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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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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여, 에너지를 선택하라

등록 2007-01-26 00:00 수정 2020-05-02 04:24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새로운 청사진 ‘에너지 혁명’과 시장의 자유화…공급자 다변화를 이끌고 겨울이면 속 썩이는 러시아와의 협상에 유리해져

▣ 브뤼셀=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지난해 9월과 10월, 벨기에 각 가정에는 편지 두 통이 잇따라 날아들었다. 벨기에의 대표적 에너지 회사인 ‘일렉트라벨’(전기)과 ‘시벨가스’(가스)에서 온 편지였다. 내용은 “2007년 1월1일부터 브뤼셀 지역 에너지 시장이 자유화됐으니, 기존에 사용하던 일렉트라벨과 시벨가스의 전기와 가스를 계속 사용하려면 새롭게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계약 조건으로 “기존 전기·가스 요금에서 2% 할인, 기본 요금 연간 10유로(약 1만2천원) 할인, 최저가격 보상, 설치 서비스 무료” 등을 제시했다. 또다시 전기·가스 요금이 오르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봤는데 뜻밖이었다. 에너지난이 심해지고 있는 유럽에서, 그것도 겨울에, 두 회사는 왜 이런 좋은 조건으로 새 계약을 맺자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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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난 속 가격은 낮아져

지난 1월10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에너지 혁명’을 목표로 새로운 청사진을 내놨다. 이날 공개된 에너지 계획안은 크게 △재생에너지 사용 계획 △바이오 연료 사용 계획 △역내 전기 및 가스 시장 자유화 계획 △에너지 기반 시설 확충 계획 △핵에너지 사용 계획 △화석연료의 지속 가능한 사용 계획 △에너지 전력 기술 계획 등 여러 문건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다시 주요 범주로 나누자면 △에너지 시장 자유화를 통한 가격 경쟁력 강화 △에너지 안보 강화 △기후 변화에 대비한 역량 강화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는 지난해 3월 발표된 ‘에너지 녹서(그린 페이퍼)’의 세 가지 핵심 목표와도 일치한다. 다만 이번 것은 그 내용을 더 구체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번 계획안에서 관심을 가장 많이 끈 부분은 전기와 가스 등 에너지 시장의 자유화에 관한 것이다. 같은 벨기에 언론은 물론 같은 유럽 주요 언론들도 이 문제를 앞다퉈 다뤘다. 집행위원회가 직접 밝힌 계획의 핵심은 “소비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 각국은 GDF(프랑스), E.ON(독일), 에넬(이탈리아), 가스 내추럴·엔데사(스페인) 등 거대 기업이 자국 에너지 시장을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로 운영돼왔다.

에너지 시장이 폐쇄적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충분한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안정적인 시장 지배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둘째는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사태에서 보듯 어느 날 갑자기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하는 외국의 에너지 공급자, 예컨대 러시아 등과 유리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독점적 시장 지위를 가진 기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행위원회의 입장은 다르다. 현재 유럽연합 에너지 시장은 비싼 가격, 생산자와 공급자의 수직적 통합,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투자 부족 등으로 경쟁력이 약화돼 있다. 기욤 뒤랑 브뤼셀 유럽정책센터(EPC) 연구원은 “에너지 기업은 성격상 초기에 플랜트 건설 비용이 많이 들 뿐 일단 운영에 들어가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익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시장 공급자가 들어와서 경쟁을 하지 않는 한 기존 공급자는 가격을 낮추지 않고 폭리를 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행위원회는 에너지 생산자와 공급자의 분리를 통해 기업의 수직화를 막는 한편 에너지 시장의 자유화를 통해 에너지 기업 간 수평적 합병은 장려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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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시장에 경쟁자를 투입하라!

하지만 문제가 있다. 유럽에서 에너지 기업 간 합병에는 두 얼굴이 존재한다. 자국 내 기업 간 합병 또는 자국 기업의 외국 기업 인수는 찬성하지만, 타국 기업이 자국 기업을 합병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에너지 안보’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초 추진된 독일 E.ON사의 스페인 엔데사 합병 시도, 이탈리아 에넬사의 프랑스 수에즈 가스 합병 시도 등은 에너지 주권 보호 차원에서 피합병업체 쪽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반면 2004년 가스 드 포르투갈과 EDP의 합병, 2006년 11월 프랑스 GDF와 수에즈의 합병, 독일의 E.ON과 루르가스의 합병은 자국 내 기업 합병이었기에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에너지 시장의 자유화는 수입 에너지의 공급원을 다양화하는 것과도 맥이 닿는다. 유럽연합 25개국 중 에너지를 100% 자급하는 나라는 덴마크가 유일하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9개국은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80%가 넘을 정도로 유럽연합의 에너지 자급도는 취약하다. 특히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가스 수입의 20%를, 벨로루시를 통해 원유 수입의 12%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러시아를 방문한 주제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 에너지 시장을 개방해 유럽 기업들이 진출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했다가, “그러면 당신들은 무엇을 개방할 건데?”라는 면박을 들은 일은 유명한 일화다. 따라서 에너지 공급원의 다변화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 거론된다. 집행위원회는 시장 경쟁을 통해 경쟁력 있는 기업이 이러한 공급자 다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는 겨울만 되면 속 썩이는 러시아와의 에너지 공급 협상에서 유럽연합이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

에너지 시장 개방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회원국 간 에너지 ‘풀’(Pool)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독일·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하나로 묶어 전기 공급선을 공유하도록 하고 프랑스와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에너지 공급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는 평시에는 에너지 시장 경쟁을 통해 가격이 저렴한 쪽을 선택할 수 있고, 갑자기 에너지가 모자라게 됐을 때는 다른 쪽에서 긴급히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에너지 공급 인프라의 확충과 통일이 요구된다. 이번에 발표한 집행위원회 계획안도 거대 기업들이 이를 독점하면서 인프라 확충에 소홀함을 지적했다.

많이 쓰면 많은 누진세는 여전

한편 집행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닐리 크로스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이번 계획서는 (보호를 받아온) 에너지 기업들에 불편함을 줄 것”이라며, 강력한 시장 개혁이 있을 것임을 내비쳤다. 문제는 각국 정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벨기에는 이번 계획안을 발 빠르게 받아들이는 쪽으로 택했다. 일렉트라벨과 시벨가스 등 지역별로 권역이 나뉘어 있는 에너지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소비자 끌어오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은 다양한 요금 체계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새해부터는 심야전기 요금 할인이 주말로 확대될 것이라고 발표하며 요금 할인 경쟁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적게 쓰는 이에게는 할인 폭이 크고 많이 쓰는 이에게는 강력한 누진세가 붙는다는 점은 여전히 불변의 법칙이다. 시장 자유화로 인한 요금 인하가 에너지 낭비로 연결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2020년까지 에너지 사용량을 20%까지 줄이겠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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