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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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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3개국 르포 마지막회] 개혁과 미국, 모순의 키워드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미국의 지지가 개혁파 입지를 좁히고 제재가 만든 고학력 불만세력은 개혁을 지지해

▣ 테헤란(이란), 다마스쿠스(시리아), 베이루트(레바논)=글·사진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kimsphoto@hanmail.net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23일에 걸쳐 이란, 시리아, 레바논 현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곳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던진 질문이다. 같은 질문을 거듭할수록, 그곳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두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품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국? 가보고 싶은 나라지요. 거리의 카페에서 미국의 보통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싶고…. 그런데 조지 부시나 도널드 럼즈펠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아요.”(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전기공학과 학생) 미국이란 나라가 지닌 선진국 이미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호감과 더불어, 미국의 패권주의에 강하게 반발하는 감정이 뒤섞여 있음이 이 짧은 말에서 느껴진다.

“부시는 밉지만 영화는 좋아요”

이란의 테헤란이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거리를 걷다 보면, 영화 DVD를 파는 가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종교적 규율이 강제되는 이란이지만, 테헤란의 가게 진열대에 놓인 DVD는 거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복사한 것이다. 테헤란의 중심지인 팔레스타인 광장 가까이에 자리잡은 한 가게의 주인에게 “많은 이란 사람들이 미국을 미워한다고 하는데, 영화는 온통 할리우드 것들인데…” 하고 말문을 뗐다. 그랬더니 돌아온 말은 “미국 영화가 재밌잖아요. 사람들이 찾는 것도 미국 영화들이고. 부시를 미워하는 것과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얘기지요”였다. 이른바 미국이 지닌 ‘연성 권력’(소프트 파워)이 중동 사람들의 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리에서 만나는 중동의 민중들이 미국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중동 지식인들은 어떤 눈으로 미국을 바라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크게 다를 바 없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그곳 지식인들도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미국의 패권주의와 친이스라엘 일방 정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중동정책이 잘못됐음을 비판하는 것이지,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 시민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모하마드 다우드 시리아 논설위원)라는 말들을 한다.

중동 지식인들은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이 잘못됐기에, 그곳 사람들의 반미 감정이 1990년대에 비해 크게 높아졌음을 지적한다. 중동에서 반미 노선을 분명히 해온 정치세력이 집권당이 되거나 지지 기반을 크게 넓힌 것도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2006년 1월 총선에서, 이란의 보수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후보가 2005년 6월 대선에서 각각 승리한 것이나, 레바논 헤즈볼라의 지지도가 2006년 여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늘어난 데에는 미세한 상황 차이는 있더라도 셋 모두 미국이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에 속하는 이 세 정치세력에 대한 중동 사람들의 지지도가 높아진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실패했고 근본적으로 수정이 요구된다는 방증이다.”(모하마드 레자 에르파니안 편집국장)

부시 행정부가 이란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바라는 정치세력은 개혁주의 또는 실용주의 그룹이다. 이를테면 모하마드 하타미 전 이란 대통령(1997~2005년 재임)도 여기에 해당하는 부류다. 그러나 미국은 이란에 대한 압박을 계속함으로써 오히려 하타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좁혔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고 이란 지식인들은 평가한다. 호세인 사이프자데 테헤란대학 교수(정치학)도 그런 평가를 내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로 이란에는 네 정치세력이 서로 힘을 겨뤄왔다. 호메이니, 그리고 지금의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한 근본주의 세력, 자유민족주의 세력, 개혁주의 세력, 그리고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란 안의 여러 정치적 집단 사이의 세력 균형을 올바로 헤아리고 대이란 정책을 더 사려 깊게 펼쳤다면, 이란에서 개혁파가 정권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부시 행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지난 2005년 대선에서 이란 유권자들이 보수강경 인물인 전 테헤란 시장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것은 미국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이란 사회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이래로 근본주의 그룹에 의해 통제되고 움직이고 있음에도 이란 사회가 다양화·근대화되고 있다는 점을 미국은 알아야 했다.”

유권자들 보수강경에 표를 던지다

이란군에 대한 통수권을 쥐고 있는 이슬람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보수강경파이자 전직 대통령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지닌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국가수호위원회 의장(상원의장과 같은 자리) 등은 ‘1979년 이슬람혁명 정신’을 내세워 하타미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개혁파를 견제 또는 압박해왔다. 국가수호위원회는 이란 선거에서 개혁파가 입후보하려 들 경우 후보 자격을 제한함으로써 선거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는 등 개혁파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렇다고 근본주의가 이란의 모든 분야를 통제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잘못 보는 것이다. 적지 않은 이란 사람들이 ‘이란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개혁주의에 호감을 지녀왔다. 그러나 지난 2001년 가까스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부시는 이란의 개혁파 입지를 좁히는 잘못된 정책을 폈다. 부시는 한편으로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하며 이란을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의 개혁파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 어찌 보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수사학적인 발언을 하곤 했다. 미국의 이란 경제 제재는 개혁파가 약속했던 경제 발전과 이란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겨졌다. 물론 미국이 이란 정치 지형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사이프자데 교수)

이란은 더 많은 햇볕이 필요해

시리아와 이란의 지식인들은 미국이 두 나라에 가해온 여러 종류의 제재가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라 여긴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만든 ‘월드 팩트북’ 자료에 따르면, 이란의 실업률은 15%(2007년), 시리아의 실업률은 12.5%(2005년)에 이른다. 청년 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다마스쿠스와 테헤란의 거리에서 고학력 실업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중동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불만세력들이다. 다마스쿠스대학 근처 음식점에서 만난 한 청년은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가서 일자리를 갖고 싶지만 입국 비자를 얻기가 쉽지 않다”고 푸념했다. 시리아나 이란 사람들 가운데 보수 성향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외국의 투자가 늘어나길 바라고 있다. 투자는 고용 창출로 이어져 이란의 높은 실업률을 낮출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란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미국이 막아온 것도 이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이란은 1996년부터 WTO 가입을 추진해왔으나, 번번이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됐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 활동을 포기한다면, 그 대가로 이란의 WTO 가입 신청과 이란 민간 항공기 부품 구입 면허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2005년부터 내놓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란의 테헤란에 머물던 중에 투자자문회사의 한 간부를 만났다.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40대 초반의 이 간부는 지적재산권 관련 업무를 보면서, 이란에 대한 외국인 투자 컨설팅으로 한몫 잡아보려는 꿈을 지녔다. 그는 “한국의 삼성그룹이나 LG그룹 같은 큰 기업들이 이란에 투자한다면 다른 데보다 훨씬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미국과의 긴장관계에서 오는 위험 부담은 오히려 기회로 작용한다”고 열을 올렸다. 그가 얼마나 ‘이란에 대한 한국의 투자 기회’ 설명에 열심이었던지, “다음 인터뷰 약속이 있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이란 커피를 한 잔 더하겠느냐”며 소매를 붙잡았다. 그는 끝머리에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은 이란을 잘 모른다. 이란 경제가 대외적으로 개방되도록 풀어준다면, 이란은 서방 세계와 더욱 긴밀히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이란은 밖으로 열린 사회로 바뀌면서 이란 사람들의 반미 감정이나 외국인 혐오도 훨씬 누그러질 것이다. 이런 변화와 함께 이란 개혁파에 대한 지지도도 높아져 이들이 정권을 잡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란이 근본주의적 노선에서 개혁적 노선으로 바뀐다면 미국에도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미국이 대이란 정책을 온건과 대화 쪽으로 바꿈으로써 이란 정치를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종교 등이 얽히며 복잡해져

21세기 들어 이란-시리아-레바논 헤즈볼라가 반미 공동전선을 펴는 모습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중동 국가들은 나누어져 있다. 레바논 베이루트아랍대학의 하산 카티브 교수(정치학)는 오늘의 중동에서 1950년대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가 일으켰던 ‘아랍민족주의’ 바람은 사라졌다고 진단한다. 그는 “아랍어와 이슬람이라는 같은 문화적 바탕을 지녔지만, 중동 국가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는 박물관에 들어앉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분열의 잣대는 친미냐 반미냐, 그리고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고 있느냐 아니냐, 시아파냐 수니파냐 등으로 복잡하게 날줄과 씨줄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집트와 요르단은 친미국가일뿐더러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은 아랍국가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는 대치 전선을 펴지만, 미국과는 가깝다.

레바논은 더 복잡하다. 푸아드 시니오라 총리를 정점으로 친미 성향의 정권과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반미 전선이 대치하고 있다. 카티브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레바논 상황을 바깥 사회와 고립시켜 생각하기 어렵게 됐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그리고 이웃 나라인 시리아는 저마다 레바논을 자국의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려 한다. 레바논 정치세력들도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자파의 힘을 키우는 데 이용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이것이 레바논이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부 중동 지식인들은 미국이 대결과 압박보다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로 미국의 전방위 압력을 견뎌왔다. 그리고 라이벌 국가인 이라크가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으로 약화된 상황에서 중동 지역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시아파가 이라크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은 상황은 시아파 국가인 이란에 나쁠 게 없다. 더구나 이란은 세계 제2위의 석유 매장량을 지닌 자원 부국이다. 석유에 중독된 나라라는 지적을 받아온 미국을 석유로써 압박할 수도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이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파르비즈 에스마엘리 이란 편집국장)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는 영원할 것

미국에서도 “미국은 이란, 시리아와의 대결 상황을 끝내고 화해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펴는 중동 전문가들이 늘어나는 모습이다. 미국의 이라크 수렁 탈출로를 찾아 정책 대안을 마련해온 이라크스터디그룹(ISG)이 지난 연말에 내놓은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가 이란, 시리아와의 외교적 대화에 적극 나설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미 외교협회의 선임연구원 레이 타케야는 외교·안보 전문지 2007년 3~4월호에 실린 ‘이란과의 긴장 완화를 위한 시간’이란 글에서, 부시 행정부는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함으로써 중동 상황을 안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시리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논리다. 이란과 시리아 두 나라는 미국을 패권주의라 몰아붙이면서도, 미국과의 외교적 대화 통로가 열리기를 은근히 바란다. 물론 미국이 중동정책에 변화를 준다 해서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거둬들일 것으로 믿는 이들은 취재 과정에서 만난 현지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도 없었다.



“미 강공책은 민주화에 도움 안 돼”

다부드 헤르미다스-바반드 알라메흐대학 교수 인터뷰



이란의 온건한 지식인들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잘못된 중동 정책에는 비판적이면서도, 이란 보수강경파들이 극단주의로 치달으면서 국내적으로는 억압적인 통제정책을 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다부드 헤르미다스-바반드 이란 알라메흐대학 교수(73)도 그런 입장이다. 이란 외교관으로서 뉴욕에 머물다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 소식을 들었던 그는 미국을 잘 아는 이란의 대표적 국제법 전문가다.
테헤란 시내 자택에서 만난 바반드 교수는 “이라크 석유를 챙기고 아울러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거치지 않고 이뤄졌기에 국제법상 불법”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의 이란 봉쇄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1979년 뒤 지금껏 미국은 이란을 봉쇄해오면서 때로는 군사적 위협마저 서슴지 않았어도 이란은 살아남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란 강공책이 이란의 민주화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미국이 이란의 평화적 핵이용권을 무조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다. 미국이 이란의 핵에너지 개발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만이 핵기술을 독점하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란의 보수강경파들이 핵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은, 만에 하나 미국의 강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곧 그들이 미국에 져 패배자라는 인상을 이란 국민들에게 심어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바반드 교수의 요점은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란 국내의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미국과 이스라엘을 겨냥해 강성 발언을 되풀이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지금 이란이나 미국이나 민감한 상황이다. 이란은 핵에너지 문제로 국제적인 압력을 받고 있고, 미국은 이라크 수렁에 빠져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강성 돌출 발언들이 지나칠 경우, 미국은 국제사회가 이란에 등을 돌리게 함으로써 이란에 불이익을 주게 된다.”
바반드 교수는 인권과 개혁에도 관심이 높다. 그는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는 제한을 받는 이란의 상황을 의식해 말을 아끼면서도 “미국의 강공책을 빌미로 이란에서 법에 의한 지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인권이 경시되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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