콰토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됐던 무장세력은 즉각 중앙정부에 맞서 극한의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제1차 수단 내전이다.

1972년 3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의 중재로 열린 평화회담에서 수단 중앙정부가 남부의 광범위한 자치에 합의하면서 총성은 일단 멈췄다. 17년을 이어온 유혈갈등으로 약 50만 명이 비명에 간 뒤였다. 희생자 가운데 교전에 직접 가담한 ‘전투요원’은 불과 20% 남짓에 불과했단다. 하지만 ‘미봉책’이 가져온 불안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1년 정권을 꿰찬 자파르 무하마드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은 1983년 수단 남부의 자치정부를 전격 해산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슬람화를 통해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어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남부를 포함한 수단 전역에서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따른 이슬람 국가화 정책이 추진됐다. 1차 내전을 종식시킨 아디스아바바 협정은 이로써 효력을 잃게 됐다.

“돌아가면 학교에 다니고 싶다”

같은 해 존 가랑을 중심으로 설립된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이하 해방운동)은 즉각 남부 지역에서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20세기 말 지구촌에서 가장 오랫동안 최악의 유혈사태를 빚은 제2차 수단 내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20년 넘게 불을 뿜은 두 번째 내전으로 수단 남부에서만 줄잡아 19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400만 명가량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 가운데 50만여 명은 국경을 넘어 우간다·케냐·에티오피아·이집트 등지를 떠도는 난민으로 전락했다. 5살 올웬도 그 무수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수단 정부와 해방운동은 2005년 1월9일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마침내 평화협정에 합의하고 총질을 멈췄다. 남부 지역에선 향후 6년간 자치가 보장됐고, 그 끝에서 분리독립 여부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원유 수입은 중앙과 지방이 절반씩 나누기로 했고, 이슬람 율법은 북부에서만 강제하기로 했다. 19살 올웬이 귀향을 결정한 이유다. 그는 “수단에 평화가 왔고, 고향에 가면 지금보다 사는 게 나아지리라 생각한다”며 “2004년 중등학교를 중퇴하고 줄곧 농사일을 해왔는데, 돌아가면 다시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꿈꾸듯 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